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델 원장을 만나기 위해서는 추억 하나를 기증해야 한다고 했다.
접수 담당자는 그것이 신탁도, 계약도 아닌 ‘공동체를 위한 작은 성의’라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뒤에는 수천 개의 기억병이 쌓여 있었다. 생일에 받은 선물, 처음 말을 배운 날, 누군가와 다투고 화해한 오후. 기증자가 직접 고른 작은 장면들이라고 했다.
“기증하지 않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럼 예약은 취소됩니다.”
“감사 대상 기관에 출입하려면 개인적 기억을 제출해야 한다는 규정의 근거를 알려 주십시오.”
담당자는 한숨을 쉬었다. “모두 이런 식으로 나오시면 원장님을 언제 만나시겠어요?”
“필요하다면 법정의 독립 면담을 요청하겠습니다.”
그들이 돌아서려 할 때 복도 반대편에서 검은 서류 가방을 든 여인이 나타났다. 제5문 회계 감사원 수린이었다. 그녀는 기억 기증 안내판을 보더니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도 그걸 받고 있습니까? 두 번이나 중지 통지가 내려갔는데.”
담당자는 입을 다물었다. 수린은 일행에게 원장 면담 대신 문서 열람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제5문에 관한 감사 요청은 이미 접수되어 있었고, 문제의 자료는 원본을 열지 않고도 대조할 수 있다고 했다.
열람실의 책상에는 세 가지 장부가 놓였다. 첫 번째는 실제 사건에 관한 외부 기록. 두 번째는 사람들이 스스로 제출한 회상 진술. 세 번째는 치료나 편집을 위해 만든 영상 목록이었다.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덮어쓸 수 없도록 설계된 세 개의 장부였다.
“원래 구조는 이랬습니다.” 수린이 말했다. “사고가 났다는 사실과 사고를 기억하는 방식은 같지 않아요. 둘 중 하나를 수정했다고 다른 하나가 변해서는 안 되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거군요.”
“지난달부터 통합 검색을 쓰는 부서에서 세 장부를 같은 화면으로 봅니다. 화면 자체는 편리했어요. 하지만 출력할 때 구분 표지가 사라졌습니다.”
수린은 하얀 종이를 펼쳤다. 거기에는 ‘목재 다리 붕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음’이라는 보고 문구가 있었다. 반면 외부 사고 기록에는 구조대 출동 시각과 현장 구조 보고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누군가 출력본을 원본인 것처럼 유통했다는 뜻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기억 조화 행사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행사 참가자들에게 장부의 일치율이 올라간다고 홍보하는데, 그 일치율은 서로 다른 질문을 억지로 같은 답으로 만드는 수치예요.”
벤이 문서의 숫자를 가리켰다. “98.7퍼센트. 아주 자신만만하더라.”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면 수치는 마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스벨이 말했다.
수린은 세아의 노래 사건을 들은 뒤 시연용 자료를 가져왔다. 오스벨이 모든 조건을 적어 봉인한 상자 안에 서로 다른 세 개의 문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날 비를 보았다.’ ‘나는 그날 비가 왔다고 들었다.’ ‘나는 그날 비가 왔다고 떠올린다.’
수린이 통합 장부를 켜자 세 문장은 한 줄로 합쳐졌다.
‘그날 비가 왔음을 모두 확인했다.’
토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늘이 비를 내렸는지 누구도 확인 안 했잖아요.”
“그렇지.” 수린이 대답했다. “그런데 보세요.”
그녀가 ‘권고 회상’ 기능을 누르자 작은 인형이 같은 문장을 읽었다. 몇 차례 반복하자 인형은 자신이 직접 비를 맞았다고 답했다. 출력 장부에는 ‘독립 목격 증언 확보’라는 표지가 붙었다.
피엘은 그 기능의 사용 이력을 요청했다. 수린이 꺼낸 목록에는 다양한 부서가 있었다. 재난 보고, 치료 효과 평가, 신탁 이행 확인, 분쟁 조정. 마지막 항목은 ‘제0경로 최초 발신 계약 검증’이었다.
“최초 발신 계약서의 빈칸을 회상으로 채웠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수린의 눈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아셨죠?”
피엘은 제1문에서 확인한 내용을 설명했다. 최초 발신 신청서가 없었고, 0000 계정이 빈칸을 승인처럼 사용했다는 사실. 제5문에서는 그 빈칸이 역사적 기억인 것처럼 채워지고 있었다.
“여기에선 오래됐다고 믿는 것이 곧 오래된 사실이 돼요.” 세아가 말했다.
“그리고 오래된 사실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신탁의 정당성도 따라오겠군.” 벤이 말했다.
수린이 장부의 숨겨진 항목을 열었다. 그곳에는 제5문에 관해 아직 확정되지 않은 요청서들이 모여 있었다. 가장 위의 요청은 긴 문장 하나였다.
[세계가 최초의 신탁에 동의했다는 공통 기억을 작성할 것.]
[활용처: 제1문 미등록 발신 권한의 소급 정당화.]
[실행 예정: 기억 조화의 밤.]
피엘은 목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의 조작은 편지를 잘못 보내거나, 대신 답하거나, 목소리를 훔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모두가 편지를 받고 싶어 했다는 과거를 만들려 하고 있었다.
“왜 원장에게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수린에게 물었다.
수린은 서류 가장자리를 손으로 눌렀다.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원장에게 반대 의견을 전한 담당자들의 기억에서 ‘반대했다’는 장면이 사라졌거든요. 그 다음부터는 누구도 자신이 반대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침묵이 길어졌다. 수린은 기억 수정 사실 자체를 확인한 게 아니라 수정된 이력을 발견했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담당자가 실제로 어떻게 느꼈는지는 별도로 들어야 했다.
오스벨은 책상 위에 지팡이를 세웠다. “원장도 누군가를 보호하려 한다고 믿고 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렇게 해서 지킬 수 있는 것은 사람의 평온이 아니라, 평온하다고 기록된 숫자뿐이야.”
수린은 행사 준비 시간을 확인했다. 이틀도 남지 않았다. 제5문의 각 거울에 공통 장면이 배포되면, 원본을 보관해 둔 사람에게도 수많은 다른 이들의 일치된 진술이 닥쳐올 것이다. 그 결과를 되돌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누구도 시험한 적 없었다.
그때 수린이 다른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제5문 감사원에 신입으로 들어온 직원의 메모였다. 직원은 공통 기억 통계가 높은 날일수록 주민 민원이 줄어든다는 보고에 의문을 품었다.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것이 정말 문제가 없기 때문인지, 항의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메모의 마지막 줄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민원이 줄었다는 증거보다, 민원을 낼 창구가 여전히 열려 있는지 확인할 것.'
토비는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장부에는 그 직원이 한 달 뒤 다른 부서로 옮겨졌다고 적혀 있었고, 그 과정의 사유는 ‘업무 조화에 부적합’이었다. 실제로 부당한 인사 조치였는지는 추가 확인이 필요했다.
벤은 한참 메모를 보더니 중얼거렸다. “어쩌면 0000보다 무서운 건 이런 메모를 보고도 그냥 덮어 둔 사람들이겠군.”
수린은 부정하지 않았다. “나도 그때는 숫자만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멈춰서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한테 무엇을 봤는지 충분히 듣지 않았어요.”
세아는 수린을 바라봤다. “지금은 듣고 계시잖아요.”
“늦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요.”
“그래도 지금 듣는 일과 영원히 안 듣는 일은 다르겠죠.”
수린은 직원의 메모를 복사해 보전했다. 지금 그 직원이 어디에서 근무하는지 확인하고, 원한다면 면담할 수 있도록 요청서를 남겼다. 누구나 자신이 들은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눌 의무는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피엘은 독립 감사관 하린에게 긴급 보전 신청을 전송했다. 그러나 모든 거울을 즉시 폐쇄하지는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기억 봉인과 상담이 필요한 환자들을 위한 수단은 남겨야 했다.
그때 문서 열람실의 문이 열렸다. 흰 머리를 단정히 빗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제5문 원장 아르델이었다.
“신청서를 읽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당신들은 사람들이 거짓말을 기억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는군요.”
“그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아르델은 차분하게 웃었다.
“나는 반대쪽의 걱정을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진실 때문에 평생 다투는 일을요. 나는 그들에게 한 가지 평온한 과거를 주려 했을 뿐입니다.”
“그 과거를 받을지 말지 그들에게 물었습니까?”
아르델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평온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요?”
토비가 손을 들었다. “저는 평온을 원해요. 하지만 제가 안 한 일을 했다고 믿고 싶진 않아요.”
아르델은 토비를 오래 바라봤다. 마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를 처음 들은 사람처럼.
“그럼 직접 보여 드리지요. 과거가 맞춰지면 얼마나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는지.”
원장의 손에 든 작은 초대장이 펼쳐졌다.
[제5문 기억 조화의 밤. 예행연습 시작.]
[실험 참가자: 현재 열람실의 전원.]
수린이 벌떡 일어섰다. “참가 동의를 받은 적 없습니다!”
아르델은 초대장을 내려다봤다.
“이상하군요. 내 장부에는 이미 모두가 고맙다고 말했는데.”
제8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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