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아는 번호표를 보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제 이름이 있네요.”
“맞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런데 그게 현재 발송 대상이라는 뜻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마리안은 시험 정지 기록을 두 번 확인했다. 원래 13번은 북쪽 해안의 임시 진료소로 가는 보호 안내였다. 실제 수신인 칸은 비어 있었고, 담당 기관 주소만 적혀 있었다. 거기에 세아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은 변환본이 회로를 통과하는 순간이었다.
나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제2문이 예전 개인 기록을 끌어다 새 접수에 붙여 버린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시험 번호가 재사용됐을 수도 있습니다.” 마리안이 답했다. “번호만 보고 원인을 정하면 곤란해요.”
토비가 투명한 상자 너머를 들여다봤다. “그럼 저 이름을 지우면 되지 않아요?”
“지우면 누가 왜 넣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피엘이 말했다.
토비는 뒤로 물러났다. “알겠어요. 이제 이름이 적혀 있는 곳은 무조건 안 건드릴게요.”
벤이 팔짱을 꼈다. “농부치고는 꽤 섬세해졌군. 그래도 감자는 건드려도 되지?”
“제 감자는 왜 자꾸 건드리려 해요?”
나엘은 웃을 틈도 없이 장부를 펼쳤다. 번호 13은 제2문 역사에서 몇 차례나 다시 쓰인 번호였다. 최초 점검번호 2-13, 리네의 분리 심사, 그리고 이번 시험의 보호 범주 13번. 같은 숫자였지만 발급 체계가 달랐다.
“번호만 우연히 같은 거라면 연결되면 안 됩니다.” 마리안이 말했다. “그렇다면 식별 키가 잘못 설계됐다는 증거죠.”
벤은 바닥에 작은 붉은 원을 그렸다. 계약 탐지술이 번호표를 건드리자 희미한 사슬 모양의 글자가 떠올랐다.
[수신인 미확정 시 과거 최적화 대상자를 시험 대리인으로 호출.]
“뭐라고?” 벤이 소리쳤다. “빈칸을 채우려고 예전 수신인의 이름을 끌어온다고?”
마리안이 문서를 넘겼다. “이건 누군가 오래전에 만든 임시 회피 규칙이에요. 빈칸 때문에 시험이 실패하지 않도록 시험 대리인을 자동 지정하는 기능이죠. 하지만 그 규칙이 실운영 회로에 남아 있었다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피엘은 서온에게 장부 검색을 요청했다. [제1문 원본에 있는 대리자 규칙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서온이 대답했다. [확인했어. 원래는 허구의 시험 표식만 써야 했는데, 나중에 실제 수신자 명부가 연결됐어. 내가 남긴 보완 기록에는 '실수신인 대리 연결 금지'라고 적혀 있어.]
“그런데 현재는 연결돼 있군요.”
[그래. 누가 예외를 만들었는지 찾고 있어. 그리고 피엘, 네 이름도 과거 시험 표식 목록에 있어.]
피엘은 잠깐 말을 잃었다. 자기 이름이 원본과 실험 사이를 오가는 일이 이젠 낯설지 않았지만, 그런 이유로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제 이름이 실제 피해 사례로 등장하는지 확인해 주세요. 아직 어떤 결론도 내리지 마시고요.”
서온이 낮게 웃었다. [나한테 배운 말투를 다시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세아는 자기 번호가 나타난 이유를 알아야 했다. 하지만 피엘은 그를 증거처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우선 기록 열람 여부를 물었다.
“저는 보겠어요.” 세아가 말했다. “그렇다고 제 어린 시절 전부를 공개하는 건 아니에요.”
그들은 개인 열람실에서 다시 봉인을 열었다. 이번엔 리네의 발신 청원과는 별도로, 세아가 태어나기 전 등록된 '예비 수신자 보호 계획'이 있었다. 계획서에는 구체적인 인생 경로가 아니라, 보호자가 없어질 경우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지 적혀 있었다.
'이 아이가 실수하더라도 돌아와 쉴 곳을 남겨 두어 주세요.'
세아는 그 문장을 읽고 오래 침묵했다. 자신이 살던 작은 집의 문이 떠올랐다. 어머니가 늦은 밤까지 불을 켜 두던 방이었다. 그는 늘 정답을 말해야만 그 집의 문이 열리는 줄 알았다. 사실은 틀린 답을 말하고 돌아와도 문이 열리는 집이었다.
“저는 어머니가 저한테 바란 걸 거꾸로 들은 채 살았네요.”
피엘은 그 옆에 앉았다. “그런 경험을 하셨다는 말씀은 세아 씨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원본과 변환본의 차이를 문서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를 구분해 보관하겠습니다.”
세아가 피엘을 돌아봤다. “그런데 왜 자꾸 그런 말을 해요?”
“어떤 말을요?”
“제가 느낀 것과 기록을 구분한다는 말이요. 제가 틀리게 느낄 수도 있다는 뜻인가요?”
피엘은 잠깐 생각했다. “아니요. 제가 두 가지를 섞어 하나라도 잃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문서가 설명하지 못하는 경험이 있고, 경험만으로 단정할 수 없는 조작 방식도 있으니까요.”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마음에 들어요. 하지만 가끔은 그냥 슬펐겠다고 말해 줘도 돼요.”
피엘은 눈을 크게 떴다. 잠시 뒤 조용히 말했다.
“많이 슬프셨겠습니다.”
세아는 울다가 웃었다. “그 말은 정답이네요.”
“제가 이젠 정답을 조금 경계하게 됐습니다.”
피엘은 봉인함에 들어간 13번 번호표를 바라봤다. 작은 이름 하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려 한 일은 그에게 낯설지 않았다. 제1문의 장부도 원래 빈칸에 자신이나 서온의 이름을 넣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원래 피해를 겪었던 세아의 이름까지 재활용하려 하고 있었다.
“빈칸이 사람보다 중요해진 거군요.” 토비가 말했다.
“빈칸을 채우면 일이 끝난 것처럼 보이니까요.” 피엘이 대답했다.
벤은 회로에 남아 있는 계약 흔적을 확인했다. 악마가 읽을 수 있는 언어로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결과가 정확하면 대리자의 자격은 추후 확인한다.' 그 문장 옆에 작은 별표가 붙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별표 아래의 확인 절차가 아예 실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마계에서 저걸로 계약서를 만들면 사기라고 불러.” 벤이 말했다.
“천계에서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럼 누가 손해를 봤는지부터 찾아야겠군.”
피엘은 자신이 답장을 받기 위해 어디까지 왔는지 잠깐 잊을 뻔했다.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 중요했다. 하지만 기록 속 사람을 다시 이용하지 않게 하고, 이미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자신의 기록을 확인할 길을 주는 것도 중요했다. 그는 수첩에 두 항목을 나란히 적었다. '자동 대리 연결 차단'과 '기존 수신자에게 변경 사실 통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신할 수 없었다.
마리안은 대조 전 직원들에게 한 가지를 더 요청했다. 잘못된 연결이 우연히 생긴 것인지, 누군가 악의를 품고 만들었는지 아직 결정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류가 일어날 수 있게 남겨 둔 구조가 있다는 사실은 별도로 기록해야 했다.
나엘은 사고 때 자신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세아를 곤란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고 말했다. 세아는 그의 팔을 가볍게 두드렸다.
“저도 놀랐어요. 그래도 제가 직접 볼지 말지 결정할 시간을 주셨잖아요. 그건 좋았어요.”
“당신 어머니의 편지가 아니었다면 저는 그 기능이 있는지도 몰랐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 어머니를 모든 문제의 해결사로 만들지는 말아 주세요. 어머니는 제게 아침에 일어나라고 세 번이나 소리치기도 하던 평범한 분이었어요.”
토비가 웃었다. “그건 저희 어머니도 그랬어요.”
“제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더 자면 빵 냄새로 유혹하셨죠.” 세아가 말했다. “왜 그렇게 빵을 잘 굽셨는지 몰라요. 제가 일어나서 먹기 전에 다 식어 버렸는데.”
그 말에 누구도 거창한 교훈을 붙이지 않았다. 하린은 그 개인적인 이야기를 회의록에 옮기지 않았고, 마리안은 오류 재현 시각만 적었다. 세아는 자기 이야기가 자료가 되지 않고 그냥 대화로 남는 것이 기뻤다.
잠시 후 유단이 물었다. “실제 수신자 이름을 호출하는 규칙을 끊으면 예전에 접수된 서류를 더는 못 찾게 되지 않겠나?”
“그래서 끊기 전에 식별자와 조회 경로를 따로 보존합니다.” 마리안이 말했다. “기록을 없애는 게 아니라 새 발송 과정에서 이름이 다시 쓰이지 않게 막는 거예요.”
피엘은 그 설명을 세아에게도 전했다. 과거의 증거를 남겨 두는 일과 과거의 명령이 계속 작동하지 않게 하는 일은 동시에 할 수 있었다. 두 일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을 때 모두가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날 저녁, 마리안은 시험 24건의 대조 결과를 냈다. 23건은 정해진 회로에 남아 있었고, 13번 한 건만 과거 수신자의 이름을 불러왔다. 실발송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리 연결 규칙이 호출됐지만 안전 정지 장치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실패라고만 적기엔 정보가 많군요.” 나엘이 말했다.
“그렇다고 성공도 아닙니다.” 마리안이 답했다. “안전 정지 기능이 작동했다는 사실과 설계 결함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함께 적어요.”
유단은 시범 결과보고서에 자신의 이름을 쓰고 말했다. “나는 과거 분리 시험의 실패가 분리 자체의 잘못이라고 생각했지. 이제 보니 기록도 시험도 제대로 검증하지 않았어.”
세아는 물었다. “그때 어머니가 제출한 반대 의견은 어디 있나요?”
유단이 낡은 서가를 가리켰다. “원본은 제2문에 없네. 사고 조사 과정에서 제3문으로 넘어갔다고 들었어.”
“제3문이요?”
“신탁이 실제로 어느 삶에 적용됐는지 확인하는 곳이지. 미래에 대한 문장을 현재의 지상 주소에 배정하거든.”
피엘은 그 말을 수첩에 적었다. 제2문에서 일괄 신탁을 막더라도 이미 발송된 많은 편지는 다른 문에서 효력을 계속 행사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북쪽 해안 진료소에서 연락이 왔다. 이전에 수동 전달한 보호 안내가 도착해 담당자들이 상황을 확인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아이의 상태는 안정적이라는 추가 소식도 함께 왔다. 나엘이 안도의 숨을 쉬었다.
피엘은 결과를 적었다. 지원 통신이 도움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 통신만으로 모든 치료 결과를 자신의 공으로 돌릴 수 없었다.
그때 서온의 통신석에서 또 다른 문장이 튀어나왔다.
[실수신인 대리 연결 예외 승인자 확인.]
[승인 직무: 제3문 미래 배정국.]
[예외 활성화 조건: 원본 발신인 0000 유지.]
“아직 그 번호가 끝나지 않았군.” 벤이 말했다.
피엘은 세아와 유단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들은 마침내 과거의 결정이 지금의 사고로 이어진 경로를 하나 발견했다. 이제 그 경로를 끊어야 할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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