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손잡이가 허공에서 흔들렸다.
정민규는 무심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사라진 학생이라면 먼저 숨을 쉴 수 있는지 확인해야 했고, 단순한 환영이라면 가방을 잡는 손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두 걸음 떨어진 위치에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 역에 학생 인계 담당 선생님이 계십니까?”
네 아이 가운데 가장 키가 큰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직 안 오셨어요. 우리는 다섯이 같이 왔어요.”
“다섯 명의 이름을 말해 줄 수 있니?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여자아이는 옆 사람부터 가리켰다. 카란, 메이든, 하비, 자신은 로제. 다섯 번째를 가리킬 차례가 되자 손가락이 멈췄다.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그 애가… 누구였더라?” 아이는 잠깐 입술을 움직이다 가방 수를 다시 셌다. “분명 다섯 명이 탔는데요.”
셀레나는 역무실에 설치된 음성 기록석이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작은 수정은 열차가 들어오기 전부터 다섯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 표면에 손을 대자 네 목소리만 들렸다. 나머지 하나는 분명히 존재했던 웃음소리와 신발 바닥이 바닥을 치는 소리였는데, 말은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대화를 지운 게 아니라 말할 기회를 가져간 것처럼 보였다.
역장은 처음에는 소란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아침 열차가 이어서 들어오고, 플랫폼 끝의 창고는 안전상의 이유로 봉인해 놓았기 때문이다. 민규는 경비원 신분을 밝히면서도 학생을 데리고 갈 권한은 없다고 먼저 말했다. “아이들 보호자와 학교 담당자를 확인할 때까지 개찰구 안쪽 대기실을 쓸 수 있겠습니까? 철로 옆은 위험합니다.”
역장은 아이들이 출입문 가까이에 서 있는 걸 보고 결국 대기실을 열었다. 따뜻한 물을 주고, 직원 한 명에게 학생들의 소지품이 사라지지 않게 지켜보라고 부탁했다. 로제는 다섯 번째 가방을 자기 옆 의자에 올렸다. 의자가 아주 조금 내려앉았다. 가방 안에는 물통, 접은 우비, 이름표가 달린 필통이 있었다. 이름표는 비어 있었다.
“원래는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로제가 말했다. “아까 기차에서 제가 확인했어요.”
“언제부터 안 보이게 됐니?”
“플랫폼에 내리자마자요. 저 가방 주인이 먼저 내렸는데, 무슨 장난을 치냐고….”
로제의 목소리가 끊겼다. 자기 말을 들으면서도 스스로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민규는 아이가 잘못 기억한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같은 사실을 다르게 보고 있을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케스는 역사 기록을 조사했다. 백종 마법학원은 청소년 특별교육기관으로 등록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역장이 보여 준 매주 인계 서명부에는 실제 선생들의 글씨와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상한 것은 학생 수였다. 한 주에 네 명, 다음 주에 다섯 명, 그 다음 주에 네 명으로 적혀 있는데 매번 오른쪽 끝에 같은 빈칸이 남아 있었다. 빈칸을 메우는 봉인이 있었다면 기록이 한 번씩 바뀐 것이 아니라, 반복해 누군가를 제외하고 있었을 수 있었다.
바르트와 통화한 민규는 오래된 창고의 도면을 받았다. 역사와 창고 사이는 십오 미터뿐이었다. 그런데 종이 도면에는 그 짧은 길에 세 개의 출입문이 표시돼 있었다. 도만은 창고가 실제로는 한 칸짜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세 문 가운데 적어도 둘은 공간을 속이거나 복제된 출입 기록이어야 했다.
아이들이 잠시 쉬는 사이 민규는 대기실 안에서 각자 설명해 줄 수 있는 일을 물었다. 카란은 자신이 집에서 짐을 싼 과정을 기억했다. 여행 첫날이라 누나가 과자를 넣어 주었고, 열차에 오르기 전에 정확히 다섯 봉지를 나눴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가방에는 네 봉지만 있었다. 하나를 먹어 버렸을 수도 있지만, 카란은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말했다. 민규는 과자의 수만으로 학생이 사라졌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래도 소지품 목록에 적어 두었다.
메이든은 열차의 좌석표를 꺼냈다. 세로로 긴 승차권 다섯 장이 겹쳐 있었는데 마지막 장의 좌석번호가 공란이었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친구를 옆에 앉히려고 두 표를 이어서 끊었다고 했다. 승차권을 나란히 놓자 공란 한가운데 접힌 자국이 일치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지워도 종이의 물리적인 모양까지 바꾸지는 못한 것이다.
하비는 보다 단순한 것을 기억했다. “그 친구는 멀미를 했어요. 역에 내리자마자 물을 달라고 했는데 누가 물을 줬죠?” 역장은 승강장 청소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은 아이들에게 종이컵 다섯 개를 준 기억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 쓰레기통에는 젖은 종이컵이 다섯 개 있었다. 직원은 그 사실을 확인하자 얼굴이 굳었다. 분명 컵을 하나 더 건넸지만 누구에게 줬는지는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규는 컵을 몰래 가져오지 않고 역장의 허락을 받은 뒤 별도 봉투에 넣어 보관했다. 기록을 증명하는 물건도 올바른 절차로 다뤄야 나중에 누군가 지울 수 없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이 모든 조사가 너희를 의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로제는 처음으로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누군가 자기 말을 그대로 믿어 주지는 않더라도 진지하게 확인해 준다는 것이 위안이 된 모양이었다.
“아저씨는 마법사예요?” 하비가 물었다.
“아니. 경비원.”
“그럼 지금은 어떤 마법을 쓰고 있어요?”
“없어. 컵 다섯 개를 세고 있지.”
하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웃었다. “그건 저도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같이 하는 거야.” 민규가 대답했다.
오전 열 시가 지나자 검은 교복을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자신을 백종 마법학원의 교감 대행 벨라라고 소개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학생들 얼굴을 한 명씩 확인하는 눈빛에는 불안함이 있었다. “아이들 인계를 늦추면 수업이 취소됩니다.”
“교감 선생님 성함과 실제 소속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케스가 물었다.
벨라는 작은 은패를 내밀었다. 패에는 ‘교감’이라는 두 글자만 새겨져 있었다. 이름을 묻자 여자는 눈을 찌푸렸다. “벨라입니다. 저는 벨라예요. 늘 그렇게 불렀어요.”
셀레나의 측정기 바늘이 움직였다. 은패에서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방식의 마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벨라는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그녀는 보호자 서명을 요구하는 대신 학생의 짐부터 세었다. 다섯 번째 가방을 보자 손을 뒤로 뺐다.
“이 짐은 우리 학생의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민규가 물었다.
“우리 학교는 신입생을 네 명만 받습니다. 한 명 늘어나면 통학열차의 균형이 무너져요.”
민규는 이해되지 않았다. 통학열차의 균형이라는 말은 학생과 관계없는 기계적 문제처럼 들렸다. 왜 학교가 학생 한 명을 받지 않기 위해 열차의 균형을 말할까. 그는 벨라를 거짓말쟁이로 몰지 않았다. 그녀 역시 누군가가 정해 놓은 절차를 따르는 사람일 수 있었다.
벨라가 보여 준 인계장은 특이했다. 학생들이 서명할 자리는 작고, 선생이 승인할 자리는 넓었다. 민규가 종이를 기울이자 뒷면에 눌린 자국이 드러났다. 이름 대신 ‘정원 충족’이라는 도장이 여러 번 찍혀 있었다. 그러나 네 아이의 손가락을 얹어 보면 각자 서명한 자리는 조금씩 달랐다. 기록망이 네 사람의 존재를 하나의 숫자로만 묶으려 했더라도 아이들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로제는 벨라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름 없는 친구는 정말 우리 학교에 못 가요?” 벨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교감으로 살아온 동안 규칙을 의심하면 머리가 아파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학생 한 명이 더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 뒤에는 어째서 걱정했는지 잊어버렸다. 하지만 오늘은 대기실의 창밖에서 누군가 서 있다는 느낌이 계속됐다.
케스가 은패의 발급기관을 알아보는 동안 민규는 교감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손등에는 최근 긁힌 상처가 있었고 손톱 밑에는 칠판에서 나오는 분필가루가 남아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 학생을 가르쳤다는 흔적이었다. “교감 선생님, 오늘 이곳에 오기 전에 수업을 하셨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벨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뇨. 학생을 데리러 왔어요.” 그러다 작게 덧붙였다. “그런데 왜 손에 분필이 묻어 있죠?”
역무원이 다섯 번째 가방을 옮기려 하자 대기실의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창밖의 플랫폼에는 아직 출발하지 않은 열차가 있었는데 차창마다 같은 다섯 번째 그림자가 비쳤다. 아무도 창가에 서 있지 않았지만 그림자는 서 있는 사람처럼 움직였다. 민규는 큰 소리로 학생들에게 의자에서 일어나지 말라고 알렸다. 셀레나는 수정등을 켰고 케스는 역장에게 구내 방송을 요청했다.
빛이 돌아왔을 때 가방 하나가 없었다. 가방이 놓였던 의자에는 젖은 손바닥 자국이 남아 있었다. 로제가 울음을 터뜨렸다. “제가 놓쳤어요. 그 애가 여기 있었는데.”
“놓친 게 아니야.” 민규가 낮게 말했다.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가 남았어.”
그는 자국을 사진으로 기록한 뒤 종이 위에 따라 그렸다. 손바닥은 작았고 엄지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사람의 손이었다. 하지만 의자 표면의 물에는 소금기가 없었다. 바다 가까운 역이지만 이 자국은 차가운 수돗물에 가까웠다. 무언가가 역 안의 물길을 이용해 사람을 옮긴 것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조명이 다시 켜지자 처음으로 자신들의 손을 서로 잡았다. 로제는 사라진 친구의 손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기억나지 않아 울었다. 민규는 그 말이 꼭 사실이어야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는 어른들이 있고, 지금 무리해서 기억을 되살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역무원은 뜨거운 차 대신 미지근한 물을 가져왔다. 긴장한 아이들은 차가운 물조차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셀레나는 벽을 따라 움직이는 마력 잔류 흔적을 조사했다. 바닥에는 학생의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았는데 출입문 쪽이 아니라 열차 쪽으로 이어졌다. 마법의 흔적은 반대로 교감의 은패에서 객차로 뻗었다. 누군가 가방을 움직인 방향과 이름을 지운 방향이 달랐다. 이는 학생이 자발적으로 열차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기록을 바꾸는 장치가 학생의 위치를 다시 열차 쪽으로 지정했음을 시사했다.
케스는 아이들에게 동의 없이 조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했다. 본인이 보고 들은 것만 말해도 되고, 지금은 말하기 어려우면 나중에 기록해도 된다고 했다. 민규는 그 절차가 사건 해결을 늦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이 겪은 일을 억지로 뽑아내면 과거 제7시설에서 벌어진 일과 다를 바 없었다. 로제는 울음을 그친 뒤 스스로 종이를 찾아왔다. “저는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어요. 제가 기억하는 것부터 써 볼래요.”
로제가 그린 그림에는 객차 창문에 기대 선 다섯 아이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의 옷에는 뚜렷한 색을 칠했는데 마지막 친구의 옷만 아직 칠하지 않았다. “색을 기억 못 하겠어요.” 로제가 말했다. 민규는 괜찮다고 했다. 색칠하지 않은 부분을 지우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기록이었다.
벨라는 조용히 대기실 문으로 다가왔다. “당신은 대체 누구십니까? 우리에게 학생을 내놓으라고 명령하지도 않으면서 왜 여기 남는 거죠?”
“학교가 있는지, 아이가 몇 명인지 모르는데 인계 완료라고 적을 수는 없어서요.” 민규는 대답했다. “그리고 아직 여기서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다.”
벨라의 얼굴에 처음으로 피곤함이 드러났다. “그 말은 내가 십 년 전에도 했어요.”
“언제요?”
“내가 처음 교감실에 들어간 날이요. 그날도 학생이 하나 모자랐어요. 교장 선생님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분명히 네 명이 들어왔으니까 네 명을 내보내면 된다고요.”
민규는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백종 마법학원은 학생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정해진 인원 숫자를 맞추는 장소일지도 몰랐다. 벨라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방금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디 계시지?”
바깥에서 열차 출발 경적이 울렸다. 아직 승객이 타고 있지 않아야 할 열차의 마지막 칸 창문에 아이 하나가 나타났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두 손으로 유리에 ‘5’라는 숫자를 썼다. 그러고는 한 글자를 더 적었다.
[도와줘.]
민규는 철로로 뛰어들지 않았다. 역장에게 마지막 객차의 출입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하고, 기관사에게 열차가 움직이지 않는지 확인받았다. 그리고 셀레나와 함께 차창을 향했다. 그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건 어둠 때문이 아니었다. 창문이 아이의 얼굴 부분만 다른 풍경으로 바꾸고 있었다.
유리에 한 줄이 더 나타났다.
[백종 마법학원은 다섯 번째 학생을 졸업시킬 수 없습니다.]
제10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