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재는 자기 열쇠를 되찾아 줄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돌려 달라고 부탁한 적 없어요.”
제5문 원본실의 작은 상담실이었다. 에른은 은재 앞에 기억 봉인 해제 절차와 보관 유지 절차를 함께 놓아 주었다. 전자에는 ‘당신의 기억을 되돌릴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후자에는 ‘현재 보관 조건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에른은 어느 쪽도 더 좋은 선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건이 거짓이라고 바뀐 보고서는 바로잡아 주세요.” 은재가 말했다. “하지만 제 머릿속에 그날을 다시 넣는 건 제가 고르겠습니다.”
수린이 질문했다. “원본 봉인의 상태만 검사하도록 허락하시겠습니까? 내용을 열지 않고도 외부 변경 여부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괜찮아요.”
피엘은 은재의 동의를 따로 기록했다. 봉인 상태 검사는 허용, 내용 열람은 불허, 외부 사고 기록 검증은 허용. 세 문장은 길어 보였지만 하나로 줄이면 안 되는 뜻이었다.
창밖에서는 기억 조화의 밤 준비가 한창이었다. 종이 꽃을 만드는 아이들이 거리를 뛰어다녔고, 장사꾼들은 이번 행사가 끝나면 가족 간 다툼이 줄어들 것이라며 작은 기념품을 팔았다. 누구도 거리의 모든 사람이 거짓된 기억을 받고 싶어서 축제를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음악과 불꽃을 기대했다.
“행사가 시작되면 원래 보관을 선택한 사람에게도 강제로 뭔가 들어오나요?” 토비가 물었다.
수린은 도면을 펼쳤다. “기억 보관 계통과 공통 회상 송출 계통이 분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는 중간에 자동 연동 장치가 있어요.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상태를 발견하면 조화된 장면으로 빈칸을 채우도록 설정돼 있습니다.”
은재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빈칸을 남겨 놓기로 결정했는데요.”
“그게 핵심입니다.” 에른이 말했다. “모든 빈칸이 고장 난 것은 아니에요.”
병동 책임자는 출입 기록을 확인하며 방문객들에게 한 가지 원칙을 설명했다. 상담 중인 사람을 만날 때는 먼저 환자의 현재 의사를 확인해야 했다. 어제 공개에 동의했더라도 오늘 원하지 않는다면 대화를 멈춰야 했다. 반대로 예전에는 거절했더라도 오늘 이야기하고 싶다면 그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그런 규칙을 바꾼 이유가 있나요?” 토비가 물었다.
“처음부터 있어야 했던 규칙이었습니다.” 책임자가 답했다. “다만 바쁜 날에는 오래된 동의서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했죠. 그러면 그날의 환자를 보지 않고 종이만 보게 됩니다.”
복도 한편에는 기억을 보관 중인 사람들이 서로 편지를 쓰는 작은 책상이 있었다.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다. 누군가는 무늬를 그렸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채 연필을 굴렸다. 벤이 그 광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마계에서는 빈 계약서를 들고 있으면 반드시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놈이라고 생각하는데.”
“여긴 그냥 생각하는 자리예요.” 세아가 말했다.
토비는 빈 종이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는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손부터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는 병동 직원에게 책상 하나가 흔들린다는 말을 듣고 그 다리만 고쳐 주었다. 내용이 없는 종이는 그대로 두었다.
일행은 병동을 둘러보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기억을 정리하기로 한 사람들이 전문 상담사와 함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첫 병실의 노인은 죽은 아내와 마지막으로 다툰 일을 잠시 맡기고 손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다. 두 번째 방에서는 한 소녀가 무서운 꿈을 떠올릴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일정 시간에만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곳을 둘러본 토비는 조용해졌다. 정원의 거짓 기억 나무가 떠올랐다. 그 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의 환자들에게는 어떤 기억을 잠시 멀리 두는 기술이 필요했다.
“나쁜 장치가 섞여 있다고 여길 다 닫으면 안 되겠네요.”
“맞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우리는 누가 어떤 범위를 허락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승인되지 않은 공통 발송만 멈추고요.”
병실 복도 끝에서 한 노파가 그들을 불렀다. 그는 도자기 그릇을 만드는 장인 이렐이었다. 이렐은 사고 때문에 손이 흔들리기 시작한 뒤 일주일에 한 번씩 도움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요 며칠 상담사가 자신의 슬픔을 이야기하려 하면 기록판이 자동으로 ‘회복 완료’라고 찍힌다고 했다.
“저는 아직 슬퍼요.” 이렐이 말했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 사람을 사랑했으니까요.”
토비가 물었다. “그 사람이라면 누구요?”
이렐은 웃었다. “지금은 굳이 말하지 않을래요.”
토비가 고개를 숙였다. “네. 안 물을게요.”
그 한마디가 이렐을 웃게 했다. 자신의 일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대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반가운 듯했다.
피엘은 담당 직원에게서 상담 전산 기록의 상태 코드만 받았다. 상담사들은 고통의 유무와 회복 완료 여부가 다른 질문이라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직원들의 서명과 실제 치료 일정은 정상이었다. 변경된 것은 외부 통계로 전달되는 상태 표시였다.
“이런 통계만 모이면, 내년에는 병동 예산이 줄어들겠군요.” 에른이 말했다.
“회복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세아가 놀랐다.
“맞아요. 괜찮다고 기록되면 도움을 줄 필요가 없어진 것으로 판단하니까.”
수린은 대기실에 놓인 세 장의 종이를 가리켰다. 서로 똑같아 보이는 신청서였지만 하나는 기억의 내용 열람 동의, 하나는 봉인 상태 검사 동의, 마지막 하나는 외부 사건 기록 제공 동의였다. 직원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한 장에 세 가지 서명을 받으려 한 적이 있었다.
“이걸 나누면 업무가 늘어나겠죠.” 에른이 말했다.
“늘어납니다.” 수린이 답했다. “그런데 줄여 놓았던 동안 일이 정말 줄었을까요? 항의가 들어와도 왜 그런지 확인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토비는 서류의 가장자리를 한참 살폈다. 그의 손으로 쓰는 편지는 보통 두세 줄이면 끝났다.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일이라면 이렇게 여러 장으로 나눠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농부들에게 씨앗값과 밭 사용료와 수확물 배분을 한 문장으로 퉁쳐서 약속했다가 이웃과 크게 다툰 일을 떠올렸다.
“종이를 많이 쓴다고 다 쓸데없는 건 아니군요.”
벤이 윙크했다. “드디어 계약서의 위대함을 알아봤어.”
“당신들 계약서는 너무 작은 글씨가 많잖아요.”
“그건 인정한다.”
그때 하린이 독립 연락으로 들어왔다. 제5문 공통 송출에 대한 임시 중지 권고가 내려졌으나, 원장의 집행 권한과 자동 계정의 예약 기능이 충돌하고 있었다. 강제 발송을 막을 명시적 절차를 마련하려면 실제 사용처 목록과 피해 가능성을 더 제출해야 했다.
수린은 밤새 작업한 도면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세 개의 회로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 회로는 기억 조화의 밤 행사, 파란 회로는 자발적 보관 및 상담, 검은 회로는 긴급 보호용 기억 안정 기능이었다. 붉은 회로만 격리하는 기계식 장치가 존재했지만, 수십 년 동안 시험되지 않았다.
“망가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수린이 말했다.
“시험하면 되죠.” 토비가 말했다.
“실제 사람에게 쓸 수 없어요.”
“그럼 빈 인형한테 해 보면 되잖아요.”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다만 원래 회로의 공통점과 차이를 충분히 재현한 시험이어야 해요.”
오스벨이 마법 고리를 펼쳐 모형을 만들었다. 벤은 마계에서 계약 조항을 검증할 때 쓰는 독립 봉인법을 보탰다. 세아는 시연용 인형이 정말 아무 기억도 입력되지 않았는지 다시 확인했다. 토비는 인형의 이름을 ‘꼬꼬 삼십일호’라고 지었다.
“인형인데 왜 닭 이름이에요?” 세아가 물었다.
“기억에 남잖아요.”
시험이 시작되자 붉은 회로에만 황금빛이 흐르는 듯했다. 그러나 세 번쯤 반복하자 파란 회로에서도 희미한 빛이 번졌다. 수린이 도면을 읽었다. 오래전 보조 연결 장치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 레버를 내리면 상담 기능까지 흔들릴 수 있어요.”
토비는 손을 물렸다. “그럼 다시 고쳐서 시험해야죠.”
모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세 번 더 실패한 뒤 여섯 번째에 이르러서야 세 회로가 분리되었다. 서둘러 영웅이 되는 대신 실패를 기록하며 작동 원리를 확인한 결과였다.
시험이 끝난 뒤 은재가 찾아왔다. 그는 잠깐 인형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열쇠를 들어 보였다.
“제 이야기를 전부 기억하고 싶어지는 날이 오면 제가 직접 열게요. 그때까지 이것 좀 지켜 주세요. 대신 제 이름으로 누가 열었다고 적지 말아 주세요.”
피엘은 그 약속을 수첩에 남겼다.
그때 제5문 전역에 행사용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빨랐다.
[기억 조화의 밤, 긴급 시행.]
[사유: 집단 불안 증가.]
[과거 동의 기억 확인 완료.]
수린의 표정이 굳었다.
“시험 성공이 알려지기 전에 발송을 앞당겼어요.”
창밖의 종이 꽃들이 갑자기 흰색으로 변했다. 그 표면에 모두 같은 문장이 나타났다.
‘우리는 처음부터 원했다.’
제8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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