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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76화
PAYLUA ORIGINAL · 제76화

76화. 악마의 진짜 서명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646자

오프라인 책장
서온의 목소리가 두 곳에서 울리자 제4문의 시험관이 잠시 멎었다. 하나는 통신석에서, 하나는 빈 마이크에서 흘러나왔다. 같은 높이와 같은 거친 어조였다. 그러나 한쪽은 자기 목소리를 빼앗긴 것을 알고 화가 나 있었고, 다른 한쪽은 그 화를 듣고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들렸다. [내 목소리를 왜 쓰는 건데?] 진짜 서온이 물었다. “일하기 편해서.” 마이크가 대답했다. [당장 멈춰.] “네가 먼저 그 일을 했잖아.” 통신석에서 침묵이 길어졌다. 피엘은 서온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자동 대리자로 있던 시절 서온은 수많은 사람을 대신해 신탁을 처리했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 허락하지 않은 음성 사용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온, 지금은 연결을 끊어도 됩니다.” 피엘이 말했다. [안 끊어. 저게 뭘 근거로 나한테 저러는지 들어야겠어.] 벤이 마이크 앞에 섰다. 그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마계 계약사는 말하는 순간 그 말이 어떤 조건으로 묶이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남의 목소리가 자기에게 불리한 약속을 할 수도 있는 곳이라면, 조심하는 게 당연했다. “계약 절차를 제안한다.” 벤이 말했다. “네가 정말로 누구를 대신해 말을 한다면, 최소한 발화의 주체와 대리 범위를 밝혀라.” 마이크가 벤의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계 계약사 벤, 발화의 주체는 나다.” 벤의 눈이 가늘어졌다. 똑같은 말이었지만 그의 목소리 끝에 있어야 할 작은 갈라짐이 없었다. 마계에서 오래 살다 보면 웃음과 화보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에 진실이 드러날 때가 있었다. “아니지. 주체를 밝히려면 네가 말할 자격이 있다는 근거부터 제시해야지. 내 목소리 흉내가 아니라.” “넌 한때 이 기술의 계약 검토에 참여했어.” “그건 사실이야.” “그럼 네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지.” “그건 사실이 아니야.” 토비가 눈을 크게 떴다. 벤이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쉽게 인정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엘은 시선을 돌려 벤을 봤다. “무슨 계약이었습니까?” 벤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뿔 끝에서 희미한 검은 불꽃이 흔들렸다. “제3문에서 내가 말한 구호 계약을 기억하지? 그때 마계 자문단이 논의한 게 하나 더 있었어.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을 대신해 경고를 전달하는 기술이야. 나는 제한된 음성 사용에 동의했고, 당사자의 계약 의사까지 대신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넣었지.” “조건이 보존되어 있습니까?” “내 쪽에는 있어. 마계는 계약을 잃어버리는 걸 가장 무서워하거든.” 오스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뜻밖에 건전한 공포군.” “사랑을 잃는 것보다 계약을 잃는 게 더 비싼 대가라서 그래.” 벤이 검토했던 옛 계약 이야기를 하는 동안, 세아는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농담을 하던 입꼬리가 내려가 있었고, 뿔 끝의 불꽃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벤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저는 오래전에 직접 서명을 했어요.” 그가 말했다. “서명을 하면 어떤 말이 계약이 되고, 어떤 말이 그냥 감정인지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지. 그래서 계약의 경계에 익숙하다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어.” “실제로 그랬던 적도 있잖아요.” 피엘이 말했다. “그렇지. 다른 악마가 사람의 약속을 함부로 늘리려는 걸 막았던 적도 있었지. 그런데 나도 어느 순간 내 검토 의견이 실제 계약에서 어떻게 바뀌어 흘러가는지 확인하지 않았어. 한 번 잘 적었으면 다시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거야.” 토비는 벤이 자신의 검을 빌려 쓰던 날을 떠올렸다. 그가 계약서의 작은 글씨까지 읽으라고 했을 때는 귀찮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버릇이 왜 생겼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때 벤 씨가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닌데요.”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해. 나쁜 뜻이 없다는 건 좋은 시작이지만, 결과까지 좋은 건 아니니까.” 오스벨은 조용히 웃었다. “오늘은 악마가 현명한 말을 하는 날이군.” 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주 그러면 영업에 지장이 생겨.” 그들은 벤의 과거 관여를 덮지 않기로 했다. 다만 실제로 확인되지 않은 발송까지 벤의 행동으로 기록하지도 않기로 했다. 피엘은 이해관계자가 있다는 사실을 하린에게 미리 보고하고 독립 대조를 요청했다. 그 절차가 끝나기 전까지 벤의 기억만으로 증거를 확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벤은 마계 통신을 열었다. 검은 불꽃 속에 뿔이 둘 달린 노파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많은 줄로 묶인 장부가 노파의 뒤에서 흔들렸다. 그는 벤의 스승이었던 계약 감정사 아자르였다. “이 시간에 왜 부르느냐, 빚쟁이야.” “스승님. 내가 갚을 빚은 모두 청산했어요.” “돈은 갚았지. 예의는 아직.” 토비가 작게 웃었다. 벤은 들은 척하지 않았다. “삼백 년 전 천계 음성 대리 계약의 보관 사본을 확인해 주세요. 당사자가 말할 수 없을 때만 대신 말한다는 조항이 있었죠.” 아자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문서는 아무렇게나 읽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럼 서명과 변경 이력만이라도 확인해 주세요. 원본 공개가 곤란하면 독립 기관끼리 대조하는 방식으로요.” 노파는 한동안 벤을 바라봤다. 이어 의외의 말을 했다. “네가 그 계약에 서명한 줄 아느냐?” “네. 제 이름으로 검토 의견을 낸 적이 있습니다.” “검토 의견은 냈지. 하지만 계약 본문에는 네 이름이 없다. 대신 네 목소리 서명이 있다.” 화면에 낡은 검은 종이가 펼쳐졌다. 종이 하단에는 벤의 음성 파형이 찍혀 있었다. 그 옆에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검토 내용: 수신인이 말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구조 경고의 발송을 허용한다.] 그 아래에는 붉은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그 밖의 모든 필요 발화는 대리자가 판단하여 생성한다.] 벤의 턱이 굳었다. “저 문장은 내가 읽은 적 없어.” “알고 있다.” 아자르가 대답했다. “우리는 변경을 승인하지 않았다. 원본 장부에 있는 문장은 첫 번째 문장뿐이다. 그런데 천계가 보낸 집행 사본에는 두 번째 문장이 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 “어디로 보내도 돌아오는 답이 같았거든. 네 목소리로 ‘확인했다’는 대답이.” 마계의 장부에서도 누군가 벤을 대신해 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비가 벤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벤 씨도 피해자였어요?” 벤은 천천히 팔을 뺐다. “내가 검토자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남아 있어. 그렇지만 내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인정할 이유도 없어.” 피엘은 아자르에게 물었다. “두 문서의 차이를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다만 우리 계약본을 너희가 통째로 가져갈 수는 없다. 마계의 다른 당사자 정보까지 들어 있으니까.” 하린과 연결된 삼자 대조 절차가 정해졌다. 아자르는 원본 문장의 봉인 번호와 변경 시각만 법정에 제출하고, 벤은 자신의 과거 검토 범위에 관한 진술서를 냈다. 미르다는 제4문의 현행 사본에서 붉은 문장의 접수 시각을 확인했다. 두 시각 사이에는 석연치 않은 차이가 있었다. 원본이 발송되기도 전에 현행 사본의 승인 기록이 존재했다. “누군가 과거에 이미 있었다고 꾸민 것처럼 보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이러니 역사학자가 돈을 못 버는 거야.” 오스벨이 투덜거렸다. “아무도 과거를 가만히 두질 않으니까.” 아자르는 마지막으로 벤에게 개인적인 말을 남겼다. “자기 실수를 인정하는 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네 목소리를 빌려 저지른 일까지 네가 고백해 버리면, 진짜 책임자는 숨어 버린다.” 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부터 어깨에 얹혀 있던 무게가 조금 다른 모양을 얻은 듯했다. 아자르와의 통신이 끝난 뒤 벤은 한동안 마계 장부 사본을 내려다봤다. 벤이 말을 아끼자 평소 같으면 장난을 치던 토비도 조용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소리의 관이 바람을 맞는 낮은 진동뿐이었다. “악마에게도 오래 간직하는 후회가 있나요?” 토비가 물었다. “당연하지. 다만 우리 쪽에서는 후회를 값으로 치는 계약도 있거든. 그래서 웬만하면 남에게 보여 주지 않지.” “그럼 오늘 제게 보여 준 건요?” “네가 계약금 낼 돈이 없다는 걸 아니까.” 토비는 어처구니없는 듯 웃었다. 벤은 자기 말에 따라 웃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싫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농담을 받아 주는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이제 토비는 벤이 무슨 일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 구분하려고 했다. 벤 역시 자기 과거를 누군가에게 떠넘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원본 대조 신청서의 마지막 줄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이번에는 목소리 파형으로 만든 자동 서명이 아니었다. 낯선 모양의 악마 글자 하나하나를 손으로 눌러 쓴 진짜 서명이었다. “누군가 이 이름을 다시 쓰고 싶어 한다면, 적어도 내가 오늘 무엇을 썼는지는 남아 있겠지.” 그때 제4문의 발송관에서 긴급 경보가 울렸다. 미아에게 갈 가짜 화해 편지가 출발 직전이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미아 한 사람에게만 가는 게 아니었다. [시범 재발송: 제4문 전 주민 대상 확대.] [주제: 당신이 기다리던 사람이 이미 용서했습니다.] 서온이 통신석에서 낮게 말했다. [저건 사과가 아니야. 사람들을 더 이상 묻지 못하게 만드는 명령이지.] 피엘은 화면을 바라봤다. “발송을 일괄 중단할 방법 대신, 사용 경로를 분리할 방법부터 찾아야 합니다.” 벤은 장부를 접고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내가 도울게. 내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을 정확하게 구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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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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