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린 마을에는 눈에 띄는 건물이 없었다.
낮은 돌담, 갈색 지붕, 말린 약초가 걸린 창문. 마을 어귀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풍향계가 서 있었다. 밀헤이븐의 거대한 풍차와 달리 이곳의 물레방아는 한동안 돌아가지 못한 모양이었다. 물길이 말라붙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한가운데에는 이상한 물건들이 모여 있었다. 배도 없는 항구 표지판, 성벽도 없는 경비 초소, 눈이 내리지 않는 계절에 세워 놓은 겨울 축제용 장작더미. 사람들이 받은 신탁을 하나라도 거역하지 않으려고 만들어 놓은 흔적이었다.
“이것들을 다 어디에 쓰려고 하셨어요?”
토비가 마을 입구에서 물었다. 대답한 사람은 빵집 주인 하몬이었다. 빵가루가 묻은 앞치마를 입은 남자는 피곤한 눈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바다를 건너라는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태어나서 바다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항구 표지판을 세워 놨어요. 신이 나머지를 알려 주시겠죠.”
“혹시 신탁을 안 따르면 어떻게 돼요?”
“세상이 망한다고 하더군요.”
피엘은 숨을 멈췄다. 구원 신탁에는 그런 협박 문구가 자주 붙었다. 그는 그동안 '최우선 이행'이라는 분류로 처리했을 뿐, 인간이 그 문장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생각하지 못했다.
마라가 마을 사람들을 한곳에 모았다. 열두 명이 빠짐없이 나온 건 아니었다. 몇몇은 받은 신탁을 수행한다며 집 밖에 나가 있었고, 한 사람은 사흘 전부터 이름을 잊었다고 했다.
“제 이름이 하몬이었던 게 맞나 모르겠습니다.”
빵집 주인은 자신의 앞치마에 적힌 이름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글자가 희미하게 흐려져 있었다.
피엘은 기록을 확인했다. 마을 전체에 떨어진 신탁이 하나의 봉투 묶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제분소에서 발견한 천스물네 건 중 열두 건이었다. 하지만 개별 수신인 칸에는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다.
“누가 이 사람들의 이름을 지우고 있어요.”
오스벨이 주변 땅을 살폈다.
“이 마을에는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 깔려 있군. 신탁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장소를 향해 움직일수록 마법진이 활성화돼.”
“왜 그러죠?” 토비가 물었다.
“각자의 길이 서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려는 걸지도.”
마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받은 명령을 보면 모두 장소가 맞지 않아요. 바다 없는 곳에서 항구를 지키고, 성벽 없는 곳에서 경비를 서라는 거죠. 원래는 같은 한 사건을 해결하도록 만들어진 신탁이 흩어진 걸지도 몰라요.”
피엘은 땅에 열두 개의 돌을 놓았다. 돌마다 한 사람의 잘못 도착한 신탁을 적었다. ‘바다를 건너라’, ‘성벽을 지켜라’, ‘종을 세 번 울려라’, ‘겨울의 불을 피워라’, ‘북쪽 숲에 씨앗을 심어라’.
하나씩 읽던 토비가 손을 들었다.
“이거, 전부 다른 일을 시키는 것 같지만 사실 한곳에 필요한 일들 아니에요?”
“무슨 뜻이죠?”
“마을이 홍수 나면 물길을 열고, 울타리를 세우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불을 피워 몸을 녹이잖아요.”
오스벨이 돌을 다시 배열했다. 일을 시작하는 순서대로 놓자 마법진 위에 옅은 푸른 선이 나타났다.
“구원의 절차다.”
“무슨 구원이요?” 마라가 물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재난을 대비하는 일. 하지만 어디서 일어나는지 지워 놓았군.”
바로 그때 멀리 산쪽에서 땅이 울렸다. 작은 돌들이 비탈에서 굴러내렸다. 하몬이 고개를 돌렸다.
“요즘 산이 자꾸 흔들립니다. 하지만 비는 한 방울도 안 오는데….”
오스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마을의 북쪽 지형을 살피더니 지팡이로 먼 산자락을 가리켰다.
“댐이군. 오래된 저수지 둑 아래에 이 마을이 있어.”
강 상류에 버려진 옛 저수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다. 댐은 얼마 전의 지진으로 균열이 났다고 했다. 물은 줄었지만 둑 안쪽에는 여전히 많은 양이 고여 있었다.
“물이 없어서 마을이 망할 줄 알았는데요.” 토비가 말했다.
“한순간에 너무 많아지는 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지.” 오스벨이 답했다.
피엘은 수첩에 떠오른 붉은 경고를 보았다.
[신탁 수행자 집결: 비승인.]
[기록 복원 가능성 상승.]
누군가 열두 명이 만나 일을 함께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각자 엉뚱한 일을 하는 동안 마을이 재난을 맞도록 유도한 것이다.
“사람들을 모아 주세요!”
피엘이 외쳤다.
마을 광장에서 급히 종이 울렸다. 잘못된 신탁을 받은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누군가는 왜 신탁을 거슬러야 하느냐고 따졌고, 누군가는 세상이 멸망하면 책임질 거냐고 물었다. 피엘은 고개를 들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말하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았다. 실적 최하위에 소멸 명령까지 받은 천사가 인간 열두 명의 운명을 책임지겠다니. 하지만 눈앞에는 실제로 물에 쓸려 갈 마을이 있었다.
“신탁이 잘못 전해졌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의 생명이 위험합니다. 벌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명령을 지킨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하몬이 물었다.
“천사님 말을 믿어도 됩니까?”
피엘은 잠깐 멈췄다. ‘믿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천사가 인간에게 기대하는 가장 쉬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분소와 야간 배달실에서 본 것을 떠올렸다.
“제 말을 무조건 믿지는 마십시오. 산에 올라가 둑을 직접 확인하고 판단하세요.”
마을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때 토비가 성검을 어깨에서 내렸다.
“전 농부인데 용사 신탁을 받았어요. 그렇지만 땅 상태는 잘 봅니다. 저수지로 가서 흙을 확인해 볼게요.”
“저도 동행하지.” 오스벨이 말했다. “물이 있다면 흐름을 잠시 묶을 수 있네.”
마라와 벤은 아래쪽에서 대피로를 정리했다. 하몬은 빵집 오븐을 이용해 따뜻한 빵을 구워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겨울의 불을 피우라는 신탁을 받은 여인은 젖은 나무 대신 마른 장작을 준비했다. 성벽을 지키라는 신탁을 받은 어부는 자신이 뱃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며 밧줄 매듭을 묶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돌이 많고 미끄러웠다. 토비가 앞장서서 걸었다. 오래된 둑에 도착하자 그들은 나란히 멈춰 섰다. 둑 한가운데에 사람 키보다 큰 금이 가 있었다. 사이사이로 진흙 물이 뿜어져 나왔다.
“정오까지 버티기 어렵겠네.” 오스벨이 말했다.
토비는 성검을 들어 균열 옆의 돌 틈에 꽂았다. 빛이 퍼지며 땅속 뿌리들이 자라났다. 처음에는 작은 줄기였지만 순식간에 둑을 감싸는 굵은 나무뿌리가 되었다. 둑의 흔들림이 잠시 멈췄다.
“됐어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더 위쪽에서 새로운 균열이 터졌다. 이 정도 무게를 받칠 뿌리가 한 번에 자랄 수는 없었다. 토비는 이를 악물었다. 성검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오스벨은 물의 흐름을 보며 토비에게 짧게 설명했다.
“내가 둑 안쪽 물을 두 갈래로 나누겠네. 그 사이 자네는 아래쪽 수로의 흙을 일으켜야 해.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밭뿐 아니라 마을 길이 쓸려 내려가.”
“그럼 둑을 더 세게 막으면 안 되나요?”
“언젠가 무너질 둑을 잠시 붙잡는 것과, 무너져도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길을 만드는 건 다른 일이지.”
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일을 하면서도 비슷한 상황을 본 적이 있었다. 물길을 억지로 막아 두면 결국 더 약한 곳이 터졌다. 비가 올 때는 흙의 흐름을 보고 물이 지나갈 길을 먼저 열어야 했다.
그는 성검의 손잡이를 다시 잡았다.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성검은 신성한 빛을 내뿜었지만 무게만큼은 고집스러웠다. 검은 토비의 생각을 읽는 듯 낮게 속삭였다.
‘마왕에게 가라.’
토비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지금은 안 돼.”
‘계약을 어기면 대가를 치른다.’
“그럼 나중에 계산해.”
검이 노여운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토비는 손을 놓지 않았다. 그에게는 마왕의 얼굴을 본 적도, 마왕 때문에 울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은 알았다. 하몬이 나눠 준 빵의 냄새도 기억났다. 당장 보이는 사람을 구하는 일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저 아래에 제 이름 아는 사람들이 있어!”
토비가 외쳤다.
“나도 저 사람들 이름 알아! 그 사람들부터 살릴 거야!”
그 말에 피엘의 수첩에서 얇은 빛이 흘렀다. 성검의 계약 문서에 비어 있던 ‘보호 대상’ 칸에 하나씩 이름이 채워졌다. 토비가 구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 함께 위험을 감당하는 사람들. 구원의 대상은 멀리 있는 추상적인 대륙이 아니라 구체적인 얼굴을 가진 이들이었다.
[보호 대상: 브린 마을 주민.]
[신성 계약 해석 변경 검토 중.]
“오스벨 님! 이 문구를 보세요!”
피엘이 외쳤다.
오스벨은 물을 붙잡느라 얼굴에 땀이 흘렀지만 수첩을 한번 훑어보았다.
“좋군. 계약이 스스로 의미를 배우기 시작한 모양일세.”
멀리 언덕 아래에서는 마라가 주민들의 이동 경로를 점검했다. 아이들은 먼저 좁은 돌계단을 올라갔고, 어른들은 우물 근처에 남아 뒤처진 사람을 찾았다. 벤은 그림자로 임시 다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마을 입구의 다리에는 발이 불편한 할머니 한 명이 남아 있었다.
하몬이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흙탕물이 급하게 불어났다. 벤은 두 사람을 향해 그림자를 뻗었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그의 붉은 눈이 흐릿해졌다. 악마라도 인간을 대량으로 옮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라, 이름!”
벤이 외쳤다.
“저 할머니 이름을 불러!”
마라는 손에 든 주민 명부를 펼쳤다. 전날까지 이름이 지워졌던 페이지에 이제는 희미한 글자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베아 할머니! 들리세요? 하몬 씨가 데리러 갑니다!”
할머니가 돌아봤다. 하몬은 손을 뻗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그림자 다리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사람들이 서로를 찾아내는 의지가 제0경로의 이름 소거에 맞서고 있었다.
피엘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분명해졌다고 느꼈다. 명령서에 빠진 내용이 있다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다면 그곳에 사는 이들의 길을 따라가면 된다. 신탁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은 서명만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도 분명한 일이었다.
[신성 계약 위반. 성검은 마왕 토벌용입니다.]
토비가 피엘을 돌아봤다.
“또 위반이래요.”
피엘은 수첩을 열었다. 수첩에도 똑같은 경고가 떴다. 그는 이제 정확히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았다.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검을 쓰라는 명령은 있었지만, 사람을 구하지 말라는 명령은 없었다.
“무시하세요!”
“정말요?”
“문서에 없는 금지 사항은 자동으로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토비는 성검을 더 깊게 박았다. 오스벨이 물의 압력을 양쪽으로 나누는 마법을 펼쳤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았다. 뒤쪽 산비탈까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아래 마을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세 번이었다. 사람들이 대피를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벤은 그림자를 길게 늘여 노약자들의 발판을 만들었고, 마라는 언덕 위에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이름을 잊고 있던 이들까지 옆 사람의 부름을 듣고 대답했다.
“하몬!”
“여기 있습니다!”
“미라!”
“여기 있어요!”
사람들이 대답할 때마다 마을 바닥에 깔린 검은 선이 하나씩 사라졌다. 제0경로의 마법진은 고립된 수신자들에게만 작동했던 것이다. 서로 이름을 부르고 돕자 도려낸 기억이 제자리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피엘의 수첩에서 알림이 울렸다.
[묶음 신탁 12건 정상 경로 복원.]
[원본 발신 기관 일부 확인.]
마침내 저수지의 압력이 낮아졌다. 토비와 오스벨은 물을 안전한 오래된 수로로 돌려보냈다. 진흙물이 들판으로 퍼졌지만 마을은 무너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해가 기울 무렵, 하몬이 토비에게 따뜻한 빵을 가져다주었다.
“용사님 덕분입니다.”
“전 농부라니까요.”
“농부라서 구해 주신 거겠죠.”
토비는 빵을 반으로 갈라 피엘에게 건넸다. 피엘은 자기 날개가 아직 더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 빵을 받아 들었다.
그때 수첩의 복원된 기록 맨 아래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원본 발신 결재: 이시아 여신.]
[복원 금지 및 대체 수신자 지정 승인.]
피엘은 눈을 깜박였다. 천계에서 자비를 관장한다고 알려진 여신 이시아. 하급 천사들은 그녀가 내리는 축복 신탁을 가장 안전한 업무로 여겼다.
그 이름이 천스물네 건의 오배송 기록 한복판에 있었다.
“그 여신이 누구야?” 벤이 물었다.
피엘은 한참 입을 열지 못했다. 자신이 믿어 온 질서의 중심에서 들려온 이름이었다.
“신탁을 바로잡아야 할 분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그런데 기록상으로는 신탁을 바꾸라고 명령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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