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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88화
PAYLUA ORIGINAL · 제88화

88화. 내가 처음 배달한 날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491자

오프라인 책장
피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우편함의 냄새였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천계의 운송국 복도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주 어릴 때’라는 표현이 얼마나 부정확한지도 알고 있었다. 천사들이 시간을 세는 방식은 사람과 달랐고, 그의 직무 기록은 몇 차례나 부서가 바뀌면서 정리됐다. 어느 날부터 그는 자신의 첫 배달을 기억한다고 말해 왔다. 회색 봉투 하나를 별문제 없이 전달한 날이라고. 그런데 제5문의 원본실에는 다른 기록이 있었다. [직무명: 피엘.] [기록명: 최초 배송 경위.] [상태: 보관 중.] [접근 방식: 당사자의 별도 선택 필요.] 기억 조화 행사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리는 동안 피엘은 문 앞에 섰다. 그가 기억을 열겠다고 결정하면 자신이 오랫동안 믿어 온 이야기가 바뀔 수도 있었다. 반대로 아무것도 열지 않고 떠나면 중요한 책임 기록을 놓칠 수도 있었다. “지금 꼭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에른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 서 계시죠?” “제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업무상 이유뿐 아니라, 제 자신도 알고 싶습니다.” 피엘은 보관 조건을 다시 읽었다. 원본에는 타인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그들의 동의 없이 개인 정보를 모두 열어서는 안 됐다. 수린과 하린이 독립 기록 보관을 위해 합의한 방법은 사건의 구조와 발송 이력만 먼저 보여 주는 것이었다. 피엘 개인의 감각에 해당하는 부분은 본인이 선택하면 열 수 있게 남겨 두었다. “우선 구조 기록을 확인하겠습니다.” 에른은 그 결정을 확인하고 외부 기록석을 열었다. 희미한 회색 영상이 떠올랐다. 화면은 아름답지 않았다. 서류를 든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창고였다. 어딘가에서 봉투가 쏟아졌고, 어린 피엘과 똑같이 생긴 직원이 바닥을 기어다니며 봉투를 줍고 있었다. “제가 저렇게 작았습니까?” 오스벨이 지팡이를 들이댔다. “기록에 남은 외형일 수도 있고 당시의 업무용 형상일 수도 있겠지. 지금 단계에서는 단정하지 말게.” 영상 속 직원은 우편함 하나에서 봉투를 꺼냈다. 수신인란에는 아무 이름도 없었다. 내용에는 짤막하게 적혀 있었다. ‘위험한 사람이 발견되면 먼저 구하라. 그 뒤에 무엇을 원했는지 물어라.’ 토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신탁이라기보단 구조 지침 같네요.” “그렇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화면의 직원은 그 봉투를 긴급 구조대에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발신인 이름이 없어서 반송됐다. 다시 발송하려는 순간 부서의 자동 대리 장치가 나타났다. 봉투가 지연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 임시로 승인란을 채우겠다는 안내였다. [미등록 발신인 긴급 보완.] [임시 승인 표지: 0000.] [승인 효력: 구조 대상 확인 시까지.]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 표지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기록석에 ‘임시 발송됨. 구호 종료 후 회수 요망’이라고 써 놓았다. 그 직원의 손글씨는 피엘의 수첩 첫 장과 닮았다. “그건 제 글씨네요.” 영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장면에는 수십 년 뒤의 창고가 나타났다. 자동 대리 장치는 이미 수많은 부서의 빈칸을 대신 채우고 있었다. 위험을 구하는 일뿐 아니라 미래를 선택하고, 거절을 접수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일까지. 피엘의 닮은 직원은 그 장면을 보고 지시서를 제출했다. ‘임시 조치의 효력이 확대되고 있음. 원래 발신인을 다시 확인할 것.’ 지시서는 ‘처리 완료’라고 찍혀 되돌아왔다. 하지만 확인한 사람의 이름은 없었다. 다음 화면에서는 직원이 제5문의 보관실로 들어갔다.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실제 발화는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 손에 든 신청서에 ‘사건 관련 개인 회상은 조사 종료까지 잠정 분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서명란에는 피엘이라는 직무 이름이 있었다. “자발적인 신청이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에른은 기록을 자세히 살폈다. “신청서를 직접 들고 온 모습은 보입니다. 그러나 그 문서를 누가 작성했으며 당시 충분히 설명받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아요.” “그럼 그 부분도 미확인으로 남겨 둡시다.” 피엘은 자신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완전히 거짓이었다고 결론 내리지 않았다. 영상이 보여 준 것은 한때 임시 표지가 붙었고, 그를 닮은 직원이 이를 문제 삼았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얼마나 많은 직무 담당자가 피엘이라는 이름을 공유했는지, 현재의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더 조사해야 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0000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부터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설계된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급히 구하려고 빈 승인란에 넣은 표지가 어느새 승인 자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럼 최초 발신인은 여전히 없나요?” 토비가 물었다.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누군가가 처음 구하라는 말을 했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의 합의였을 수도 있습니다. 서류만으로는 모릅니다.” 서온에게도 잠깐 영상의 일부를 보냈다. 당사자들의 개인 감각은 제외하고, 직무 표지가 언제 발급되고 언제 효력이 확장됐는지를 나타내는 도식뿐이었다. 서온은 기록석을 한참 들여다본 뒤 답했다. [이건 내 기록과도 겹쳐. 대리 피엘이라는 직무가 생긴 때보다 0000의 첫 발급이 앞서 있어.] “그러면 당신은 그 장치와 별개로 만들어졌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다만 내 이름으로 남은 낡은 문서들이 정말 내 행동인지도 아직 확인 중이야. 네가 내게 그걸 구별하라고 가르쳤잖아.] “그랬습니다.” 서온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에게는 자신의 출발이 타인의 실수에 불과했다고 여겨지는 일이 두려울 수 있었다. 피엘은 서온에게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된 일이 아니더라도 현재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는지가 의미 있다는 말을 하려다 멈췄다. 위로할 생각으로 남의 정체성을 대신 정의할 수는 없었다. [난 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아보고 싶어. 하지만 오늘 네 조사와 뒤섞이고 싶지는 않아.] “그럼 별도 조사로 남기겠습니다.” 서온은 짧게 고맙다고 답했다. 그가 자기 이름으로 내놓은 지금의 의사는 더 오래된 장치의 이력과 함께 뭉개져서는 안 됐다. 벤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름을 견디지 못하고 없는 이름을 만들어 냈겠지.” 그때 화면 구석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기록 번호가 나타났다. 제5문이 과거에 보관한 장면이 아니라 최근 누군가 작성한 ‘기억 보정 요청’이었다. [대상: 피엘.] [주입할 최초 기억: 그는 자발적으로 모든 자동 발송을 승인했다.] [목적: 기존 임시 표지의 영구 권한 입증.] [실행 시각: 기억 조화의 밤.] 토비가 주먹을 쥐었다. “피엘 씨가 그날 먼저 그런 말을 했다고 믿게 하려는 거군요.” 피엘은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과거를 완전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누가 과거를 확정하려는지 보여 주는 현재의 시도가 있었다. “이 요청서를 증거로 보전하겠습니다.” 그는 열지 않았던 개인 감각 봉인을 그대로 남겨 두었다. 자신의 과거를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알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할 시간이 필요했다. 창밖의 종이 세 번 울렸다. 수린의 비상 연락이 도착했다. [기억 조화의 밤 발송 시작. 제5문 거울망 전역 가동.] [수동 분리 장치 진입 경로 차단됨.] 피엘은 수첩을 닫았다. “제 기억보다 먼저 보호해야 할 현재의 선택들이 있습니다.” 토비가 성검을 들었다가 잠시 내려놓았다. “이번엔 정말 베어도 되는 게 있으면 알려 주세요.” 벤이 답했다. “걱정 마. 종이 장부를 칼로 베면 수리가 더 어렵다는 건 나도 알아.” 피엘은 기억을 보관한 자신을 떠올리려고 애썼다가 생각을 멈췄다. 애쓰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이 실제 기억인지 방금 본 영상의 잔상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지금은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보다 어떤 기록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했다. “무섭습니까?” 세아가 물었다. “조금은요.” 피엘이 대답했다. “그곳에 적힌 피엘이 제가 아닐 수도 있고, 저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결정되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책임을 져야 할 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 대신 한 일을 제 이름으로 떠맡을 순 없죠. 반대로 제가 직접 한 일이라면 없었던 것처럼 넘길 수도 없습니다.” 토비는 피엘의 수첩을 봤다. 늘 정확한 줄을 긋고 숫자를 맞추던 작은 책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피엘은 그 수첩으로 농부의 인생을 정리하려 했다. 지금은 같은 수첩으로 확인되지 않은 줄마다 조심스럽게 물음표를 적었다. “어느 쪽이든 저는 지금 피엘 씨랑 같이 가고 싶어요.” 토비가 말했다. “그게 제 과거의 모든 일을 용서한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아니죠. 그냥 같이 가겠다는 뜻이죠.” 피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수첩 뒤에 작은 문장을 적었다. '토비는 동행을 선택했다. 다른 모든 판단은 보류.' 벤은 그 문장을 보며 크게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딱딱한 우정 고백이다.” “그럼 악마식으로 다시 쓰시겠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사양하지. 내 계약서는 너무 복잡하거든.” 그들은 원본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피엘은 화면 속 자신이 남긴 한 문장을 보았다. ‘임시란, 다시 물어보기 전까지만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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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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