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문의 지하 문 앞에서 피엘은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 침묵은 동의가 아니었다. 조금 전 문 너머에서 누가 기다리는지 확인하겠다고 알렸고, 지금은 상대가 자신의 방식으로 대답할 시간을 주고 있었다. 그것은 제3문이 오랫동안 잃어버린 종류의 기다림이었다.
문에서 작은 두드림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네 번이었다. 세아는 손짓의 리듬을 따라 손가락으로 공중에 표시했다. 하루가 말한 작업장 신호 가운데 '사람 있음'을 뜻하는 방식과 같았다.
“문 뒤에 갇힌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세아가 말했다.
멜로스는 지도를 펼쳤다. “이 문 뒤는 보존고의 비상 확인실입니다. 예전에 여러 수신인에게 직접 답장 받을 때 사용했다고만 들었습니다. 사람이 드나들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 기록은 믿기 어렵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여긴 대답해도 안 한 걸로 적는 곳인데.”
멜로스는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현재 확인 가능한 통행 기록을 보여 주었다. 기록은 정산 장치가 설치되던 날부터 시작해 있었다. 그 이전에는 누가 출입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스벨은 문에 세 개의 자물쇠가 달린 이유를 설명할 자료를 찾아냈다. 오래된 설계서 한쪽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는가? 무엇을 말했는가? 아직 말하지 않았는가? 이 세 가지는 한 사건에서 따로 보관한다.'
피엘은 읽고 고개를 들었다. “자물쇠 세 개를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 서로 섞이지 않도록 지키는 장치였군요.”
도린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열쇠는 없습니다.”
“하루 씨가 만든 손잡이가 하나 있었죠. 그것은 문을 여는 도구이고, 세 가지 응답을 해석하는 권한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루에게 연락했다. 하루는 작업장 안에서 리아와 함께 서 있었다. 사정을 들은 그는 곧장 손짓했다.
[손잡이를 가져가십시오. 단, 누구의 답장인지 모르는 것을 내 이름으로 읽지는 마세요.]
[동의 여부는 손잡이 사용에 한정됩니다. 다른 기록 공개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피엘은 그 조건을 그대로 적고, 손잡이 설치를 위해 멜로스의 출입 허가를 받았다. 토비는 손잡이의 높이를 조절하고 세아는 열린 틈으로 빛을 비추었다. 벤은 여전히 검은 잉크가 새어 나오지 않는지 수문을 감시했다.
문이 아주 조금 열렸다.
안에는 사람 대신 커다란 종이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빛이 없는데도 그림자는 벽을 따라 움직였다. 어떤 방향에서 바라봐도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그림자 옆에는 낡은 의자 셋이 놓여 있었다. 한 의자에는 대화를 받아 적는 펜, 둘째 의자에는 손짓을 읽는 거울, 셋째 의자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다.
“세 번째 의자는 왜 비어 있죠?” 토비가 물었다.
오스벨이 답했다. “빈 의자로 남겨 두려고 만들었을지 모르지. 언제나 대답을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야.”
그림자가 벽에 글씨를 만들었다.
[당신의 대답을 받아 적기 전에, 답할 수 있는지 먼저 묻습니다.]
세아가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제3문은 원래 이렇게 친절했네요.”
멜로스는 의자 앞에 앉았다. 그가 벽에 손을 대자 오랫동안 닫혀 있던 시계 소리가 끊겼다. 그리고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멜로스. 구조대는 서둘러야 하지만, 아이의 내일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됩니다.”
멜로스가 벌떡 일어났다. “그 목소리…….”
“아는 분입니까?”
“아주 오래전 사고를 함께 조사했던 조사관입니다. 그분은 사고 뒤 사라졌어요. 우리는 사직했다고 들었죠.”
목소리는 녹음된 것이었다. 질문에 즉시 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사관이 남긴 보고서가 의자 아래에 있었다. 그 이름은 '이라'였다. 보고서에는 구조대 지연 사고의 원인이 단순한 무응답이 아니라, 긴급 구호 통신을 답장 승인 절차에 의존하게 만든 설계였다고 적혀 있었다.
“분리를 제안한 사람이 또 있었군요.” 피엘이 말했다.
“그때도 그랬습니다.” 멜로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분리 시험은 실패했어요. 저는 생존자를 직접 봤습니다. 그들이 다시 위험해지는 걸 견딜 수 없어서….”
그는 말을 멈췄다. 설계를 바꾸는 대신 응답을 빨리 만들어 버리는 방식을 택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는지 더 이상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
이라의 보고서 마지막에는 새로운 경로도가 있었다. '긴급 구조'는 수신자의 계약 동의와 별도로 발동하고, '장기 신탁 효력'은 당사자의 의사를 실제로 확인할 때까지 보류하며, '답장 없음'은 계속 답장 없음으로 남기도록 분리하는 도면이었다.
“이미 누군가가 답을 알고 있었네요.” 세아가 말했다.
“답을 모두 알고 있었다기보다 대안을 설계해 놓았던 거겠죠.” 피엘이 답했다. “실제로 운영했을 때 무슨 문제가 생기는지는 따로 검증해야 합니다.”
이라의 보고서에는 설계도 외에도 작은 편지가 붙어 있었다. 수신인은 멜로스였다. 봉투는 열리지 않은 상태였고, 누구도 내용을 강제로 읽지 않도록 봉인돼 있었다.
“이건 당신 앞으로 왔군요.” 피엘이 말했다.
멜로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보고서와 함께 있던 것이니 증거로 보전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는 피엘에게 먼저 물었다. “제가 지금 읽어도 됩니까? 사건과 관련된 편지일지 모르는데.”
피엘은 하린에게 봉투의 존재를 통지하고, 증거 보전 필요성을 확인한 뒤 멜로스가 원본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읽을 수 있다고 안내받았다. 멜로스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내용은 짧았다. 이라는 '당신이 너무 오래 혼자 책임을 지려고 할까 걱정됩니다. 언젠가 다른 사람의 질문을 듣고, 자신이 만든 답을 다시 살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멜로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분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 결정하지 않았군요.”
“그랬더라면 이 편지는 질문이 아니라 신탁이 됐겠죠.” 세아가 말했다.
멜로스는 편지를 천천히 접었다. 그에게는 오래전 사고의 책임을 피하려고 쌓은 규칙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규칙을 풀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그 사실이 부끄러우면서도 조금은 홀가분했다.
토비가 물었다. “이런 편지엔 답장을 꼭 써야 하나요?”
“아니.” 멜로스가 말했다. “이번에는 내 마음이 준비될 때 쓰고 싶네.”
피엘은 그 대답이 오늘의 어떤 기록보다도 중요하게 들렸다. 하지만 멜로스가 편지 내용을 공개하겠다고 허락한 것은 아니므로, 독립 기록에는 수신 사실과 보전 번호만 남겼다.
지하 방 한쪽에는 작은 흰 칠판이 있었다. 누군가 여러 번 지웠다 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세아는 남은 글씨를 해독했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받은 직원은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그 밑에는 오래전 연습생들의 답이 여럿 적혀 있었다.
'빨리 다시 물어본다.' '상사가 대신 판단한다.' '좋은 뜻으로 해석한다.'
마지막 줄은 다른 색 잉크였다.
'잘 모르겠다고 기록한다.'
세아는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갔다. “이건 누가 적은 걸까요?”
도린이 대답했다. “제3문 초창기 교육 과정에 그런 문제를 출제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지금은 시험에서 빠졌죠. 처리 완료율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요.”
토비는 낡은 칠판을 닦으려다 멈췄다. “제게 물었다면 틀렸겠네요. 저는 농사가 처음일 때 모르겠다고 하는 게 창피했거든요.”
“지금은요?”
“지금도 모르는 게 많죠. 다만 모른다는 걸 인정해야 씨앗을 더 배울 수 있더라고요.”
오스벨은 흰 칠판을 오래 보았다. 대마법사였던 그 역시 모든 질문에 답이 있어야 한다는 기대에 수백 년을 살았다. 때로는 그런 기대 때문에 잘못 배달된 신탁보다 더 어리석은 결정을 했는지도 몰랐다.
“이건 시험에 다시 넣어야겠군.” 오스벨이 말했다. “다만 정답 하나를 외우게 하는 방식은 피하고 말이야.”
그때 멜로스의 시계 하나가 울렸다. 지상 남쪽 다리에서 폭우로 인한 붕괴 위험이 발생했다는 긴급 통신이었다.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했다. 그러나 제3문 시스템은 통행자들에게 '미래 경로 동의'를 먼저 요구하고 있었다.
[동의 확인 전 대피 지시 발송 불가.]
멜로스가 얼굴을 굳혔다. “이번에도…….”
토비가 외쳤다. “다리 무너지고 나서 서류 쓰면 뭐해요!”
피엘은 멜로스와 도린을 바라봤다. “현장 구조 연락망은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까?”
“마리안 씨가 확인한 예비 중계가 있습니다.” 도린이 답했다. “하지만 대피할 사람들의 위치 정보는 제3문이 관리해요.”
“사람들의 위치를 필요한 구조 담당자에게 최소 범위로 전달하고, 장기 동의와 결합하지 않게 합시다.”
멜로스가 급히 중계석을 잡았다. “제3문 관제관 멜로스입니다. 남쪽 다리 낙석 위험으로 즉시 접근을 중단하고 현장 구조대의 안내를 따르십시오. 이 안내는 다른 신탁에 대한 동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메시지가 독립 경고망을 통해 전송됐다. 현장 담당자가 수신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리 근처에 있던 두 마을의 접속함은 오래된 관제 장치에 묶여 있었다. 자동 동의를 누르지 않으면 주민에게 경고를 보낼 수 없었다.
피엘이 물었다. “누가 현장에서 직접 알릴 수 있습니까?”
“바스가 예전 배달길을 알고 있습니다.” 도린이 말했다. “네라도 지역 서신망을 갖고 있어요.”
멜로스는 그들에게 수동 경고를 요청했다. 바스는 늙었지만 지상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계단을 정확히 알았다. 네라는 잉크 가게의 배달원들과 함께 안내문을 나눠 주기로 했다.
제3문 시계탑에 경고가 켜졌다.
[정산 중단까지 3시간.]
그리고 바로 아래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남쪽 다리 위험도 증가. 자동 동의를 승인하면 전 주민의 이동 경로를 최적화할 수 있습니다.]
멜로스는 손을 멈췄다. 이전의 그였다면 바로 승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창밖으로 뛰어나가는 배달원들을 봤다. 사람들이 아직 결정하지 않은 미래를 묶지 않고도 지금 필요한 경고를 전하는 일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승인하지 않겠습니다.”
탑이 큰 소리로 경보를 울렸다. 그 순간 제3문의 모든 시계바늘이 한꺼번에 멈췄다.
[관제관의 거부 확인.]
[등록번호 0000이 대리 승인 절차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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