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행연습을 막은 사람은 아르델이 아니었다.
수린이 열람실의 바닥 서랍에서 오래된 기계식 차단 키를 꺼냈다. 키를 돌리자 거울 네 개가 차례로 꺼졌다. 다섯 번째 거울에서는 여전히 따뜻한 빛이 흘렀다. 병동으로 연결된 회복 안내망이었다. 수린은 그 회로의 스위치는 건드리지 않았다.
“열람실 시연 중지. 실제 상담망 유지.”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조치는 독립 감사 요청 번호에 근거합니다.”
아르델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치료가 얼마나 느리고 힘든 일인지 압니까?”
“압니다.” 에른이 대답했다. “그래서 사람에게 묻는 단계를 없애지 않으려는 겁니다.”
원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일행을 좁은 사무실로 안내했다. 아르델의 방에는 상장이나 명예패가 없었다. 대신 낡은 신발 두 켤레가 유리 상자 안에 있었다. 한 켤레는 어른의 것, 다른 하나는 아이의 것이었다.
“오래전 제5문 북쪽에 겨울 병이 돌았습니다.” 아르델이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자신의 집에 돌아가기를 두려워했어요. 누구는 아이를 잃었고, 누구는 가족을 떠나보낸 순간의 냄새조차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이 신발에 눈을 오래 두었다.
“그때 이시아 여신이 임시 조치를 허락했습니다. 기억을 없애는 명령이 아니라, 사람이 잠시 쉬도록 기억을 맡길 곳을 만들라는 지시였습니다. 전 그 덕분에 살아난 사람을 많이 봤어요.”
피엘은 아르델의 사정을 조롱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원장이 설명한 과거 조치의 범위를 확인했다. 누군가가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 시간이 흐르며 다른 목적에 쓰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여신의 최초 지시문을 보전하고 계십니까?”
아르델은 벽면의 빈 액자를 가리켰다.
“원본은 궁정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승인 요약이 있었는데, 최근 감사 체계 통합 때 없어졌지요. 지금은 제 기억과 부서의 공통 기억이 유일한 증거입니다.”
“그것을 유일한 원본으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피엘이 말했다.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당신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토비는 아르델이 한쪽 신발을 만지는 걸 보고 입을 열려다가 멈췄다. 동생 루나가 사라졌을 때 자신도 누군가에게 내일 괜찮아질 거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괜찮아지기 위해 기억에서 루나를 없애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저도 동생이 사라졌을 때 미치도록 잊고 싶었어요.” 토비가 말했다. “근데 누가 제 기억을 대신 정해 줬으면, 나중에 루나가 돌아왔을 때 제가 동생을 알아봤을까요?”
아르델의 손이 멈췄다.
세아는 리네의 편집된 노래를 설명했다. 어머니가 실제로 무엇을 원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묻고 싶다는 질문조차 답변 완료로 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을. 에른은 은재의 일시 보관 신청서가 사건 부인 기록으로 둔갑한 과정을 이야기했다.
원장은 시선을 내렸다. “그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다는 말씀도 기록하겠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그러나 누가 기능을 넓혔고, 당신에게 무엇이 보고됐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아르델은 작은 열쇠를 꺼내 들었다. 원본실과 궁정의 문서 보존실을 잇는 감사 통로의 열쇠였다. 제5문의 치료 기록 자체를 여는 물건은 아니었다. 원장이 봉인한 명령 이력만 열람할 수 있었다.
“당신들이 먼저 보고 판단하세요. 나는 내 기억을 믿고 있었지만, 그 기억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니까.”
원본실까지 가는 길에는 여러 개의 작은 대기실이 있었다. 첫 번째 방은 누군가 방금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쉬는 장소였고, 두 번째 방은 다른 사람의 진술을 들으면서 자신의 기억이 흔들리는 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르델은 과거에 자신이 손수 그런 방을 설계했다고 했다.
“대기실은 원래 이런 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어떤 환자들은 이야기할 준비가 됐다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고 싶어 했어요. 의사들은 치료를 끝내야 한다고 했지만, 한 아이가 그건 문을 잠그는 것과 같다고 말했죠. 그래서 문손잡이를 안쪽에도 달았습니다.”
토비는 방의 문을 살폈다. 정말 안쪽에도 손잡이가 있었다. 그는 아르델이 왜 한때 많은 사람에게 신뢰받았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사실이 지금 원장이 다른 사람의 기억을 강제로 맞추려 했다는 기록을 없애 주진 못했다.
“원장님은 여기선 사람이 나갈 수 있게 하셨네요.” 토비가 말했다. “그런데 축제에서는 왜 나가기 싫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가지 못하게 하셨어요?”
아르델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 손잡이를 쥐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치료가 아니라 결과를 보기 시작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을 보호했는지보다 몇 명이 괜찮다고 답했는지가 중요해졌어요.”
벤이 물었다. “그걸 이제 알았다고 해서 끝나는 건 아니겠죠?”
“알고 있습니다.”
피엘은 아르델이 자책하며 모든 기록을 한꺼번에 지우려 하지 않도록 원본 보전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이 자신의 선택의 흔적까지 없애면, 피해자는 다시 무엇이 잘못됐는지 입증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제5문 원본실 앞에는 의자 하나가 비어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는 이시아 여신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예전 긴급 조치가 이루어졌을 때 여신이 앉아 심사를 했다는 자리였다.
피엘이 열쇠를 넣자 문은 조용히 열렸다. 그 안에는 두 갈래 선이 그어진 서류가 보관되어 있었다. 하나는 ‘자발적 기억 보관 허가’. 다른 하나는 ‘타인의 진술을 원본으로 대체하는 행위 금지’. 두 조항 모두 이시아 여신의 인장으로 승인되어 있었다.
“원래 금지했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벤은 서류의 가장자리를 따라 내려갔다. 원본 위에는 여러 번 수정된 보충 지시서가 덧붙어 있었다. 서명란에는 점점 이름 대신 숫자가 많아졌다. 마지막 수정은 0000의 자동 승인으로 처리되어 있었다.
“여신의 책임이 완전히 없다는 뜻은 아니겠지.” 벤이 말했다. “사후 감독을 했는지, 왜 이런 시스템을 그대로 뒀는지 물어봐야 해.”
“그렇습니다.” 피엘은 서류를 접지 않은 채 답했다. “그러나 적어도 처음부터 모든 기억을 바꾸라고 명령했다는 주장은 원본과 맞지 않습니다.”
빈 의자 앞에서 이시아의 영상 기록이 나타났다. 그것은 실시간 현현이 아니라 오래전 심사 당시의 공적 발언을 보존한 것이었다. 영상 속 여신은 이렇게 말했다.
“어떤 기억도 그 사람의 허락 없이 고쳐 쓰지 말 것. 잊고 싶은 이에게는 쉬는 자리를 마련하되, 다른 사람의 죄가 사라지도록 잊게 하지는 말 것.”
세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길게 내쉬었다. 영상이 모두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래도 그 발언을 당시의 공적 서류와 대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곧 하린에게서 연락이 왔다. 궁정 보존실에 남아 있던 인장 번호와 일치했다. 다만 그 이후의 감독 기록은 여러 군데 비어 있었고, 여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조사 중이라고 했다.
원본실 가장 깊은 곳에는 ‘최초 기억 시범’이라고 적힌 장부가 있었다. 대상자의 이름은 가려져 있었지만, 직무 번호는 읽을 수 있었다.
[직무명: 피엘.]
[사유: 최초 배송 과정 중 기록 충돌.]
[조치: 본인의 기억을 보관한 뒤 복귀.]
[동의서: 미확인.]
피엘은 장부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자신의 기억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삼백 년 전의 이상한 답장과 제1문에서 기억을 우편 요금으로 요구하던 봉투가 떠올랐다. 그는 지금까지 이를 모두 타인의 조작이라 의심했지만, 처음에는 스스로 맡겼을 가능성도 남아 있었다.
“기억을 열어 보실 겁니까?” 에른이 물었다.
피엘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직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어도 동의 기록이 확인되지 않은 봉인을 뜯어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그 기록에 다른 수신자의 정보가 섞여 있을 수 있었다.
“우선 보전하겠습니다. 원본 접근 범위와 당시의 보관 사유를 검증한 뒤에 결정하겠습니다.”
아르델은 실망한 듯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그때 빈 의자 위의 문장이 희미하게 타올랐다. 이시아의 공적 발언 영상이 아니라 지금 막 접수된 통신이었다.
[제5문 원장에게 고함.]
[기억 조화 행사는 승인된 적 없음.]
[집행 중단 신청 접수. 이시아.]
아르델은 고개를 들었다. “여신께서 직접…”
두 번째 줄이 뒤따랐다.
[신청 처리 보류.]
[보류 사유: 여신은 과거에 행사에 동의한 것으로 기억됨.]
의자 아래에 하얀 원 네 개가 찍혔다.
피엘은 이를 악물었다. 기억이 과거의 증거를 덮더니 이제는 현재의 반대 명령까지 막고 있었다.
제8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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