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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82화
PAYLUA ORIGINAL · 제82화

82화. 잊고 싶었던 사람의 권리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355자

오프라인 책장
제5문의 주민들은 서로 만날 때 날씨보다 기억의 상태를 먼저 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괜찮으세요?” “어젯밤은 반쯤 접어 두었습니다.” 길가의 작은 찻집에서 그런 인사가 오갔다. 제5문의 거리에서는 손수건과 차를 팔듯 추억도 맡겼다. 유리병에 담긴 것은 실제 기억이 아니라 그것을 떠올렸을 때 느끼는 감각이라고 에른은 설명했다. 병을 산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처음의 규정은 그랬다. 피엘 일행은 에른과 함께 기억 보관소의 동쪽 창구를 찾았다. 입구에는 접수 절차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보호받고 싶은 장면을 고르세요. 보존 기간을 고르세요. 언제든 철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밑에는 최근 덧붙인 듯 색이 다른 글씨가 보였다. ‘공공의 평온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일부 내용이 조화됩니다.’ 벤은 두 문장을 번갈아 읽었다. “처음엔 돌려주겠다고 해 놓고 나중엔 남의 마음을 고쳐 쓰겠다는 건가.” “그 문장만 보고 전부 단정하진 마세요.” 에른이 말했다. “전쟁 직후에는 같은 광경을 떠올리기만 해도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잠시 다른 곳에 맡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살렸죠.” “그건 맡기는 사람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피엘이 말했다. “그 뜻이 지금도 유지되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줄 끝에 선 젊은 여자가 일행의 말을 듣고 돌아봤다. 두 손에는 조그만 은빛 열쇠를 쥐고 있었다. 이름은 은재였다. 항구의 목재 다리가 무너진 날에 대한 기억을 부분 보관한 뒤, 매년 정해진 때에만 열어 본다고 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묻지 마세요.” 은재가 먼저 말했다. “사람들은 그날 이야기만 하면 누가 죽었는지,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부터 물어요. 제가 누구인지 듣기보다 그 일을 듣고 싶어 하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피엘이 답했다. 은재는 그렇게 말한 뒤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열쇠를 살폈다. 돌려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보관 상태가 그대로인지 확인하러 온 날이라고 했다. 창구 직원이 번호를 확인하자 유리판에 행정 기록이 떠올랐다. [신청 목적: 사건 회상 시 불안 완화.] [이용자가 선택한 조치: 일시 보관, 원본 유지.] [현행 처리 상태: 기억 오류 교정 완료.] [관계자 진술: 모두 일치.] 은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저는 그런 처리를 부탁한 적이 없어요.” 직원은 손님 앞에서 당황하는 데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담당 부서를 찾겠다며 뒷방으로 갔고, 돌아왔을 때에는 커다란 고무 도장이 찍힌 안내문을 가져왔다. “고객님이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좋은 소식 아닌가요?” 은재는 안내문을 받지 않았다. “제가 잠시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것과 없었던 일이 되기로 선택한 건 다릅니다.” 피엘은 직원에게 항의부터 하지 않고 변경 시각을 확인했다. 수정 날짜는 이틀 전이었다. 은재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날보다 일 년 이상 늦었다. 변경 권한자의 이름 대신 ‘집단 조화 선행 작업’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원본을 열지 않고 변경 이력만 보전하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은재 씨의 동의를 얻기 전에는 내용을 열람하지 않겠습니다.” 은재는 한참 생각하다가 허락했다. 자기 이야기가 공개될까 봐 걱정하면서도 누가 이름을 사용했는지는 알고 싶었던 것이다. 작은 방 안에서 보관소 감독관 데미르를 만났다. 그는 까맣게 닳은 소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벽에 걸린 자격증에는 ‘기억 봉인술 제1호’라는 문구가 있었다. 데미르는 변경 이력을 보더니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병동에선 한 해에 수백 명이 잠을 못 잡니다. 어제의 두려움을 내일도 그대로 살게 하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걸 막으려고 만든 기술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이용자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정확히 보존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아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관청에서는 회복률이라는 숫자를 요구합니다. 울지 않는 사람이 늘면 병동이 성공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슬픔을 보관한 것도 회복으로, 사건을 신고하지 않는 것도 화해로 기록하기 시작했어요.” 그는 책상에서 두 개의 유리판을 꺼냈다. 한쪽은 실제 보관 신청서, 다른 한쪽은 공공 통계용 요약본이었다. 요약본에는 ‘그날 다리는 안전했다’라는 문장이 덧붙어 있었다. “누군가 사건 기록까지 바꿨군요.” 오스벨이 낮게 말했다. “사건 기록이 아닙니다.” 데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공식적으로는 사건에 관해 사람들이 기억한다고 말하는 내용을 바꿨습니다. 그런데 판사와 보험 담당자들이 그 통계를 원본처럼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그럼 다리 붕괴에 대한 책임도 없어진 셈이네요.” 토비가 말했다. 데미르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데미르는 목재 다리의 구조 보고를 가져오라는 요청에는 조심스럽게 반응했다. 보관소가 갖고 있는 자료 가운데 실제 구조대의 기록은 아주 일부뿐이었다. 그것마저 치료 자료에 포함된 개인 진술과 뒤섞일 위험이 있었다. 피엘은 외부 구조대와 따로 통신했다. 담당 기록관이 보내 준 것은 사고 당일의 출동 번호와 다리의 붕괴 지점이 표시된 지도였다. 기초 사실을 확인하기엔 충분했지만 정확한 책임자를 규명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이것만으로 사건이 해결됐다고 할 순 없겠네요.” 세아가 말했다. “그래도 발생한 사고를 없던 일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는 됩니다.” 피엘이 답했다. 은재는 자신에게 익숙한 다리 이름이 지도에 적혀 있는 걸 보자 잠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도를 치워 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내용 이상은 보여 주지 말아 달라고 했다. 데미르는 즉시 서류를 접어 탁자 반대편에 놓았다. “기억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 사람은 많았습니다.” 은재가 말했다. “지금처럼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빼 달라고 부탁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건 처음이네요.” 그녀는 여전히 그날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가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은 독립적으로 확인되었다. 누군가가 안심하려고 감각을 맡겼다는 것과 사건 자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같은 방에 나란히 둘 수 있었다. 데미르는 예전 의료 기록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음을 떠올렸다. 누군가 아픔을 잠시 잊었다고 진단서에서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가 진료를 마쳤다고 환자가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억 보관소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모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늘부터 직원들에게 확인해야겠군요. 무엇을 보관했고, 무엇을 치료했고, 무엇을 아직 모르는지를요.” 은재는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기억을 보관한 이유는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침에 얼굴을 씻고, 식사를 하고,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을 만큼 숨을 고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누군가 그 선택을 이용해 사건이 없었던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원본을 열어 봐야 하나요?” 그녀가 물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지금 확인하려는 것은 당신의 기억 내용이 아니라 누가 신청서의 조건을 바꾸었는지입니다.” 은재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데미르는 봉인함의 바깥쪽 잠금쇠만 검사했다. 원본은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연결된 요약본이 세 번 수정된 흔적이 있었다. 마지막 수정은 0000 계정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벤은 허공의 숫자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늘 똑같은 놈이 손대는 것 같긴 한데, 옛날 계정을 누가 쓰는지 아직 모른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계정 번호와 책임자의 이름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면 또 오류가 생깁니다.” 보관소 앞에 나오자 저녁 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기억을 돌려받으러 온 사람들이 차례로 줄을 섰다. 그중 누군가는 행복했던 생일을 찾으러 왔고, 누군가는 마지막 인사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열쇠를 더 깊이 감쌌다. 그 모두가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은재는 자신의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제 기억이 무슨 내용이든, 아직 제가 열어 보겠다고 하지 않았다고 적어 주세요.” “적겠습니다.” “그리고 다리가 무너졌다는 사실은 제 마음 상태와 관계없이 따로 조사해 주세요.” 피엘은 두 줄을 나누어 적었다. 한 줄은 은재의 결정, 한 줄은 다리 사고의 객관적 기록. 두 줄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듯. 그때 거리의 전광판이 밝아졌다. [기억 조화의 밤 사전 집계.] [동의율: 98.7%.] [미동의 주민: 과거 동의 기억 복원 예정.] 토비가 숫자를 가리켰다. “그런데 방금 이분은 동의하지 않았잖아요.” 은재는 자신이 아니라 거리 끝에 선 어린아이를 보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는 아직 쓰지도 않은 동의서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머리 위 거울에는 이미 도장을 찍은 기억이 재생되고 있었다. “저 아이도요.” 은재가 말했다. 거울 속 아이는 지금보다 열 살쯤 더 나이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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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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