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단이 서명하려 하자 종탑이 먼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투명한 빛줄기였다. 손목을 조이지도 않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그가 펜을 종이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분리 시범의 결과가 불리할 경우, 승인자가 전부 책임지겠습니까?]
“잠깐.” 피엘이 말했다.
유단은 펜을 멈췄다. “왜 그러지? 내가 하겠다고 했네.”
“시범을 승인하는 책임과 모든 결과를 혼자 떠맡는다는 약속은 다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맞습니다. 그러니 승인자의 판단, 기술 담당자의 실행, 감사관의 검토를 구분해야 합니다. 제가 제1문에서 확인한 최초 사고는 그걸 한 사람에게 몰아넣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됐습니다.”
유단은 펜 끝을 내려다봤다. 지금까지 그는 무언가를 승인하라는 문장이 오면 그 아래 붙은 작은 글자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 긴급한 상황에선 언제나 누군가 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 누구 서명을 더 받아야 하나?”
나엘이 서랍을 뒤져 묵은 양식을 가져왔다. '시험 발송 분리 승인서'에는 세 칸이 있었다. 승인자, 실행자, 독립 확인자. 마지막 칸은 잉크로 여러 번 덧칠되어 보이지 않았다.
“하린 씨가 독립 확인을 맡을 수 있을까요?” 세아가 물었다.
하린은 통신으로 대답했다. [제1문 감사 담당으로서 절차 적정성 검토는 할 수 있지만, 제2문 기술 안전까지 보증할 수는 없어요. 제2문과 이해관계 없는 기술 확인자를 별도로 지정해야 합니다.]
오스벨이 앞으로 나섰다. “내가 맡으면 좋겠군. 난 마법탑 소속이지 제2문의 급여를 받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오스벨 님도 사건 관련자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기술 자료에 관해 의견을 낼 수는 있어도 완전히 독립된 자격인지 심사받아야 합니다.”
“옳은 지적일세.” 오스벨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마법을 보여 주려다 서류부터 요구받는군.”
벤이 끼어들었다. “대마법사가 닭을 돌보고 돌아다니다 이제 서류 앞에서 기뻐하기까지 하네. 신탁의 장난이 끝나면 세상은 꽤 지루해질 거야.”
“닭을 돌보는 게 왜 지루하나? 알을 낳을 시간에 제대로 먹이를 주는 건 매우 정교한 일이야.”
두 사람의 언쟁이 길어지기 전에 나엘이 외부 점검관을 호출했다. 제2문의 본청은 잠시 망설이더니 먼 별관에서 기술 감독관을 파견했다. 이름은 마리안. 은빛 고글을 쓰고, 무거운 공구함을 바퀴 달린 수레에 싣고 오는 천사였다.
마리안은 문턱을 넘어오자마자 말했다. “시범 발송이라면서요. 제게 필요한 건 박수나 선언이 아니라 차단 장치 위치입니다.”
토비는 반가워서 손을 들었다. “장비부터 보는 사람이네요!”
“당신은?”
“농부입니다.”
“훌륭하군요. 잘못 설치된 수문이 어떤 일을 만드는지 아시겠네요.”
토비가 으쓱했다. “지난해 밭이 절반 잠겼거든요.”
“자랑은 아닌 것 같지만 경험은 인정합니다.”
마리안은 종탑의 바깥판을 열고 은빛, 붉은빛, 검은빛 줄을 하나씩 확인했다. 은빛은 자기 예약, 붉은빛은 긴급 경고, 검은빛은 미래 경로 지정. 셋은 서로 다른 회로였지만 마지막 확인 단계에서 동일한 승인 인장을 요구했다.
“회로는 분리할 수 있어요. 다만 시험 중 신호가 잘못 흐르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야 하죠.”
“원래 상태가 잘못된 상태여도요?” 세아가 물었다.
마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되돌린 뒤 즉시 운영을 재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원상 복구 수단이 있다는 것과 그 상태를 계속 쓰겠다는 건 다릅니다.”
그 대답은 피엘에게 마음에 들었다. 그는 시험 대상을 24건으로 제한한 사유를 수첩에 적었다. 그중 여덟 건은 수신인 동의가 있는 일반 예약, 여덟 건은 긴급 보호, 여덟 건은 미래 경로 지정이었다. 서로 다른 범주의 시험을 섞어 두면 각 회로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시험 대상이 놓인 투명함 안에는 서류 대신 작은 모래알들이 들어 있었다. 각 모래알은 편지 한 통의 색과 무게를 갖고 있었다. 오스벨은 마법으로 모래알에 새겨진 원본 문장을 읽을 수 있는지 시도했으나 종탑의 봉인에 막혔다. 그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마리안이 제공한 정식 조회창을 이용했다.
“마법이 있으면 모든 문을 여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군요.” 나엘이 말했다.
“열 수 있다고 열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네.” 오스벨이 대답했다. “마법은 수단이고, 허락은 별개지.”
제2문 직원들은 시험 기록을 세 벌 만들었다. 한 벌은 현장에, 한 벌은 법정에, 다른 한 벌은 제1문 원본 보전실에 보내기로 했다. 하린은 서로 다른 직원이 각각 봉인하도록 요구했다. 서류를 세 벌 만든다고 자동으로 진실이 세 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한 장이 사라졌을 때 나머지 기록을 대조할 수 있게 된다.
세아는 봉투에 이름을 쓰다 잠시 멈췄다. 예전에는 모든 문제에 정확한 이름을 써야만 안심했다. 지금은 비어 있는 이름란을 그대로 남겨야 할 때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미확정'이라고 적고, 그 상태를 바꾸려면 원본 확인이 필요하다는 주석을 붙였다.
그러나 종탑은 스스로 대상을 뽑겠다고 했다.
[24건 자동 추출.]
[추출 근거: 성공 가능성이 높은 사례 우선.]
“안 됩니다.” 마리안이 단호히 말했다. “성공하기 쉬운 것만 골라 시험하면 안전성을 확인할 수 없어요.”
피엘도 동의했다. “그렇다고 위험한 사례를 실제로 발송할 수도 없겠죠. 위험도별로 기록을 확보하되, 실발송 시험은 동의와 안전 기준이 확인된 사례에 한정합시다. 나머지는 격리된 시험 환경에서 모의 발송으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서온에게서 통신이 왔다. [기록 장부에서 추출 기준을 확인할 수 있어. 하지만 내 글씨로 된 오래된 규칙이 하나 있어. '성공했다는 증명은 실패할 수 있었다는 기록과 함께 보관한다.' 누가 썼는지 아직 확인 중이야.]
“좋은 문장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래도 작성자와 적용 범위를 찾아 주세요.”
서온은 한숨을 쉬었다. [넌 내 말에 곧장 감동해 주는 법이 없구나.]
“감동했습니다. 출처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서온이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나엘은 시험 중 위험을 신고할 임시 창구를 열었다. 세아는 24개 번호표에 서로 다른 색실을 묶었다. 처음에는 세 가지 색만 쓰려다가 마리안이 말렸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고위험 사례도 색 하나로 단순하게 취급할 수 있어요. 색은 범주만 나타내고, 판단 근거는 기록에 남기세요.”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을 분류하는 일이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마리안은 시범에 참여할 직원들을 모아 짧은 교육을 했다. 단순한 주문을 외우게 하지 않고 실제 사례를 들었다. 별을 보러 여행을 떠나려던 청년이 스스로 '첫눈 오는 날에 집으로 돌아오게 알려 주세요'라고 예약한 편지는 은색이었다. 산길에 쌓인 눈이 무너질 가능성이 있으니 지나가는 이들에게 경고해 달라는 요청은 붉은색이었다. 아이가 자라서 산을 무서워하게 만들어 영원히 그 길을 가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은 검은색이었다.
“셋 다 산과 눈이 등장하네요.” 토비가 말했다. “하지만 다 같은 말은 아니네요.”
“맞아요.” 마리안이 말했다. “단어를 보고 분류하면 실패해요. 누가 무엇을 요청했고, 받을 사람의 권리는 무엇인지 봐야 하죠.”
직원 하나가 손을 들었다. “산이 정말 위험하다면 아이가 산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도 보호 아닌가요?”
마리안은 가상의 시험지를 펼쳤다. “위험한 곳을 피하도록 충분한 정보를 알려 주는 일과, 그 아이가 앞으로 평생 산을 두려워하도록 마음을 고정하는 일은 다릅니다. 두 번째를 하려면 정당한 근거가 무엇인지부터 물어야 합니다.”
벤이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 “악마의 계약도 똑같아. ‘길을 조심해라’와 ‘영원히 집 밖에 나가지 마라’ 사이에 작은 글씨 하나를 넣으면 상대방의 삶이 바뀌지.”
“그런 계약을 만든 적이 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만들 뻔했지.” 벤이 답했다. “그래서 지금 너희랑 돌아다니잖아.”
피엘은 그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캐묻지 않았다. 대신 교육에 참여한 직원에게 시범 중간에라도 위험을 발견하면 멈출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설명했다. 승인자의 허락이 있어야만 정지할 수 있는 시험은 안전한 시험이 아니었다.
마리안은 실제 정지 손잡이를 모두가 한 번씩 만져 보게 했다. 나엘은 손잡이가 생각보다 차갑고 가벼운 데 놀랐다. 무거운 결심이 있어야만 내릴 수 있는 장치처럼 생각했는데 그저 손바닥만 한 레버였다.
“이걸 지금까지 한 번도 만져 본 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그러면 이번엔 제대로 연습하죠.” 마리안이 답했다.
드디어 유단이 승인란에 서명했다. 마리안은 안전 점검자로, 나엘은 현장 실행자로 서명했다. 피엘과 세아는 참관인으로 기록되었다. 하린은 법정 보전명령의 범위와 충돌하지 않는지 확인했다.
종탑에 세 개의 작은 그림자가 갈라져 나타났다.
은색 종은 한 번 낮게 울렸다. 첫 번째 예약 편지의 수신자가 스스로 적은 날짜와 이름이 일치했다. 붉은 종은 두 번 울렸다. 북쪽 계곡의 경고 편지는 기존 별도 경고망으로 전달되고, 그 기록이 독립 장부에 남았다.
세 번째, 검은 종은 소리를 내지 않았다.
[미래 지정 신탁: 발송 보류.]
[원본 및 변환본: 별도 보관.]
나엘이 기뻐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피엘은 서류 아래에 작은 표시 하나가 생긴 것을 보았다.
[시범 발송 24건 중 1건의 수신인 정보가 불일치합니다.]
“어느 건입니까?”
[긴급 보호 범주, 번호 13.]
세아가 번호표를 확인했다. 13번에 묶인 붉은 실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뜻이에요?”
마리안은 즉시 시험 정지 손잡이를 내렸다. 종소리가 끊겼다.
“누군가 보호 요청을 미래 지정 신탁으로 바꿔 넣었다는 뜻일 수 있어요. 지금은 어디에서 바뀌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피엘은 변환된 번호표를 봉인했다. 시험을 한 순간 성공했다고 선언할 수 없었다. 눈앞에 문제가 나타난 이상 그것을 그대로 조사해야 했다.
그런데 13번의 수신인 칸에 작은 이름이 나타났다.
'세아.'
세아는 천천히 자기 명찰을 내려다봤다. 어머니의 편지는 먼 옛날에 발송된 것이었다. 왜 그것이 지금의 긴급 보호 시험 안에 들어 있는지 아무도 설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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