열차는 떠나지 않았다. 역장은 출발 신호를 보류했고 기관사는 운전석 열쇠를 뽑아 다른 직원에게 맡겼다. 정민규는 그 절차를 끝까지 확인했다. 마법으로 누군가 열차를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해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안전조치를 먼저 해 두어야 했다. 마지막 객차 창문에는 ‘5’와 ‘도와줘’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객차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열자 내부에서 축축한 책 냄새가 흘러나왔다. 열차 안에는 좌석이 아홉 줄뿐이었는데 가운데 통로가 반듯하지 않았다. 한쪽으로 걸으면 전면 출입문이 가까워지고 다른 쪽으로 걸으면 끝없이 같은 좌석으로 돌아왔다. 셀레나가 발밑에 측정용 은실을 놓았다. 은실은 길어지지 않고 느슨해졌다가 다시 팽팽해졌다. 거리가 늘어난 게 아니라 통과한 횟수가 기록에서 삭제되고 있었다.
“들어간 뒤에 나올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케스가 말했다.
“그래서 한 명씩 들어가지 않습니다.” 민규는 역장에게 외부 감시 인원을 부탁했고, 바르트에게 통신관으로 현재 위치를 전했다. 그는 문턱을 넘기 전에 객차 번호와 시각을 소리 내 읽었다. 셀레나는 기록석을 두 대 준비해 하나는 역무실에, 다른 하나는 객차 안에 두었다. 두 기록이 서로 다르게 바뀌면 즉시 후퇴하기로 했다.
그때 벨라가 따라오려 했다. “아이들을 데려가는 건 제 일입니다.”
민규는 그녀의 어깨를 잡지 않았다. 대신 질문했다. “학생이 다섯이었다는 기억이 있습니까?”
“네 명입니다.”
“그런데 한 명이 모자라다고 말씀하셨죠.”
벨라는 안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모자란 건 제 몫이었어요. 나는 교감이 됐는데… 누군가 교감이 되려면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그녀는 그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은패에 새 글자가 나타났다. [대체 인력 안정.] 벨라는 몸을 떨며 벽에 기대었다. 민규는 그녀를 역무실로 돌려보내고 나디아와 연결했다. 기억을 무리하게 끄집어내면 더 위험해질 수 있었다. 벨라가 여기 있는 이유를 알아내는 것과 그녀를 지금 지키는 일은 따로 해야 했다.
객차에 들어간 민규가 처음 발견한 것은 마법진이 아니라 바닥의 배수구였다. 물이 객차 안에서 역 바깥으로 흘러야 했는데 배수구 둘레의 먼지가 젖어 있었다. 젖은 자국은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번졌다. 물이 거꾸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손전등으로 배수구 안을 비추었다. 철로 아래로 이어져야 할 구멍에서 오래된 학교 종소리가 들렸다.
“저 밑에 사람이 있는 건 아니겠죠?” 셀레나가 물었다.
“사람이 있는지 확인할 수는 있어요. 다만 지금은 통로 상태부터 봐야겠죠.”
민규는 얇은 종잇조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종이는 축축한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고 반대편으로 떠올랐다. 벽 틈의 바람도 객차 밖을 향했다. 배수구는 물을 빼는 시설이 아니라 어떤 방의 공기를 끌어오는 통로였다. 그 방에는 학생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역장실 도면은 여러 번 수정되어 있었다. 초기 설계에는 객차 정비용 배수구가 없었고, 그 뒤 보수 과정에서 임시 연결관이 추가됐다는 메모만 남아 있었다. 실제 배수구는 객차 바닥의 한가운데에 뚫려 있었다. 물을 빼려면 보통 바깥쪽 아래로 구멍을 낼 텐데, 가운데에 만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민규는 관 입구에 묻은 하얀 분말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석회가 아니라 칠판의 분필가루와 비슷했다. 물과 학교 교실이 연결돼 있다는 실마리가 하나 더 생겼다.
셀레나는 마법의 빛을 작은 실 모양으로 만들어 관 속에 흘려보냈다. 빛은 몇 미터쯤 이동하다 두 갈래로 갈라졌다. 하나는 역사 뒤쪽 창고, 나머지는 위쪽을 향해 올라갔다. 위에는 열차의 천장밖에 없었다. 빛이 천장에 닿자 객차 안에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교실 이동권 1회 사용.] 셀레나는 더 진행하지 않고 실을 회수했다. 누군가 외부 조사자의 마법을 출입 이력으로 바꾸고 있었다.
“한 번 들어오는 것만으로 수업에 참석한 것으로 처리하나 봐요.” 셀레나가 말했다.
“우리는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는데요.” 민규가 답했다.
“그걸 구별하지 못하는 장치일 수 있죠.”
객차의 좌석에는 학생이 남긴 작은 물건들이 있었다. 한쪽에는 접힌 종이학이, 다른 쪽에는 바닷가에서 주운 것으로 보이는 납작한 돌이 놓여 있었다. 사람의 흔적은 있었지만 오래된 먼지가 그 위에 쌓이지 않았다. 누가 언제 두었는지 알 수 없는 물건이었다. 민규는 가져가지 않고 위치를 표시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들어온 사람들이 무심코 누군가의 소지품을 빼앗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케스는 객차 벽에 적힌 낙서를 발견했다. ‘오늘도 넷으로 세었음. 나까지 다섯인데.’ 필체는 아이의 글씨였다. 그 아래에 더 작은 글씨가 있었다. ‘내일은 선생님께 말할 것.’ 하지만 낙서 날짜는 삼십 년 전이었다. 민규는 낙서를 읽고도 그 아이가 지금까지 여기 있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장소에서는 오래된 흔적과 오늘의 사람이 서로 다른 존재일 수 있었다.
객차 가장 안쪽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 하나가 서 있었다. 유리에 비친 것은 그림자였지만 지금은 어깨와 손이 분명했다. 아이는 민규를 보자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이에게 가까이 가지 않고 수첩에 다섯 개의 동그라미를 그려 보여 줬다. 아이는 다섯 번째 원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네 번째 원에 짧게 선을 그었다.
“네 친구가 널 기억하고 있지?” 민규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규는 물었다. “네가 여기 있는 게 네 선택이니?” 아이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다음 질문이 나오기도 전에 좌석의 숫자가 한 칸씩 바뀌었다. 8, 9, 10, 11. 없던 열 번째 좌석이 나타나자 통로 반대편에서 무언가가 철컥거렸다.
셀레나가 낮게 외쳤다. “누군가 탑승 인원을 다시 계산하고 있어요.”
벽에 [정원 4명, 미등록 1명. 정원 복구 절차 개시.]라는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열린 출입문이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민규는 황급히 문으로 달려가는 대신 객차 중앙의 비상 손잡이를 당겼다. 손잡이가 철컥거리며 돌아갔고 낡은 경적이 울렸다. 소리는 귀를 찢을 듯했지만 외부 기록석에는 정상적인 고장 신호로 남았다. 역무원이 그 소리를 듣고 보조 고정쇠를 설치했다.
“출구 확보됐습니다!” 바깥에서 대답이 들렸다.
아이의 모습이 잠시 또렷해졌다. 그는 작은 손바닥을 들어 한쪽 객차 벽을 가리켰다. 그 벽에는 학교의 학사 일정표가 붙어 있었다. 모든 날짜가 오늘로 적혀 있고 졸업식만 빈칸이었다. 마치 학생이 몇 년을 다녀도 마지막 날에 도착할 수 없는 구조였다.
케스는 일정표 밑에 적힌 문장을 읽었다. [입학 정원 4, 졸업 정원 4, 부족분 자동 보충.] 학생이 다섯 명 탔는데 정원은 네 명이었다. 사라진 다섯 번째는 여분이 아니라, 매년 다른 학생이 지워지는 과정에서 남겨진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는 원본을 뜯어 오려고 했지만 종이가 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셀레나가 사진으로 기록했고 민규는 원본을 훼손하지 않기로 했다.
교실처럼 변한 객차에서 들리는 종은 일정한 박자가 아니었다. 세 번 울릴 때가 있고, 여덟 번 울릴 때도 있었다. 민규가 박자를 적어 두자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다. 종이 울리기 전에는 늘 좌석 번호가 한 칸씩 늘어났다가 줄었다. 누군가 탑승한 사람을 세고 그 숫자를 정해진 인원으로 다시 돌리는 것처럼 보였다.
셀레나는 출입문 밖의 역무원에게 물었다. “지금 안에 몇 명 있습니까?” 역무원은 민규와 셀레나, 케스를 세 명이라고 했다. 기록석에는 두 명이라고 적혀 있었다. 케스가 한동안 말없이 화면을 보았다. 셀레나는 자신의 이름이 화면에서 지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녀는 바로 외부 기록석과 비교했다. 외부에는 세 사람의 입실이 남아 있었다. 하나의 기록이 잘못된다고 모든 기록을 포기해서는 안 됐다.
“제가 없어졌다는 얘기겠죠.” 셀레나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요. 여기 계시잖아요.” 민규는 대답했다. “기계가 틀린 거죠.”
그들은 서로의 이름과 현재 위치를 소리 내 확인했다. 마법을 다룰 줄 아는 셀레나조차 자신이 기록에서 지워지는 경험 앞에서는 잠시 흔들렸다. 그 짧은 불안이 사라진 학생들의 두려움을 조금 더 이해하게 했다. 셀레나는 ‘현재 함께 있는 사람’이라는 칸을 기록석 옆에 따로 만들어 놓았다. 화면의 숫자가 바뀌어도 그 칸에는 직접 확인한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진입과 후퇴를 반복하며 조사하던 민규는 도만에게 연락해 객차의 평소 청소 기록을 물었다. 도만은 차에 직접 타 보지는 않았지만 동료들이 특정 객차만 유난히 깨끗하다고 했던 일을 기억했다. 승객이 타지 않는 날에도 좌석이 닦여 있었고, 바닥에는 교실에서 사용하는 흰 분필가루가 조금씩 떨어져 있었다고 했다. 누가 청소했는지 기록은 없었다.
민규는 그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현장에서 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구분했다. 확인되지 않은 말을 사실처럼 쓰지 않기 위해서였다. 셀레나는 실내 환기구에 부착된 작은 장치를 발견했다. 장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부의 공기 흐름을 잠깐 바꾸었다. 마법의 감시석이라기보다 낡은 환풍기와 연결된 소리 감지기였다. 누군가 학생이 이름을 말하는 순간에만 장치를 작동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이름을 말하면 사라진 걸까요?” 셀레나가 물었다.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그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고 안전한지도 아직 모릅니다.” 민규가 말했다.
그는 관 안쪽에 소리를 전달할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았다. 사람이 말을 하지 않고도 신호를 보낼 수 있어야 했다. 작은 철제 손잡이를 두 번 두드렸더니 객차 끝에서 비슷한 소리가 돌아왔다. 그들은 소리가 전달되는 거리를 확인했지만 대화를 이어 가려 하지는 않았다. 너무 긴 신호를 반복하면 누군가 출입 명령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선 서로 연락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역무실에서는 벨라가 자신이 교감 대행이 된 해의 사진을 보고 있었다. 사진에는 교직원 다섯 명이 서 있었으나 한 사람의 얼굴만 하얗게 비었다. “원래 교감은 이 사람이었어요.” 벨라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짚었다. “교장 선생님은 빈자리라고 했지만, 나는 그분과 점심을 먹은 적이 있어요.”
민규는 통신관을 통해 그 말을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연결이 생겼다. 백종 학원은 학생에게만 자리를 빼앗는 곳이 아니었다. 직원도 정해진 숫자에 맞추려 했다. ‘네 명만 받는다’는 벨라의 말은 그녀가 믿고 싶은 규정이 아니라 그녀를 움직이게 만드는 명령일 수 있었다.
갑자기 객차 끝에서 작은 종이 울렸다. 아이는 귀를 막았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아이의 교복 단추가 네 개에서 다섯 개로 늘어났다. 얼굴은 뚜렷해졌지만 발끝은 흐려졌다. 민규는 두 가지를 동시에 확인했다. 아이가 여기 있다는 사실, 그러나 이 자리에 오래 머물수록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올 수 있니?” 그가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손가락으로 벽에 이름을 적으려 했다. 글자는 첫 획만 남고 사라졌다. 아이는 대신 물통을 꺼내 바닥에 물을 조금 흘렸다. 물은 객차 바닥을 따라 흐르지 않고 배수구를 거꾸로 올라갔다. 아이가 가리킨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니라 길이었다.
민규는 현장을 이탈하지 않은 상태에서 역무원에게 지하 배수도면을 요청했다. 역장은 우스운 이야기라며 웃다가 도면을 펴 보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객차 아래에는 배수관이 없었다. 대신 역사 뒤쪽의 오래된 창고와 연결되는 급수 배관이 있었다. 폐쇄된 창고 안에서 물을 퍼내면 객차의 누군가가 소리를 듣고 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객차를 뜯을 필요가 없습니다.” 민규가 말했다. “다른 쪽 끝이 있는 통로예요.”
그는 아이에게 창고 쪽에서 다시 신호를 보낼 거라고 알렸다. 아이는 처음으로 웃었다. 그 웃음이 얼굴에 남아 있을 때 민규는 뒤로 물러났다. 사람을 보았다는 흥분 때문에 안전한 길을 잃어서는 안 됐다. 모두 출입문 밖으로 나온 직후 객차의 좌석 숫자가 다시 아홉 줄로 돌아왔다.
역장은 마지막 객차를 따로 분리해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객차 번호를 적으려 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량 등록부에는 그 객차가 처음부터 없었다. 실제로는 철제 바퀴가 여전히 선로 위에 있었고 방금 사람들이 드나든 출입문도 있었다. 민규는 다시 수첩을 꺼냈다. ‘등록되지 않은 객차’라고 쓰지 않고 ‘등록부에 없으나 현장에 실물 존재’라고 적었다.
그 순간 창고 쪽에서 종이 세 번 울렸다. 벨라는 역무실 창문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그건 수업 종이 아니에요. 졸업식 종이에요.”
“학생들은 졸업하면 어디로 갑니까?” 민규가 물었다.
벨라의 대답은 기묘했다. “모두 집에 돌아간다고 배웠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열차표를 발급한 기록은 한 장도 없습니다.”
제10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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