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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93화
PAYLUA ORIGINAL · 제93화

93화. 지워진 사람들의 빨랫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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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과의 뒷문을 나서면 물길이 하나 나온다. 제6문 사람들은 그 물길을 세탁천이라 불렀다. 도시의 종이와 잉크를 씻어 낸 물이 흘러들어 가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은빛으로 보이지만 저녁 무렵에는 연한 푸른색으로 변했다. 빗줄기가 내리면 강 위에 이름 모양 거품이 뜬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다는 피엘 일행을 물길 아래쪽으로 안내했다. “저 사람부터 만나 보게. 장부가 다른 말을 할 때마다 강에서 증거를 건져 올리거든.” 강둑에는 늙은 뱃사공 도림이 젖은 종이들을 빨랫줄에 널고 있었다. 빨랫줄에는 이름 대신 서로 다른 사연이 매달렸다. 어느 아이의 출생일, 어느 배의 구조 신호, 어떤 가게의 밀린 외상값. 도림은 넝마처럼 젖은 종이를 펼칠 때마다 작은 돌멩이로 모서리를 눌렀다. “젖은 건 마르면 다시 읽을 수 있지. 불탄 것은 어렵지만.” 토비가 종이를 훑었다. “왜 이런 게 강에 떠내려옵니까?” “지우는 놈들이 일은 깔끔하게 하지 못하거든.” 도림은 스무 해 전의 홍수 이야기를 꺼냈다. 마을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 둔 구조 명부가 있었다. 강물이 범람한 밤, 그는 어린아이 열한 명과 어른 네 명을 자신의 배로 옮겼다. 구조 당시 이름을 모른 사람도 많아 옷의 색이나 손에 쥔 물건으로 서로를 확인했다. 구조 후에 이름을 찾아 적었다. “그런데 지난주 장부에는 내가 빈 배로 강을 건넜다고 나와.” 그가 내민 공식 인증서는 구조 실적이 ‘0명’으로 수정됐다고 기록했다. 이유는 인명 장부에서 해당 사람들의 이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림은 조금 화가 나 보였지만 자신이 영웅으로 불리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날 내가 태운 아이들이 이제 어른이야. 자기들이 살아 있었다는 걸 입증하려면 내 옛 배 사진을 찾아다녀야 한다지.” 세아는 종이 위에 남아 있는 작은 신발 그림을 보았다. 한 아이가 구조 당시 빨간 구두를 벗어 배 바닥에 두었다는 기록이었다. “이름 없이도 누군지는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세아가 말했다. “일부는 그럴 수 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다만 이름 대신 신발색으로 신분을 영구히 결정하는 건 위험합니다. 사람을 찾는 단서와 사람을 규정하는 표지는 달라야 하니까요.” 도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노인은 제6문의 모든 이론보다 쉽게 그 말을 이해하는 듯했다. 도림은 강가의 작은 창고에서 나무 상자를 꺼냈다. 상자 밑에는 물에 젖었다 마른 흔적이 남아 있었고, 그 안에는 동그란 유리구슬 열다섯 개가 들어 있었다. “그날 아이들이 배에서 내린 뒤 하나씩 주고 간 거야. 어떤 애는 자기 구슬을 주고, 어떤 애는 구슬이 없어서 강가에서 돌을 주워 왔지.” 토비는 상자 안을 들여다봤다. 구슬마다 흠집이 달랐다. 이름을 대신할 만한 표식은 아니었지만, 그날 배 안에서 구슬을 만지고 놀던 아이들의 시간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도림은 가장 작은 구슬을 손바닥에 올렸다. “어떤 애가 울지 않으려고 이걸 꽉 잡고 있었어. 무섭다는 말을 할 줄 모르는 나이였지. 난 그날 그 아이 이름을 몰랐어. 그래서 '작은 손님'이라고 불렀지.” 세아가 물었다. “나중엔 만났나요?” “한 번. 열다섯 해 뒤에 장터에서 우연히. 나를 알아본 건 그 아이였어. 자기 이름을 알려 주더라고.” 도림은 이름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금 어디서 살고 있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당사자의 부탁 때문이었다. 자신이 구조되던 날의 기억을 세상에 공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럼 그분이 나중에 원하면 증언할 수 있게 연락 방법만 보관하면 되겠네요.” 피엘이 말했다. “그렇지. 나는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말할 자격까지 얻은 건 아니니까.” 오스벨이 강 건너 오래된 홍수 표지석을 가리켰다. 표지석은 서로 다른 세 시기에 물이 어디까지 차올랐는지 남겨 놓았다. 마법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과 손으로 새긴 눈금이었다. 그 눈금은 이름을 모르는 증인과 이름을 잊은 증인들 사이에서도 같은 높이에 있었다. “그래서 물이 참 고마울 때가 있다네.” 오스벨이 말했다. “정직하다는 뜻은 아니야. 그냥 기록을 속이기 위해 강 전체를 바꾸려면 너무 큰 힘이 드니까.” 벤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말을 하자마자 누가 강물 자체를 조작하려 들면 책임질 거야?” 오스벨은 구슬 하나를 빛에 비춰 보았다. “그러면 강을 믿었다는 사실까지 기록해야지. 그다음 증거를 찾고.” 도림은 나무 상자를 덮었다. 그는 옛 영웅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단지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잃지 않고 오늘 저녁을 맞았으면 했다. 그때 강물에서 하얀 봉투 하나가 떠올랐다. 봉투에는 어딘가에서 본 듯한 표지가 찍혀 있었다. 네 개의 흰 원이었다. 피엘이 물에 손을 뻗자 벤이 급히 막았다. “마계 계약서에 쓰는 무기명 표지랑 닮았어. 맨손으로 건드리면 수취 동의로 처리될 수 있다.” 벤은 금속 집게로 봉투를 건졌다. 봉투 안에는 열여섯 개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에만 글자가 없었다. [홍수 생존자 인명 정리 요청.] [기준 일시: 실제 구조보다 20년 이전.] [처리 목적: 존재하지 않는 구조 이력 정합화.] 오스벨이 눈썹을 찌푸렸다. “사람을 실제로 구한 날보다 앞선 시점에서 이름을 없애라고?” “그러면 애초에 구조받을 사람이 없었다고 만들 수 있겠지.” 벤이 답했다. 도림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사망자 명단에서 아이들을 살리려고 배를 탔던 날을 떠올렸다고 했다. 차가운 물살 속에서 어린아이가 자신의 목을 끌어안았을 때의 무게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걸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어.” “없었던 일이라고 확정하지 않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다만 이 봉투가 왜 생겼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들은 수기 명부와 당시 물높이 기록, 독립된 강 수위 관측 표식을 대조했다. 날짜는 일치했다. 배를 수리한 영수증에도 구조 직후의 손상 내역이 남아 있었다. 토비는 낡은 널빤지 뒤에 박힌 붉은 구두끈 하나를 발견했다. 도림이 아이에게 선물로 받았다며 가져가지 않고 보관한 것이었다. 잠깐의 평온을 깨뜨린 것은 강 건너편에서 들려온 비명이었다. 빨랫줄이 저절로 끊어지고 종이들이 바람에 휩쓸렸다. 모든 종이에 같은 낱말이 찍혔다. [소각 대기.] “누가 저걸 가져갔나!” 도림이 외쳤다. 토비는 성검 대신 노를 집었다. 강가에 놓인 나룻배를 떠밀어 종이들이 모이는 수문으로 향했다. 베어야 할 마물이 없을 때 농부의 힘은 노를 젓는 데 쓸 수 있었다. 세아와 오스벨은 물에 떠 있는 종이가 흩어지지 않도록 바람의 방향을 조금 돌렸다. 벤은 조용히 웃었다. “오늘도 영웅의 무기는 목재군.” “검보다 싸고 잘 뜹니다!” 토비가 대꾸했다. 수문 앞에서 한 소년이 젖은 이름표를 줍고 있었다. ‘내 이름이 정말 이거였나요?’ 소년은 물었다. 도림은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먼저 어디서 그 표를 발견했고, 누구에게 들었는지 물었다. 소년은 강가에서 주웠을 뿐 자기 이름인지는 모른다고 했다. 피엘은 두 문장을 분리해 적었다. 발견된 이름표 하나, 이름을 찾고 싶어 하는 소년 하나. 둘 사이의 연결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수문 관리함을 열자 봉투의 발송 이력이 나왔다. 명령은 종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외부 일치성 센터’라는 시설을 거쳐 제6문으로 들어왔다.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 [본 요청이 완료되면 대상자의 실존을 증명할 자료는 더 이상 필요 없음.] 도림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름을 지우는 놈들은 사람이 사라지면 종이도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보지.” “아마 그 반대일 겁니다.” 피엘은 네 개의 흰 원을 가리켰다. “종이를 없애면 사람을 지워도 된다고 믿고 있겠죠.” 강 건너 종탑에서 해가 지기도 전에 첫 번째 호명식 예고종이 울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두 번의 종소리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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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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