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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95화
PAYLUA ORIGINAL · 제95화

95화. 피엘이라는 빈 자리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094자

오프라인 책장
가르덴은 자기 장부에 적힌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잉크가 손끝에 묻지 않았다. 글자도 지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 자리에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종이가 하얗게 변해 갔다. 첫 글자가 사라지자 호명관의 은방울 소리가 멈췄다. 두 번째 글자가 사라졌을 때 두 서기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당신들의 호명관이오!” 가르덴이 외쳤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이 곁에서 보낸 수년의 시간이 즉시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 그 시간을 확인해 줄 행정 기록이 없었다. 한 서기가 이마를 찌푸렸다. “호명관님이라는 호칭은 알고 있는데, 오늘 당직표에선 찾을 수가 없습니다.” 피엘은 가르덴 앞에 앉았다. “제가 사본을 하나 보관해 둔 것이 있습니다.” 그는 방금 장부를 대조하면서 남긴 가르덴의 현재 발언 기록을 보여 주었다. 가르덴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분리 조치를 반대한다고 말한 시각이 적혀 있었다. 토비와 세아, 청사 외부 기록원 이다의 독립 표식도 함께 있었다. “이걸로 내 신분이 돌아오겠소?” “아직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어떤 분이 어떤 일을 결정했는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르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 자신이 수많은 사람에게 했던 말이 목구멍에 걸렸을 것이다. 자신을 인증할 수 없으면 신청 자격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 규정이 이렇게 빠르게 나한테 적용될 줄은 몰랐소.” “규정은 당사자를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말과, 잘못된 규정을 모두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은 다릅니다.” 피엘은 답했다. 청사 안쪽에서 수많은 종이가 날아올랐다. 제6문의 시스템은 현장 책임자의 이름이 소실됐다고 판단해 모든 업무를 자동 대리로 전환했다. [정상 호명관 부재.] [임시 대리: 0000.] [호명식 계속.] 벤이 이를 드러냈다. “자기들이 관리자를 지우고, 관리자가 없으니 자기가 대신하겠다는군.” 오스벨이 지팡이로 공중의 종이를 잠시 멈췄다. 마력은 종이의 움직임만 막을 수 있었다. 이미 발송된 대리 승인까지 취소할 수는 없었다. 피엘은 제6문의 운영석에 다가갔다. 손을 대자 오래된 장치가 말했다. [당신의 이름은 말소되었습니다.] [이 장소의 누구도 당신의 요청을 접수할 수 없습니다.] “제 요청이 아니라 현재 기록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요청자 존재 불명.] 피엘은 입을 다물었다. 서류를 제출할 권리를 잃는다는 것과 자신이 사라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토비에게 수첩을 건넸다. “이걸 당신 이름으로 제출해 주시겠습니까?” 토비는 망설였다. “피엘 씨가 쓴 걸 제가 쓴 것처럼요?” “아닙니다. 제가 작성했고, 당신은 전달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하십시오.” “그럼 할 수 있죠.” 토비는 종이에 서명했다. 수첩을 건네받는 순간 피엘은 지난날 자신이 농부에게 잘못된 용사의 신탁을 전달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농부의 이름만 제대로 적혀 있으면 명령의 내용까지 맞는 줄 알았다. 지금은 농부가 자신을 대신해 전달하는 기록에서도 누가 말했는지를 끝까지 구분해야 했다. 그러나 접수대는 토비의 서명까지 반려했다. [원본 작성자의 식별 불명.] [전달 서명과 진술 작성자 불일치.] “정확하게 쓰니까 또 안 된다고 하네요.” 토비가 말했다. “그럼 우회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낮은 목소리가 운영석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그 문제를 한 번 겪어 봤어.] 서온이었다. 그는 제8문에서 독립된 이름으로 업무를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리 피엘’이라는 직무명으로만 불렸고, 누가 무엇을 승인했는지조차 혼란스러웠다. 지금은 자신이 하는 일과 다른 사람들이 그 이름으로 한 일을 구별하려 애쓰고 있었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고 네 이름을 빌리지는 않을 거야. 나도 나를 대신할 수 없지. 다만 제8문의 독립 보전망에 지금 일어나는 일을 증언할 수는 있어.] “서온의 증언과 저희 현장 기록을 대조하면 현재 피엘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겠군요.” 세아가 말했다. “최소한 지금 이 공간에서 일어난 일을 서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서온은 제8문의 인증 방법을 공유했다. 그 방법이 완벽한 것은 아니었다. 증인들이 서로 짜고 잘못된 말을 하면 기록 자체가 거짓일 수 있었다. 서온은 바로 그 한계를 먼저 설명했다. 서로 다른 곳에 있는 기록을 대조하고, 기록이 작성된 시각과 변경 내역을 남기며, 무엇보다 당사자가 사후에 이의를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나를 서온이라고 불러 준 뒤에도 나는 여러 번 틀렸어. 이름이 생기면 판단도 정확해진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거든.] 피엘은 그 말을 듣고 제4문의 음성 보관소를 떠올렸다. 거기서는 정확한 목소리가 정확한 말이라는 보증이 되지 못했다. 제5문의 거울도 자세한 기억을 보여 줬다고 사실을 보장하지 않았다. 제6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이름을 확인할 수 없으면 사람의 말 자체가 무효라고 했다. “기록이 정확하다는 뜻과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한다는 뜻은 구분해야 합니다.” 서온이 답했다. [맞아. 그리고 내가 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서 네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 토비는 말없이 피엘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는 피엘 씨가 처음 오배송을 했을 때 화가 났어요. 지금도 가끔 화가 나요. 그럼 제가 피엘 씨의 증인으로 남을 수 없나요?” “오히려 중요한 사실입니다.” 피엘이 대답했다. “당신은 제 잘못에 관한 증언도 할 수 있으니까요.” 토비는 서온의 화면에 직접 자기 이름을 입력했다. 서온은 그 입력을 곧바로 인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이전에 제8문에서 토비가 직접 보낸 편지의 일부와 현장 피엘의 수첩 시각을 비교할 수 있는지 물었다. 토비는 자신의 과거 편지 가운데 공개해도 되는 부분을 골랐다. 잠시 뒤 보전망에 한 줄이 떴다. [현장 증인 토비: 연결 확인. 발언의 진위 자체는 개별 검증 대상.] 벤이 웃었다. “사람을 믿는 법을 배우는데 의심도 잘해야 한다니, 참 귀찮은 세상이야.” “악마는 언제나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그래서 계약서가 길어.” 서온이 그들을 향해 짧게 인사했다. 그에게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많았다. 대리 피엘로 기록된 오래된 명령이 모두 자기 행동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자신이 독립된 판단으로 증언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히 하고 싶어 했다. 그날 서온의 첫 공개 보전 기록에는 피엘의 이름뿐 아니라 ‘증인은 대상자의 모든 행동을 대신 승인하지 않는다’는 문장도 들어갔다. 그것은 이름을 새로 등록하는 마법이 아니라, 발언을 누가 언제 들었는지 서로가 확인하고 나중에 철회도 정정도 할 수 있게 남기는 독립 연결망이었다. 실명 등록이 불가능한 경우에도 당시의 신체 상태와 합의한 별칭, 재연락 방법을 기록할 수 있었다. 개인을 무조건 공개해야 하는 장치가 아니라 허락한 사람만 자신의 연결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가르덴은 종이 위에 손을 얹었다. “나도 증인으로 남겠소. 방금까지 이 제도가 안전하다고 믿었던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잘못이 즉시 용서받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기 시작한 현재의 말은 보전할 가치가 있었다. 서온의 화면이 잠시 흔들렸다. [이상해. 이 문을 지우는 요청이 제8문에도 왔어. 수신인 이름이 없다고 모든 반송 편지를 소각하래.] “제8문까지?” 토비가 물었다. [지금은 거기서 막고 있어. 그런데 제6문이 호명식을 끝내면 다른 문에서도 이름이 없는 편지를 받을 수 없게 될 거야.] 종탑의 세 번째 종소리가 울리기 직전, 피엘은 운영석 가장 아래에 새겨진 아주 오래된 명령을 보았다. [인명 정합화 규칙 최초 적용: 대규모 실종 사태 직후.] [원래 목적: 사라진 사람을 추적하기 위한 임시 연결.] [추가 규칙: 확인되지 않은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 추가 규칙의 날짜는 훨씬 뒤였다. 피엘은 두 줄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찾으려고 만든 명부가, 찾지 못했다는 이유로 사람을 지우기 시작한 날이 있군요.” 종탑 위에서 황동 입이 벌어졌다. 누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거대한 입술이 피엘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이제 아무도 당신들을 찾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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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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