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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62화
PAYLUA ORIGINAL · 제62화

62화. 침묵을 파는 잉크 가게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4,603자

오프라인 책장
검은 잉크를 쏟아부은 여자는 양동이를 내려놓은 채 피엘을 노려봤다. “당신 이름으로 동의가 찍혔죠?” 피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는 이상하리만큼 기쁜 얼굴을 했다. 다른 사람의 피해를 보고 좋아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알고 있던 일이 드디어 누군가의 눈앞에서 벌어졌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잘됐네요. 아니, 잘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증인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명찰 대신 낡은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왼쪽 손등에는 잉크가 스며들어 검게 변한 자국이 있었고, 머리카락 사이로 자잘한 종이 부스러기가 붙어 있었다. “네라예요. 이 거리에서 잉크 가게를 해요. 물건도 팔고, 돌아오지 않은 편지도 보관합니다.” “편지를 보관하신다고요?” 세아가 물었다. 네라는 손가락으로 가게 안을 가리켰다. 나무 선반마다 작은 유리병이 늘어서 있었다. 병 안에는 액체 대신 종이의 그림자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투명한 벽을 따라 얇은 글씨가 떠다녔다. '싫어요.' '나중에요.' '모르겠어요.' “여기 있는 건 다 누군가가 실제로 한 말이에요. 하지만 제3문은 제대로 된 형식이 아니라며 받지 않았죠. 그러곤 대답이 없었다고 기록했어요.” 토비는 유리병을 세어 보다가 포기했다. 선반이 가게 뒤쪽까지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많은 걸 혼자 모았어요?” “처음엔 다섯 병이었어요. 그냥 듣기 싫은 말을 담아 두는 취미라고 놀림받았죠. 그 다음엔 쉰 병. 지금은 세기도 싫어요.” 네라는 피엘이 들고 있는 독립 기록석을 보았다. “그건 제3문 장부랑 연결되지 않았죠?” “예. 서로 독립된 기록입니다.” “좋아요. 여기서 이야기해요. 밖에서 너무 오래 서 있으면 또 동의가 갱신돼요.” 그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오자 한쪽 벽에서 커다란 시계가 작동했다. 초침 대신 깃털이 달린 장치였다. 깃털은 사람이 숨을 쉴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네라는 시계를 천으로 덮었다. “시계가 숨을 세는 게 싫어서요. 내 가게에선 누구도 몇 번 숨 쉬었는지 계산하지 않아요.” 벤은 가게 구석에 놓인 안내문을 보고 웃었다. ‘대답 강요 금지. 침묵 할인 없음.’ “장사는 잘되나?” “아주 안 되죠. 제3문에선 빨리 동의하는 사람이 우수 고객이거든요.” “악마 같은 영업 방식이네.” “악마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진 않아요.” 벤은 순순히 두 손을 들었다. “이런. 내 직업 정체성을 공격받았군.” 도린은 여전히 문턱에 서 있었다. 네라와 알고 지내는 눈치였으나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검증관님도 오세요.” 피엘이 말했다. “저는 근무 중이라 사적인 가게 안에서 서류를 보면 안 됩니다.” “이 자리에서 공식 확인이 가능하다면 그 절차를 알려 주세요. 아니면 현장 진술을 듣고 나중에 정식 접수할 수 있게 도와주셔도 됩니다.” 도린은 잠시 망설이다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문을 닫자 가게의 바깥 간판이 천천히 뒤집혔다. '잉크 판매'라는 글씨 뒷면에는 다른 문장이 숨어 있었다. '아직 대답하지 않은 사람을 위한 방.' 네라는 가장 오래된 병 하나를 꺼냈다. 안에는 목소리가 없었다. 단지 길고 희미한 선 몇 개가 떠 있었다. 그녀가 병을 창가에 놓자 선들이 손짓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수어로 한 대답이에요. 소리로는 읽을 수 없다고 제3문에서 침묵 처리했죠. 그런데 이건 분명한 거절이에요.” 세아가 앞으로 다가갔다. “그분은 어디 계세요?” “제3문 남쪽 작업장에 있어요. 이름은 하루. 목수예요. 남의 문을 잘 만드는데, 자기 문을 열 허락은 받지 못하는 사람이죠.” 네라의 설명에 따르면 하루는 태어날 때부터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수어와 글씨로 누구보다 정확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그러나 제3문의 응답 규칙은 '승인 음성'과 '지정 서식' 두 가지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하루가 수어로 보낸 거절은 모두 '무응답'으로 바뀌었고, 무응답은 곧 동의가 되었다. “그러면 그분이 보낸 거절은 어디에 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여기요.” 네라가 병을 들어 보였다. “당시 제가 기록 매체용 잉크를 팔았거든요. 수신인이 동의한 사본만 갖고 있습니다. 원본은 제3문이 가져갔어요.” “사본을 법정에 제출하시겠습니까?” “아직은요.” 네라는 대답했다. “이 사람의 허락 없이 제가 먼저 결정하면 똑같은 일을 하는 거잖아요.” 피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찾아가겠습니다.” 가게 밖에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동시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리 중앙에 솟아 있던 안내판 하나가 지상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가로막았다. 가로막힌 길 앞에는 짐을 든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어떤 이는 입을 열었으나 공중에 떠 있는 금빛 종이가 먼저 대답했다. [귀하께서 안전 규정에 동의하셨습니다.] 나이가 든 남자가 무언가를 설명하려 했지만, 종이는 다시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통행을 담당하던 직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벌렸다. “동의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게 하는 규정입니다. 이곳을 지나가면 모든 기존 신탁의 효력도 받아들이는 걸로 돼 있어요.” 토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집에 가려는 건데 왜 평생을 같이 걸어야 하죠?” 벤이 말했다. “출구를 선택하는 순간 계약 하나가 따라붙는 거야. 마계에서 흔히 쓰는 수법이지. 우리는 보통 표지판이라도 크게 세워 놓지만.” “자랑하시는 거예요?” “비교 설명이지.” 피엘은 도린에게 물었다. “이 규정은 방문자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동의를 확보하기 위한 것입니까?” “둘 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 서로 나눌 수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는 출구 앞에 섰다. 긴 줄의 맨 앞에는 아이 손을 잡은 여자가 있었다. 아이의 표정이 어두웠다. 계단 너머에 비가 쏟아졌고, 아이가 집에 갈 수 있도록 데려가려는 어머니는 신탁의 영구 효력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말씀하신 내용을 따로 기록해도 괜찮겠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여자가 놀란 얼굴로 답했다. “제가 정말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해도 집에 갈 수 있어요?” “아직 제가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안전한 귀가에 필요한 조치와 영구적인 신탁 동의가 왜 묶여 있는지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가 직원과 함께 안내 원본을 펼쳐 들었을 때, 도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원본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 적혀 있었다. [출구의 낙석 위험을 안내할 것.] 그 아래 금빛으로 덧씌워진 변환문이 빛났다. [출구를 이용하는 자는 기존 신탁의 모든 효력을 영구 인정할 것.] 도린은 입술을 떨었다. “우린 그냥 안전 규정이라고 배웠어요.” 피엘은 변환 기록을 독립 기록석에 옮겼다. 그 순간 제3문 거리의 광고판이 일제히 뒤집혔다. 조금 전까지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던 곳에 새 문구가 나타났다. [무허가 의미 검증 감지.] [현장 검증관 도린: 직무 정지 대기.] 네라가 낮게 욕을 했다. “봐요. 여기선 직원이 진짜 질문을 하면 직원부터 조용하게 만들어요.” 도린은 자신의 명찰을 움켜쥐었다. 피엘은 그를 대신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다만 말할 기회가 박탈되기 전에 물었다. “계속 동행하시겠습니까?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도린은 종이 간판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그런 다음 명찰을 떼어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은 제 직무보다 제가 직접 본 것을 믿겠습니다. 다만 공식 권한이 사라지면 검증에는 다른 담당자가 필요합니다.” “그 점까지 기록하겠습니다.” 네라는 가게 문을 나서기 전에 손님들이 남긴 작은 그림 하나를 보여 주었다. 그림에는 비 오는 날 우산 아래 서 있는 세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우산을 들고, 다른 사람은 젖은 가방을 움켜쥐고, 마지막 사람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그린 아이가 제게 물었어요. 누가 가장 행복해 보이냐고.” “아마 우산 든 사람이겠죠.” 토비가 대답했다. “그 아이는 그러더군요. 누가 가장 행복한지는 모르겠다고. 가방을 든 사람은 비를 피할 수 있어 기쁠 수도 있고, 마지막 사람은 비가 와서 기쁠 수도 있으니까요.” 세아가 그림을 유심히 보았다. 그림은 서툴렀지만 비를 피하는 사람과 맞는 사람의 손가락이 모두 다르게 그려져 있었다. “그럼 이 그림을 제3문에 보내셨어요?” “보냈죠. 그런데 '행복해 보이는 사람은 전부'라는 답을 받았어요. 아무도 그런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요.” 그녀는 그림을 다시 벽에 걸었다. “그래서 누군가 제대로 보려면 사진도 그림도 있는 그대로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에 있는 병들도 마찬가지고요.” 벤이 그림을 향해 몸을 굽혔다. “이 아이 그림은 제법 용감하네. 내가 그렸다면 모두가 우산을 사게 하는 광고가 됐을 텐데.” “당신이 그리면 옷도 우산도 전부 계약서로 바꾸겠죠.” 네라가 답했다. 토비는 참지 못하고 웃었다. 길에서 경보가 울리기 전까지, 그들은 아주 잠깐 가게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처럼 웃을 수 있었다. 가게 밖으로 나서자, 거리 끝에 있던 시계탑의 시침이 거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라는 하늘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이건 안 좋은 징조예요. 응답률이 떨어지면 제3문은 시간 자체를 다시 정리하려 들거든요.” 종탑의 모든 면에 같은 숫자가 떠올랐다. [다음 자동 동의 정산까지: 12시간.] 그 아래에는 오늘 처음 듣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산 승인자: 제3문 관제관 멜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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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2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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