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문으로 향하는 계단의 마지막 열세 칸에는 발자국이 없었다.
그렇다고 먼지가 쌓인 것도 아니었다. 누가 밟을 때마다 발밑에 희미한 빛이 생겼다가, 발을 떼는 순간 계단은 처음부터 아무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매끈해졌다. 토비는 세 번째 칸에서 뒤돌아보았다.
“방금 저 지나왔잖아요.”
“지나온 건 사실이지.” 벤이 구두 끝으로 계단을 두드렸다. “저놈이 기억하지 않기로 했을 뿐.”
피엘은 자신의 직무명 소급 취소 통지서를 투명한 증거 봉투에 넣었다. 제5문의 기억 조화 실패 뒤에 도착한 통지였다. 수신인도 피엘, 취소 대상도 피엘이었다. 하지만 누가 발송했는지 적힌 칸은 하얗게 비어 있었다.
“발신인 확인을 요청했는데 답변이 없군요.”
“그럼 반송하세요.” 토비가 말했다.
“반송 주소가 없으면 우편함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기들이 만든 문제네요.”
계단 끝에서 도시 하나가 펼쳐졌다. 둥근 분지에 지어진 제6문은 이름을 보관하는 곳답게 수많은 표지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리 이름이 새겨진 놋쇠 판, 문패마다 매달린 꽃바구니, 손님 이름을 부르며 빵을 건네는 가게. 먼 곳에선 거대한 흰색 종탑이 분지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종탑 아래 광장은 사람이 많았지만 이상하게 조용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가리키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광장 동쪽에는 작은 분수와 물을 파는 수레가 있었다. 수레의 주인은 동전을 받을 때마다 손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떤 손님에게는 값을 받고, 어떤 손님에게는 물을 무료로 건넸다. 이유를 묻자 주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이 없는 사람에겐 계산서를 발행할 수 없어요. 아까까지는 그냥 마시고 가라고 했는데, 지금은 무상 제공도 규정 위반이라고 뜹니다.”
그는 수레 밑에 숨겨 둔 작은 물통을 가리켰다. 그 물통은 자기 몫으로 따로 길어 온 것이었다. 그는 목마른 노인에게 한 컵을 건넸다. 전광판에는 즉시 경고가 떴지만 물통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까지 벌금 내면 어쩌죠?” 노인이 물었다.
“목마른 사람에게 물 한 잔 건넨 일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직접 따질 겁니다.”
토비는 광장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일을 하려면 이제 모든 결정에 용기가 필요했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물을 청하면 우물로 데려가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을 주는 것조차 서류에 따라 결정됐다.
“제 고향에서 저랬으면 우물 주인이 쫓겨났을걸요.”
“누가 쫓아냈겠어?” 벤이 물었다.
“마을 사람들이요. 물론 그 전에 왜 저러는지 물어봤겠지만.”
피엘은 수레 주인이 누구에게 물을 주었는지 하나하나 이름을 받아 적지 않았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자기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경고가 표시된 시각과 적용 규정을 보전했다. 그런 세심함이 사건의 진행을 느리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고치려는 조사인지 잊지 않기 위해 필요한 느림이었다.
분수 곁의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말했다. “아침에는 집 앞의 화분에 제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엄마가 제가 심은 게 아니라고 하세요. 엄마가 거짓말을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냥, 이름표가 바뀌었어요.”
피엘은 소년에게 그 일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물었다. 소년은 ‘빵집에서 따뜻한 빵 냄새가 나기 직전’이라고 대답했다. 정식 시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의 증언과 맞춰 볼 수 있는 단서였다.
분수 위에 걸린 현수막은 바람도 없는데 펄럭였다.
‘이름을 정리하면 모두가 같은 도시의 주민이 됩니다.’
누군가 현수막 아래에 조그만 글씨를 남겨 두었다. ‘이미 주민이었던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
문 앞 관리인이 피엘에게 얇은 등록판을 내밀었다.
[방문자 성명 확인.]
[피엘: 조회 결과 없음.]
[입장 불가.]
“제 이름을 방금 적었는데요.”
관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보이는 글씨는 이름이 아닙니다. 제6문에 등록되어야 이름이 됩니다.”
“그럼 이분은요?” 토비가 옆에서 손을 들었다. “제 눈에는 분명히 보이는데.”
“생물학적 존재 여부와 법적 성명 여부는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이 먼저고 장부가 나중 아닙니까?”
관리인은 같은 답을 세 번 되풀이했다. 옆에서 서 있던 벤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마계에선 계약서가 없어도 돈을 빌린 사람을 기억하거든. 여기선 이름표가 없으면 빚도 없어지겠네.”
“부채는 예외입니다.” 관리인이 즉시 답했다. “명의가 소실되어도 채무는 유지됩니다.”
“아, 역시 관청이군.”
피엘은 웃지 못했다. 광장의 계단 아래에서 어린 소녀가 울고 있었다.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종이 봉투에 약병을 넣어 가지고 있었다. 약국 창문 너머로 할머니가 손을 흔들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할머니 이름이 없어졌어요.” 아이가 말했다. “약은 준비돼 있는데 받을 사람이 없대요.”
소녀가 내민 봉투에는 ‘모아’라고 적힌 글씨가 있었다. 아이 이름인지 할머니 이름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피엘이 무릎을 굽혀 물었다.
“누가 지금 약을 필요로 하십니까?”
“우리 할머니요. 아침부터 숨이 가빠요.”
“어디에 계십니까?”
아이는 언덕 위 노란 집을 가리켰다. 약국에서 멀지 않았다. 피엘은 약사에게 긴급한 건강 위험을 설명하고 의약품 확인 절차를 물었다. 약사는 수신인의 등록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인도 버튼이 비활성화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의사가 현재 환자를 진찰한 기록으로 처리할 수는 없습니까?”
“이름 없는 사람에겐 진료 기록 번호도 나오지 않습니다.”
순간 토비가 성검을 뽑았다. 벤이 손목을 붙잡았다.
“칼로 약국 자동문을 베는 용사는 역사에 남아. 좋은 뜻은 아닐 거다.”
토비는 이를 갈며 검을 넣었다. 피엘은 소녀의 동의를 얻어 지금 상황을 적고, 지역 진료소의 현장 담당자에게 직접 연락했다. 이름을 요구하지 않는 응급 평가가 가능한지 물었다. 현장 의사인 녹색 외투의 여성 하나가 달려와 아이와 함께 노란 집으로 올라갔다.
“환자는 살아 있습니다.” 의사가 말했다. “숨을 쉬기 힘들어합니다. 지금 필요한 치료를 시작하겠습니다.”
제6문의 장부는 환자를 찾지 못했지만 의사의 손은 환자의 맥박을 찾았다. 치료를 위한 약품은 진료소가 긴급 절차로 별도 기록을 남겨 인계했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등록 이름이 없으면 다음 주에도 다시 같은 문 앞에 서야 했다.
할머니는 겨우 숨을 고르고 손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난 예전엔 여기 이름이 있었단다.”
“누가 지웠어요?” 피엘이 물었다.
“그게 이상한 일이지.” 할머니가 말했다. “아무도 지우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내가 원래 이름을 가진 적 없다고.”
피엘은 방 안에서 손으로 쓴 가족 편지와 낡은 화분 이름표를 보았다. 할머니의 이름은 라온. 그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도시가 사용하는 공식 장부에서만 지워진 것이었다.
지하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라온의 손등 위에 가느다란 은색 선이 나타났다.
[식별 대상 재분류.]
[신규 상태: 이름 없는 수신인.]
[해당 개체에 대한 기존 이의 신청: 효력 없음.]
피엘의 수첩에서도 한 줄이 흐려졌다. 그것은 조금 전 적은 ‘피엘이 접수했다’는 문장이었다. 그는 급히 별도의 종이에 같은 사실을 다시 적었다. 토비가 옆에서 자신의 서명을, 벤은 마계식 증인 표식을 남겼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겁니까?” 의사가 물었다.
“공식 장부가 지워도 남는 증언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겁니다.”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럼 내 이름도 써 주세요. 내가 부르는 내 이름은 라온이라고.”
피엘은 적었다. 그 문장이 그녀의 과거 모든 기록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자신을 라온이라 부른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밖으로 나오자 소녀가 벽에 붙은 새로운 안내문을 발견했다.
[오늘부터 이름을 확정할 수 없는 주민은 일괄 재명명 대상입니다.]
[기한: 해질녘.]
[동의 방식: 거부 이력 없음.]
토비가 해를 올려다봤다. 아직 한낮이었다.
“왜 남의 이름을 바꿀 때마다 시간 제한이 붙는 거죠?”
피엘은 빈 발신인 칸을 가리켰다.
“시간보다 먼저 이 일을 결정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때 광장 종탑의 시계가 네 칸 앞으로 뛰었다. 해가 진 것도 아닌데 안내판에는 ‘기한 경과’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제91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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