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문의 밤하늘에는 별 대신 수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오래된 풍경이었다. 눈 쌓인 부엌, 바다에서 돌아온 배, 아이가 처음으로 달린 운동장. 시간이 흐르자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기 시작했다. 슬퍼하던 사람은 미소를 지었고, 다투던 사람은 서로 포옹했다. 사진 아래에는 하나의 문장이 반복됐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 결말을 원했습니다.’
거리의 행인들 가운데 일부가 걸음을 멈췄다. 한 노인은 자신이 한 적 없는 화해의 말을 입술로 따라 했다. 다른 이들은 거울에 비친 기억이 이상하다고 항의했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쥐고 주저앉았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장면이 작동한 것은 아니었다.
피엘은 먼저 사람들을 거리에서 대피시키려는 관리 직원에게 확인했다. 제5문에 실제 신체적 위험이 발생했는가. 시설 붕괴나 화재는 없는가. 그런 위험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불안 때문에 넘어지거나 방향을 잃는 주민들이 있었다. 일행은 가까운 병동의 도움을 받아 조용한 쉼터를 마련했다.
에른은 쉼터 입구에 종이를 붙였다.
‘여기서는 당신의 기억을 맞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 문장이 보이자 사람들이 조금씩 들어왔다. 그중에는 행사 자체를 기대했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왜 축제가 중단돼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당황했다. 수린은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기억 보관과 상담은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
에른은 쉼터에서 자원한 주민 몇 사람과 조용히 대화했다. 어떤 이는 방금 거울에서 보았던 장면이 진짜 기억인지 헷갈린다고 했다. 에른은 그 장면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을 무턱대고 되풀이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직접 본 것과 예전부터 알고 있던 것을 따로 써 보자고 제안했다.
이렐은 자신이 분명 슬퍼한다고 말했는데 거울 속 자신은 크게 웃으며 모든 것이 잘됐다고 선언했다고 했다. 에른은 그 말을 두 줄로 나누어 기록했다. 현재 이렐이 느끼는 슬픔, 방금 장치가 만든 영상. 이렐은 잠시 뒤 작은 물컵을 받아 들었다.
“누가 내게 행복하다고 강요하지만 않으면 저는 오늘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어요.”
에른은 그 말을 치료 완료로 기록하지 않았다. 차를 마신 사실로 적었다.
은재는 쉼터의 문 앞에서 길을 잃은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거울이 보여 준 미래의 자기 모습을 진짜 과거라고 주장하며 겁에 질려 있었다. 은재는 자신의 보관 열쇠를 꼭 쥐고 아이와 함께 앉았다. 아이가 왜 무서운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저도 모르겠는 일이 있어요.” 은재가 말했다. “그렇다고 누가 제게 다 안다고 말해 줄 필요는 없어요.”
아이는 한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에른은 아이의 보호자를 확인한 뒤에만 상담실로 안내했다. 급하다고 해서 보호자의 동의 절차를 모두 지우지 않는 일도 그날 지켜야 할 원칙이었다.
한편 발송탑으로 가는 계단은 검은 유리벽으로 막혀 있었다. 벽에는 ‘접근하려는 사람은 이미 접근하지 않기로 동의함’이라는 문구가 빛났다. 제3문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논리였다.
“계단이 우리를 막는 근거가 과거의 동의라면, 그 동의를 보여 달라고 합시다.” 피엘이 말했다.
벽은 답하지 않았다. 피엘은 독립 감사 요청 번호와 현행 접근 허가서를 꺼냈다. 수린도 자신의 기계식 관리 권한을 제시했다. 두 개의 권한이 일치하자 유리벽의 한쪽이 갈라졌다.
“허가서를 갖고 오는 사람이 있다는 걸 예상 못 했나 보네.” 벤이 말했다.
“안 물어볼 거라고 예상한 거겠죠.” 토비가 답했다.
발송탑 안에는 세 개의 회로가 거대한 강처럼 흐르고 있었다. 붉은 회로의 빛은 너무 강해서 옆의 파란 회로까지 물들였다. 실제 기억 상담을 유지하는 파란 회로, 긴급 보호를 담당하는 검은 회로, 공통 조화 장면을 발송하는 붉은 회로. 원래 서로 다른 목적의 흐름이었다.
수린은 앞서 여섯 차례 시험해 성공했던 분리 절차를 펼쳤다. 그러나 실물 장치는 시험 때와 달랐다. 연결관 세 개에 작은 쇠줄이 하나 더 감겨 있었다.
“이건 없던 겁니다.”
오스벨이 쇠줄을 살폈다. “마법적인 연결은 아니네. 일부러 덧댄 물리적 고정 장치야.”
“자르겠습니다.” 토비가 성검을 들었다.
수린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쇠줄만입니다. 파란 회로와 검은 회로는 건드리지 마세요.”
토비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그가 전설의 성검을 얻었을 때 세상을 구하는 일은 마왕을 두 쪽 내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낡은 철사를 정확하게 하나 자르는 것이었다.
“정말 이게 용사의 일이에요?”
“사람을 구하는 데 필요하다면.” 피엘이 답했다.
토비는 검을 내렸다. 철사가 끊어지고 붉은 회로의 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았다. 안쪽에서 다른 승인 기록이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장 아르델이 뒤늦게 탑에 올라왔다. 그는 주민들의 상태를 보고서야 무엇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알았다고 했다. 스스로 원장 권한을 사용해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화면은 ‘과거 원장의 동의 기억과 충돌’이라고 표시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내 기억이 내 말을 막고 있군요.” 아르델이 말했다.
“지금 직접 하신 말은 기록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과거에 무엇을 기억한다고 등록돼 있는지와 별개로요.”
하린의 독립 통신이 도착했다. 이시아의 집행 중단 신청도 확인됐으며, 제5문 공통 송출에 대한 잠정 중지 명령이 발효됐다고 했다. 수린의 현장 분리 권한과 원장의 현재 중지 의사가 함께 기록되었다.
마지막 레버 앞에서 토비가 물었다. “이제 내리면 되죠?”
“안전망 점검부터.” 수린이 말했다.
검은 회로는 정상, 파란 회로도 정상. 병동의 상담사 세 명이 각기 다른 기록석에서 작동 상태를 확인했다. 외부에서 제4문 무명도 독립 음성망을 이용해 현장 시각을 중계했다. 그는 다른 사람 목소리를 쓰지 않고 자신이 만든 낮은 음색으로 말했다.
[제5문 외부 보전 기록석, 준비됐습니다.]
그 순간 탑 안의 거울들이 피엘을 비췄다. 거울 속 피엘은 서류에 서명하며 말했다.
“내가 모든 자동 발송을 허락했다.”
실제 피엘은 레버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장면을 자신이 언젠가 기억하게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결정을 놓치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의 제 결정은 다릅니다.”
피엘은 하린의 명령과 수린의 현장 확인을 다시 읽었다. 토비에게 신호를 보냈다. 토비는 성검을 칼집에 넣고 두 손으로 레버를 잡았다. 수린과 아르델이 각각 안전 잠금을 풀었다.
레버가 내려갔다.
붉은 회로의 빛이 꺼지고, 파란 회로와 검은 회로의 흐름은 그대로 이어졌다. 하늘을 덮었던 사진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탑의 바깥쪽에서는 이렐이 사람들과 함께 종을 치고 있었다. 공통 방송을 듣지 않아도 되는 안전 구역을 알리는 종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슬펐지만 힘을 내어 걸었다. 은재도 병동 입구의 표지를 들고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지난 일을 이야기하도록 설득하지 않고, 지금 무엇이 필요한지만 물어보았다.
거리 끝의 아이는 어제의 자기보다 열 살 많은 모습이 거울에서 사라지는 걸 보았다. 아이는 가슴이 두근거려서 어머니 손을 꽉 쥐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그 장면이 무조건 거짓이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다만 오늘 함께 시장에 나왔고,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거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그때야 아이는 발끝을 내려다봤다. 신발에 묻은 진흙은 오늘 아침 밟은 웅덩이에서 온 것이었다. 아이는 어머니에게 아침에 먹은 따뜻한 빵 냄새를 이야기했다. 지금의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것들이 조금씩 돌아왔다.
같은 시각 수린의 시험 기록석에는 붉은 회로 차단 전후의 상태가 차례로 쌓였다. 누군가 나중에 이 결정을 문제 삼더라도, 어떤 회로를 보호했고 어떤 회로를 끊었는지 검증할 수 있도록 모두 남겨 두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의 모든 기억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불안했고, 누군가는 멍했고, 누군가는 그냥 별이 다시 보여서 기뻤다.
“끝났나요?” 토비가 물었다.
“공통 송출은 멈췄습니다.” 수린이 답했다. “그러나 이미 받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이 남았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아르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신이 보호하려던 사람들에게 다시 두려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보였다. 피엘은 그에게 잘못을 덮어 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실제 변경 이력과 원장의 승인 범위를 조사받을 수 있게 기록을 보전하자고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델이 말했다.
탑이 조용해졌을 때 거울 한 장만 남아 빛났다. 거울 속에는 세계의 오래된 기억도, 피엘의 얼굴도 없었다. 그저 발송 요청 한 장이 떠 있었다.
[기억 조화 실패. 보완 경로 실행.]
[대상: 기억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름.]
[차기 담당: 제6문.]
세아가 종이를 읽고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사람의 이름을 바꾸겠다는 건가요?”
유리 속 하얀 원 네 개가 아무 말 없이 회전했다.
제8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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