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96화
PAYLUA ORIGINAL · 제96화

96화. 이름이 없는 결혼식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012자

오프라인 책장
종탑 아래 골목에는 작은 꽃집이 있었다. 제6문 전체가 숨을 죽인 오후에도 그 꽃집에서는 꽃냄새가 났다. 마른 라벤더와 뜨거운 설탕물, 방금 잘라 낸 장미 줄기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꽃집 주인 연재는 흰색 리본을 열두 개 접어 놓고 있었다. 창가에는 ‘오늘 작은 결혼식이 있습니다’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가게 안에는 신랑이 없었다. “안 와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연재가 말했다. “바로 여기 있어요.” 그녀가 손짓한 쪽에는 진한 갈색 머리의 남자가 흰 셔츠를 입고 앉아 있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저는 하나입니다. 아니, 원래 그렇게 불렀어요.” 피엘이 이유를 물었다. 하나는 자신이 잘못 발음하는 말이 많아서 어릴 적부터 친구들이 짧은 이름을 써 줬다고 했다. 제6문 장부에는 성까지 포함한 긴 이름이 등록되어 있었지만, 오늘 아침 조회 결과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혼인 신고 예약, 예식장 임대 계약, 소액 저축 계좌의 접근 권한이 모두 보류되었다. “결혼식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하고 싶어요.” 하나가 말했다. “그런데 아까 청사에선 제가 법적으로 없는 사람이라 혼인할 수 없대요.” 연재는 꽃집의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반지를 들었다. 가게 바깥에는 잘 손질한 작은 정원이 있었다. 뒷마당 바닥에 연재가 직접 그려 넣은 새와 꽃 모양이 보였다. 지금까지 꽃을 키우며 남긴 흔적이라고 했다. 손님들이 가져가는 꽃다발보다 가게 안쪽에 남겨 둔 꽃이 늘 적었는데, 결혼식만은 조금 다르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작은 집이지만 여기에 우리가 같이 살 생각이었어요.” 연재가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온실을 하나 더 지을까 고민했죠. 이제는 이 가게가 내일도 저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하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좀 더 일찍 서류를 확인했으면…” “당신이 확인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거야.” 연재는 조용히 답했다. “그러니까 오늘 못 한 일과 당신 탓인 일을 섞지는 말자.” 피엘은 두 사람의 말이 낯설게 따뜻하다고 느꼈다. 누군가의 선택이 가볍게 지워지는 세계에서, 상대의 잘못이 아닌 것까지 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는 태도는 작지만 확실한 보호였다. 그때 꽃집 종이 울렸다. 오래전 하나의 이름을 적은 편지를 가지고 찾아온 우편배달부였다. 우편배달부는 배송이 불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지만, 봉투가 사람에게 온 것을 알고 직접 찾아왔다고 했다. 편지의 발신인은 하나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과 결혼을 축하하는 문장을 적어 두었다. 하나는 편지를 뜯지 않고 손에 올려놓았다. “지금 읽을래?” 연재가 물었다. “좀 이따. 오늘은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엄마 편지를 읽으면 울 것 같아.” “그럼 나중에 읽자.” 우편배달부는 배송 완료에 도장을 찍지 않았다. 대신 수신인이 봉투를 직접 받아 보관하고 있으며 개봉은 보류했다고 적었다. 피엘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놀랐다. 제6문의 장부가 사람의 이름을 잃었어도, 배달부에게는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전달했는지가 중요했다. “당신도 우편국 직원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동네 배달부죠. 제 이름은 남아 있어요. 하지만 내일 없어질 수도 있겠지요.” 배달부는 잠시 생각하더니 덧붙였다. “그러니 오늘은 가능한 일을 하려고요. 다만 남에게 멋대로 대신 서명해 주는 일은 하지 않고.” 피엘은 저도 그렇다고 답하려다 멈추고, 그 말을 수첩에 적어 두었다. “식 자체는 할 수 있겠죠. 친구들 불러서 함께 밥 먹고 축하받을 수 있어요. 하지만 저희가 원래 신청한 법적 절차까지 완료했다고 속이고 싶진 않아요.” “그렇다면 두 가지를 나눠야겠습니다.” 피엘은 말했다. “오늘 서로에게 약속하는 일과, 제도에 남길 혼인 기록을요.” 벤은 반지를 바라보다가 뜻밖에도 말이 없었다. 토비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악마인데 왜 이렇게 조용해요?” “결혼식에서 계약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날 싫어하거든.” “평소엔 다들 좋아하나 보죠?” “그 얘긴 오늘 하지 말자.” 하나는 결혼식에 와 준 친구 중 한 사람도 최근 이름을 잃었다고 했다. 새벽까지 아이를 돌보던 간호사였다. 제6문에서는 그 친구를 병원 인력으로 집계하지 않았지만 환자들은 그가 어제 밤 자신들을 돌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람이 이름을 잃어도 일을 했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남긴 남아요.” 간호사가 답했다. “그런데 내일도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말문이 막혔다. 누군가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과 그 사람이 내일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는 일은 달랐다. 피엘은 잠시 수첩을 내려다봤다. 자신은 언제나 첫 번째 일에 집중해 왔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에게는 두 번째가 더 급했다. 하린에게 긴급 연락을 보냈다. 의료 지원, 노동권, 임시 체류 보장 등 이름 말소 피해자에게 당장 필요한 보호를 어떤 방식으로 분리해 제공할 수 있는지 물었다. 하린은 공식 호명관의 결정이 끝나기 전에도 시행 가능한 ‘신원 분쟁 중 긴급 보호’ 절차를 찾아 보내 왔다. 다만 이는 제한적인 조치였다. 이름이 복원된 것처럼 광고해서는 안 되고, 당사자에게 임시 보호가 어디까지 적용되는지 알려야 했다. 연재는 그 소식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부터면 충분해요. 하나가 내일 우리 가게로 올 수 있고, 간호사 친구가 병원에 갈 수 있다면요.” 작은 결혼식은 해가 기울 때 시작됐다. 이웃들이 꽃다발을 들고 왔고, 밤빵 가게 주인은 오전에 만들어 둔 빵을 선물했다. 도림은 강에서 주운 낡은 이름표를 가져오지 않았다. 대신 강변에 피는 푸른 꽃으로 만든 화환을 걸었다. 이름표가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오늘 여기에 온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오스벨은 커다란 하얀 촛불을 켰다. 불꽃은 불안하게 흔들리다가 잔잔해졌다. 세아는 리네가 남긴 노래를 부를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어머니의 노래를 어머니 대신 확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이 직접 만든 짧은 노래를 불렀다. 하나는 꽃집 문 앞에서 연재의 손을 잡았다. “이름이 없어지니까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더라. 네가 나를 기억한다는 말만으로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알아. 그래도 오늘은 내가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말하고 싶어.” 연재가 대답했다. “그 말은 내가 들었어. 나중에 누가 우리 대신 다른 이야기를 적으면, 오늘 말은 다시 확인하면 돼.” 꽃집 안에서 작은 박수가 일었다. 법적 혼인이 완료됐다는 선언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약속하고 친구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의 마음에 남았다. 그때 종탑이 세 번째 예고종을 울렸다. 꽃집의 모든 문패에서 이름이 떨어져 내렸다. 손님들은 놀라 몸을 웅크렸다. 연재의 꽃집 이름도 유리창에서 사라졌다. 종탑 아래 광장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집으로 돌아갈 길을 잃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아이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이름이 사라진 지 오래된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공포를 다시 겪고 있었다. 피엘은 하얀 리본 하나를 집었다. 종탑이 도시를 다시 부르기 시작하면 꽃집에서 약속한 사람들의 이름마저 남이 정한 형태로 바뀔 것이다. 그는 리본 뒷면에 오늘의 참석자들이 원할 때 연락받을 수 있는 방법을 적었다. 공개 동의가 없는 사람들의 정보를 쓰지 않고, 각자가 허락한 방식만을 기록했다. 벤이 서온의 통신을 연결했다. [제8문 독립 보전망에 새 증인이 필요해. 다만 사람들을 마구 연결하면 원치 않는 이들의 이름까지 공개될 수 있어.] 연재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물었다. 증인으로 남고 싶은지, 익명으로 응답할지, 지금은 아무 기록도 남기고 싶지 않은지. 대답은 달랐고 그녀는 그 차이를 그대로 존중했다. 하나가 피엘에게 리본 하나를 내밀었다. “당신 이름도 적고 싶습니까?” 피엘은 잠깐 망설였다. “제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는 아직 확인 중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피엘이라고 불리고 싶습니다.” 하나는 웃으며 리본에 적었다. '오늘 우리 결혼식에 와 준 사람, 피엘.' 그 글자는 종탑의 다음 종소리에도 지워지지 않았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96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9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