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두 시 십칠 분까지 열여덟 분.
시계탑에서 내려온 정민규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무전기를 붙잡았다. 바람이 차가웠다. 학생들이 한데 모인 대피소에서는 누군가 울고 있었고, 다른 누군가는 계속 이름을 불러 주고 있었다. 마법학교의 학생들이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방식으로 서로를 지키는 중이었다.
“루카, 들리나?”
대답이 없었다.
“레온, 혹시 루카 옆에 있습니까?”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루카가 누구예요?”
민규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대피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많은 학생들 틈에 루카가 앉아 있었다. 루카는 분명 살아 있었다. 맥박도 있었고, 얼굴도 다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깨에 붙은 학년 표식은 백지처럼 변해 있었다.
“학생, 이름이 뭐지?”
루카가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몰라요. 아저씨는 누구세요?”
민규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몰라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루카의 손에는 아직 0층 도면이 쥐어져 있었다. 몇 번이고 접힌 낡은 종이였다. 종이를 놓지 않으려 손톱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중에 말해도 돼. 너부터 안전한 데 앉아 있자.”
“이 종이는 제 건가요?”
“네가 찾은 거야. 아주 중요한 종이야.”
루카는 도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림의 한쪽 구석에 '미라'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을 보는 순간 루카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왜 슬픈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몰라도 괜찮아. 나중에 하나씩 알아보자.”
민규는 장갑을 벗어 그의 손목에 묶어 주었다. 가죽에는 네 줄의 깊은 흠집이 있었다. 첫날 밤 학생이 살아 있음을 표시하려고 낸 흔적이었다. 루카가 장갑을 만지는 순간 아주 짧게 웃었다.
“아저씨, 이거 기억나요. 계단에서….”
“그래. 기억 한 조각이 남아 있구나.”
민규는 셀레나에게 무전했다. “교수님, 0층 원본 명부가 아직 있죠?”
“제가 확인하러 갈게요. 하지만 원본을 옮기면 저장된 학생들의 기억이 같이 손상될 수 있어요.”
“옮기지 맙시다. 복사할 방법을 찾았어요.”
“어떻게요?”
“원본을 보관한 채로 빛만 옮깁시다. 인쇄실에서 사진을 현상하던 원리예요.”
셀레나가 잠깐 침묵했다. “마법 대신 빛으로 복사한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원본 명부가 새로 써지는 시간과는 다르게, 실제 종이에 박힌 흔적을 그대로 남겨야 합니다.”
민규는 짐을 나눴다. 셀레나는 0층으로 가서 명부를 안정시키고, 레온과 친구들은 대피소에서 이름을 쓰고 확인하게 했다. 학생회는 빈 교실을 임시 기록실로 만들어 서로 다른 진술을 모았다. 민규 자신은 인쇄실로 달려갔다.
옛 인쇄실의 문을 열자 기름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어제 루카와 함께 살폈던 낡은 인쇄기였다. 그는 전원부터 확인했다. 기계는 오래돼 마법과 관계없는 손잡이식 구동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그 덕분에 기록망이 흔들려도 작동할 수 있었다.
민규는 학생들에게 인쇄용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학교 곳곳에서 양피지와 공책, 시험지 뒷면까지 모였다. 그는 학생회장에게 명단을 불러 주었다.
“우리가 직접 확인한 학생부터 적습니다. 모르는 이름은 추측하지 마세요. 사진이나 친구의 진술이 있는 경우에만 함께 적으세요.”
학생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은 서로 기억하는 사실을 적기 시작했다. 레온과 함께 식당에 갔다는 학생, 루카가 교실에서 벌을 섰던 것을 기억하는 학생, 어젯밤 연구실에서 개구리로 변한 학생을 본 교수. 진술은 자잘했지만 서로 달랐다. 그 차이가 오히려 진짜 사람들의 기억처럼 보였다.
민규는 인쇄기 위에 종이 한 장을 얹었다. 그곳에는 아직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았다. 이름만 써서 복사하면 학교 기록망이 다시 지울 수 있었다. 필요한 것은 0층의 원본과 현재 사람들의 증언을 연결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였다.
바로 그때 옛 인쇄실 벽에서 톡, 톡, 톡 소리가 났다. 기억 보존실에서 발견했던 금속관이었다.
“교수님?”
작은 목소리가 관 너머에서 들려왔다. 셀레나였다.
“원본 명부 위쪽에 얇은 유리판이 있어요. 학생의 이름을 복제할 수 있게 설계된 것 같아요. 다만 어디로 보내는지 몰랐던 거예요.”
“그 관으로 빛을 보내면 됩니까?”
“네. 기록을 적는 마법선은 막혀 있지만 빛을 통과시키는 관은 열려 있어요.”
“그럼 투사경부터 찾아보세요. 굴절판 같은 게 있을 겁니다.”
셀레나가 유리판을 움직였다. 잠시 후 인쇄실 낡은 기계의 뒤쪽에서 빛 한 줄기가 새어 나왔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작은 렌즈가 원본 명부의 페이지를 천장에 비추었다. 이름이 하나씩 드러났다.
[루카.]
[레온.]
그 아래에는 학교가 잊었다고 판단한 다른 학생들의 이름이 있었다. 민규는 초점을 조절했다. 학생회장이 종이를 옮기고, 레온의 친구가 잉크판을 밀었다. 오래된 인쇄기가 천천히 돌아갔다.
첫 장이 나왔다.
두 번째 장. 세 번째 장.
학생들은 자신의 이름이 있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그러나 어떤 종이는 금세 글자가 희미해졌다. 마법이 남아 있는 종이에서는 여전히 오류가 퍼졌다.
“아저씨, 또 지워져요!” 누군가 외쳤다.
“그럼 종이 자체를 바꿔야겠군.”
민규는 인쇄실 창고에 남은 오래된 무마나 필름을 꺼냈다. 빛과 화학약품으로 상을 남기는 재료였다. 학교 행정실에서는 이미 구식이라고 버렸지만, 그에게는 가장 믿음직한 물건이었다. 그는 셀레나의 투사 빛을 필름에 맞추고 손으로 노출 시간을 셌다. 학생회장은 약품이 담긴 현상 통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잠시 후 이름들이 검은색으로 떠올랐다. 글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원본 사진은 지워지지 않아요.” 셀레나가 숨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닙니다.” 민규가 답했다. “학교 출석부가 다시 저 이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0층에서 셀레나가 세 번째 장부를 열었다. 교체 대상 대기라고만 적혀 있던 장부였다. 한 장을 넘기자 반대쪽 표지 안에 작은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정정 신청: 원본 대조, 당사자 확인, 독립 증인 3인.]
셋은 그제야 장부의 용도를 알아차렸다. 무조건 학생을 교체하는 기계가 아니라 잘못된 교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만든 원래의 안전장치였다. 누군가 표지를 뒤집어 놓고 사용법을 감췄던 것이다.
“서기관은 정정 절차가 있다는 걸 숨긴 거군요.” 셀레나가 말했다.
“일단 해 봅시다.”
민규는 루카를 데리고 다시 대피소로 갔다. 셀레나는 0층에서 원본을 펴 놓았고, 학생회장과 레온의 친구, 셀레나 교수의 이름으로 세 개의 독립 진술을 준비했다. 하지만 루카는 자기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당사자 확인이 안 됩니다.” 셀레나가 무전했다.
민규는 루카의 손목에 묶어 둔 가죽 장갑을 보았다. 네 개의 손톱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첫날 지하에서 루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했을 때 남긴 표식이었다. 셀레나는 그때 함께 자국을 확인했다.
“당사자가 자기 이름을 잊었더라도, 당시 자기 몸에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원본 기록과 진술이 모두 일치한다면 본인 확인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장부가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검은 경비모가 민규의 주머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만났던 두 번째 경비원이 남긴 물건이었다. 모자 안쪽에는 작은 이름표가 있었다.
[정민규. 내부 잔류.]
민규는 그 이름표를 무전기 옆에 놓았다. “당신도 듣고 있습니까? 저 아이를 찾았습니다.”
그 순간 0층의 원본 명부 위에 작은 빛이 나타났다. 어른 남자의 모습과 어린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두 번째 경비원이었다. 그는 장부의 가장자리에 자신의 손도장을 눌렀다. 빛으로 된 손도장이 잠시 선명하게 남았다.
“나도 봤어.”
민규는 무전기에서 똑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루카가 지하에 들어온 것도. 네가 그 아이를 업고 나간 것도. 그 아이는 분명히 있었어.”
셀레나가 눈을 크게 떴다. “네 번째 증인이 생겼어요.”
원본 명부가 천천히 빛났다. 세 번째 장부의 백지에 글씨가 생겼다.
[정정 심사.]
그리고 잠시 후.
[루카 — 복구 승인.]
루카가 눈을 깜박였다. 손목의 학년 표식이 되돌아왔다. 그는 멍한 얼굴로 민규를 바라봤다.
“경비 아저씨? 저 왜 여기 있어요?”
민규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네가 야간 통행을 해서 그렇지.”
“아, 또요?”
“그래. 너한테는 그게 더 익숙할 거다.”
루카가 환하게 웃었다. 셀레나는 무전기 너머에서 안도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학생회장과 레온의 친구는 서로 부둥켜안았다. 작은 기록 하나가 사람을 되찾았다.
하지만 더 많은 이름이 있었다. 레온과, 대피소에 앉아 있으면서도 서로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학생들. 민규는 필름을 손에 쥐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한 명씩 원본을 대조하고, 증인을 모으고, 당사자의 흔적을 확인했다. 서기관이 만든 잘못된 기록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지만, 학생들이 서로를 불러 줄수록 정정 장부의 글씨가 선명해졌다.
학생들이 정정 신청을 시작한 뒤에도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어느 1학년 학생은 자신을 기억해 주는 사람이 두 명밖에 없었다. 나머지 친구들은 며칠 전 전학 온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서류를 품에 안고 울먹였다.
“저는 그럼 다시 없어지는 거예요?”
민규는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네가 여기 있었다는 걸 확인하는 방법은 친구 말고도 있어. 네가 남긴 물건이 있을 거야.”
아이는 가방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 기술 수업에서 직접 깎은 새 모양 장식이었다. 뒷면에는 아이의 이름 이니셜이 칼로 새겨져 있었다. 민규는 손가락으로 파인 홈을 확인한 뒤 수업 담당 교수를 불렀다. 교수는 장식을 보자마자 학생을 알아봤다. 당시 새의 날개를 두 번 다시 깎아야 했다는 사소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 장식, 내가 분명히 봤어요.”
그 순간 정정 장부에 세 번째 증인의 이름이 채워졌다. 학생의 얼굴이 또렷해졌다.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장식을 꽉 쥐었다.
레온의 복구 때에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 레온의 이름은 남아 있지만 사진이 낯선 아이로 바뀌어 있었다. 학교의 마법은 두 사람이 같은 이름을 갖고 있다고 판정했다. 학생회장이 당황해 서류를 내려놓으려 하자 민규가 말했다.
“틀린 서류를 없애지 마. 왜 틀렸는지 남겨 놔야 나중에 같은 일이 생겨도 찾지.”
그는 오류가 난 명단을 별도 봉투에 넣었다. 단순히 이름을 되찾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기록을 마음대로 바꾸고 있었다는 증거도 남겨야 했다. 학생들은 차례로 잘못된 출석부와 복구된 이름을 비교하며 자기 손으로 날짜와 시각을 적었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이름은 많았다. 그런데도 민규는 처음으로 이 학교에서 학생들이 서로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마법이 아니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것, 함부로 없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 기억이 흔들릴 때 함께 확인할 것. 안전관리의 기본은 기계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이었다.
새벽 두 시 십육 분.
마지막 학생의 학적이 복구되었다. 레온은 자신을 지켜 준 친구에게 손을 흔들었고, 루카는 자기 이름이 적힌 인쇄물을 눈앞에 들이밀며 웃었다. 임시 대피소에서는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작은 박수 소리가 건물 전체로 번졌다.
시계가 두 시 십칠 분을 가리켰다.
아무 종도 울리지 않았다.
민규는 잠시 눈을 감았다. 삼십 년 동안 같은 시각에 갇혀 있던 기록이 조금은 풀려난 것 같았다. 그때 셀레나가 0층에서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정 선생님, 오래된 실종자 명부가 다시 나타나고 있어요. 삼십 년 전 지워진 학생 스물아홉 명의 이름이에요.”
“살아 있는지는 확인했습니까?”
“아직이요. 하지만 한 명은 기록 안쪽에서 직접 대답했어요.”
“누구죠?”
셀레나가 숨을 삼켰다. “미라예요.”
루카는 그 이름을 듣고 손에 들고 있던 필름을 놓쳤다. 이제는 분명히 무언가가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누나가 저한테 했던 말이 있어요. ‘아래로 내려오지 마. 내가 먼저 나갈게.’”
민규는 어둠이 남은 종탑을 올려다봤다.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학생 몇 명의 학적을 되찾았다고 삼십 년 전 실종자들이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서기관은 여전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고, 학교 밖으로 뻗은 기록망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날 아침, 교장 오르반이 경비실로 찾아왔다. 그는 봉인된 지하에 관한 모든 기록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교장실에 보관하던 은시계도 민규에게 건넸다. 국화 무늬가 새겨진 낡은 시계였다.
“내가 그날 문을 잠갔다. 그건 사실이야.”
“다른 사실도 있습니까?” 민규가 물었다.
“네가 문을 열려고 했다는 것도 사실이지. 그런데 이제 와서야 기억나는 게 하나 있다. 그 문은 원래 밖으로 나가는 문이 아니었다.”
민규의 손이 멈췄다.
“무슨 뜻입니까?”
“학교 아래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통로였다. 어린 네가 그 문을 열려던 건 안의 사람을 꺼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르반은 말을 끝내지 못했다. 은시계의 유리 안쪽에 아주 작은 얼굴이 비쳤다. 열 살짜리 소녀였다. 소녀는 교장을 향해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리고 민규를 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다시 왔구나, 문을 연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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