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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5화
PAYLUA ORIGINAL · 제5화

5화. 배송되지 않은 사람들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6,108자

오프라인 책장
“그 봉투를 내놓으시죠.” 라베른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다. 까만 장갑, 다림질한 긴 외투, 먼지 하나 없는 은색 구두. 밀가루가 천장부터 바닥까지 날리는 제분소 지하에서 그 혼자만 새로 그린 초상화처럼 말끔했다. 그가 지나온 문턱에는 물방울조차 남지 않았다. 피엘은 낡은 봉투를 등 뒤로 감췄다. “이 자료는 제3중계소의 공식 보관물입니다. 적법한 폐기 절차를 확인하기 전에는 인도할 수 없습니다.” 라베른이 느긋하게 미소 지었다. “공식 보관물이라고요? 이 장소는 서류상 폐쇄됐습니다.” “하지만 운영하고 있잖습니까. 통행료도 받고, 인간도 붙잡아 놓고요.” “그건 감찰국 소관입니다. 담당자의 업무 범위를 넘기지 마십시오.” 피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말을 하는 상사는 천계에서 수백 번 보았다. 일은 남이 벌였는데 책임 소재를 따질 때만 규정이 끝없이 길어지는 사람들. 그렇지만 라베른의 목소리에는 성급함이 없었다. 명령만 내리면 눈앞의 천사를 없앨 수 있다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여기 있는 인간들부터 내보내겠습니다.” “사람들은 합법적인 계약을 맺었습니다.” “기억을 빼앗긴 계약이 합법일 수는 없죠.” “계약자가 계약 내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 계약이 아주 성공적이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벤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저 인간, 악마였으면 벌써 승진했겠다.” 라베른의 시선이 벤에게 향했다. “악마 벤. 천계 업무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수배 중이군요.” “나는 원래 불법이 특기거든. 경력 증명서가 필요하면 나중에 보내 줄게.” 그 말을 끝내기도 전에 라베른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벤의 발아래 있던 그림자가 사각형 틀로 바뀌며 그를 바닥에 붙잡았다. 벤이 그림자를 걷어 차도 꿈쩍하지 않았다. “여긴 제0경로의 보관 구역입니다. 악마의 영역은 통하지 않지요.” “잠깐, 제0경로?” 피엘은 그 단어를 놓치지 않았다. 라베른이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그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방금 감사관님이 하셨는데요.” 토비가 끼어들었다. 라베른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토비는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동네 이장님도 비밀 얘기 하다가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 누가 알려 줬냐고 화내셨어요.” 오스벨이 작게 기침했다. 피엘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그러나 바닥의 서랍이 하나씩 불타고 있었다. 타는 종이 냄새에 섞여 낯선 냄새가 났다. 사람들이 잃어버린 기억이 재가 되는 냄새였다. “토비 씨. 사람들부터요.” 토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린의 어머니와 제분소 노동자들을 운하 방향으로 이끌었다. 라베른이 한 손을 들자 출입구가 금속판으로 막혔다. “집행 허가 없는 자는 나갈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오스벨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마른 쌀자루들이 부풀더니 거대한 반죽이 되어 문 틈으로 밀려들었다. 라베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무슨 금지 마법입니까?” “발효라는 자연 현상일세.” “발효가 금속판을 들어 올립니까?” “어느 정도는.” 토비는 금속판 밑으로 사람들이 지나갈 만큼 틈이 생기자 허리를 숙여 길을 열었다. 한 사람씩 물길로 빠져나갔다. 피엘은 그 사이 봉투를 수첩 속에 끼워 넣었다. 라베른은 피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당신은 운송 담당자였습니다. 판단하는 직책이 아니었어요.” “편지를 받는 사람이 죽을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라는 겁니까?” “필요하다면요. 세상이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규칙대로 일해야 하니까.” 라베른의 장갑에 눈동자가 떠올랐다. 피엘의 소멸 보류 시간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67시간, 62시간, 51시간. 숫자가 미친 듯이 줄었다. “임시 보류란 담당 감사관의 판단으로 조정할 수 있습니다.” “당신 마음대로요?” “규정대로입니다.” 피엘이 대답하려던 순간, 밖에서 거대한 물소리가 났다. 토비가 성검으로 운하 바닥의 돌을 밀어 올렸고, 쌓여 있던 물이 제분소 안으로 밀려든 것이다. 바닥의 마법진이 젖으며 라베른의 발밑에 균열이 갔다. 하지만 소멸 시계는 여전히 움직였다. “피엘 씨!” 토비가 물살 건너편에서 외쳤다. 피엘은 마지막으로 벤을 돌아보았다. 검은 틀에 갇힌 악마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저놈 손에 있는 기록 말고, 네 수첩 안의 날짜를 봐!” 피엘은 얼른 수첩을 펼쳤다. 봉투에서 금빛 잉크가 흘러나와 페이지를 덮었다. 화면에는 제3중계소가 문을 닫은 날짜가 표시됐다. 그것은 피엘의 천계 입사보다 정확히 열여덟 해 앞선 날이었다. [운송 기록 작성 시각: 입사 이전.] [승인자: 피엘.] 말이 되지 않는 모순이었다. 아직 천사가 되지도 않은 피엘이 문서를 승인할 수는 없었다. 피엘은 도장을 꺼냈다. “감사관님! 공식 이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 “네! 제 이름을 사용한 배송 기록이 제 근무 개시 이전에 작성됐습니다. 기록 보전 의무가 발생합니다. 원본과 증인의 신원은 조사 종료 전까지 보호해야 합니다!” 라베른의 미소가 사라졌다. 지하 곳곳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법령을 준수하도록 설계된 제3중계소의 자동 장치가 그 말을 받아들인 것이다. [기록 충돌 발견.] [증거 보전 및 집행 제한.] 라베른이 허공에 명령을 적으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봉투에서 금빛 실이 뻗어나왔다. 실은 그가 펼친 장부를 꽁꽁 묶었다. 벤을 가두던 사각형 그림자도 잠시 약해졌다. “괜찮네. 아주 괜찮아!” 벤이 바닥을 구르며 빠져나왔다. 그가 그림자를 길게 늘여 피엘을 토비 쪽으로 밀었다. 네 사람은 물살을 타고 운하 밖으로 미끄러져 나왔다. 오스벨은 그 와중에도 수탉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젖지 않게 했다. 밖은 석양이었다. 제분소 지하의 시계가 인간 시간보다 빠르다는 말을 피엘은 이제 이해했다. 길어진 해 그림자 사이로 사람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가족을 찾아 달려갔다. 린은 어머니 품에 매달려 울고 있었다. 피엘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 수첩이 한 번 떨렸다. [집행 대기: 49시간 58분.] “사흘 중 하루가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살아 나왔잖아.” 벤이 말했다. “감사관이 언제든 시간을 줄일 수 있다면 사흘이 아니라 세 시간일 수도 있어요.” 토비는 젖은 바지 끝을 쥐어짜며 대답했다. “그럼 멀리 도망가지 말고 이 근처에서 증거를 더 찾죠.” 그때 린의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제분소에 가기 전에는 우체국에서 일했어요.”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앞치마 주머니를 뒤졌다. 그 속에는 밀가루에 절은 작은 우편 열쇠가 있었다. “문서를 바꾸는 사람들이 제게 하나를 맡겼어요. 버리라고 했는데… 이름이 적힌 종이를 태울 수가 없었어요.” 열쇠에는 ‘야간 배달실’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곳은 밀헤이븐 우체국 건물 뒤편에 붙은 오래된 방이라고 했다. 라베른의 사람들이 제분소에 보관할 수 없는 우편물을 따로 모아 두던 곳이었다. “거기에는 배송되지 않은 편지들이 있습니다. 아무도 수신자가 아닌 편지들이요.” 벤이 시선을 들었다. “제0경로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가장 먼저 숨겨 두었을 곳이군.” 그들은 노동자들을 시장 수용소에 데려다준 뒤 어두워지는 거리를 걸었다. 시장의 가게들이 하나씩 문을 닫았다. 종탑에선 저녁 기도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강 너머 작은 집들에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도시 밑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대부분 몰랐다. 토비는 빈 빵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에 배가 크게 울렸다. 그 소리에 벤이 고개를 돌렸다. “성검도 든 용사가 시장에서 배고프다고 우는 건가?” “울진 않았어요.” “네 배가 울던데.” “그건 제 의사가 아닙니다.” 오스벨은 돈을 내고 남은 빵 네 개를 샀다. 벤은 인간 음식을 먹지 않는다며 거절했다가, 피엘이 빵을 두 개로 나누자 결국 한 조각을 받아 들었다. 그들이 잠시 앉은 곳은 우체국 맞은편 오래된 분수대였다. 우체국 앞 분수대에는 사람들의 작은 소원이 새겨져 있었다. 옛날 이곳을 떠난 가족들이 돌아오길 바라며 동전을 던지는 곳이었다. 피엘은 여느 때처럼 지나칠 뻔하다가 물속에 가라앉은 동전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동전은 소원이 아니라 누군가가 소원을 보냈다는 증거였다. “저렇게 부탁을 많이 하는데 답장이 거의 없네요.” 토비가 빵을 다 먹고 말했다. “신탁은 일부에게만 내려옵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질 수는 없으니까요.” “알아요. 우리 마을도 비가 오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안 올 때가 많거든요. 그런데 안 될 것 같다고 알려 주는 것과 아무 대답도 없는 건 좀 다르죠.” 피엘은 수첩의 민원 처리 메뉴를 열었다. 인간이 보낸 기도와 소원은 그곳에 일부만 등록되어 있었다. 접수 번호가 없는 것들은 신탁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천계 직원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듣지 못하는지 그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업무량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요?” 벤이 되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편지는 백 년이 넘도록 대답을 기다려요. 받기 어려우면 왜 어려운지라도 알려 주면 좋잖아요.” “사람들이 천계를 원망할 텐데요.” “원망해도 괜찮아요. 살아 있는 사람은 화를 내기도 하니까요. 아무 말도 못 하는 사람보다 낫죠.” 피엘은 벤이 뜻밖에도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듯 바라봤다. 악마의 거래소에는 분노와 후회 때문에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턴가 후회해야 할 약속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손님들이 늘었다. 아무것도 잃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사실은 가장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었다. 멀리서 하몬처럼 굶주린 얼굴을 한 노인이 걸어왔다. 남자는 분수대에 낡은 동전 하나를 던졌다. 동전은 물속에 가라앉기 전에 반짝이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 마라가 놀란 표정으로 분수를 바라봤다. “저 동전은 분수 밑에 닿지 않았어요.” 오스벨이 손끝에 작은 마법진을 펼쳤다. 물 위를 따라 희미한 금빛 흔적이 떠올랐다. 동전에서 나온 작은 빛은 우체국 지하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도가 흘러 들어가고 있네.” 피엘은 그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도렌의 열쇠와 같은 문양이 물속에 새겨져 있었다. 수신자 없는 기도를 모으는 장치가 제분소뿐 아니라 도시 곳곳에 있었다는 뜻이었다. 토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동전 던진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안 될까요?” “뭘 빌었는지는 개인적인 일일 텐데요.” 피엘이 말했다. “동전이 어디로 가는지 아시냐고요.” 토비는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노인은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자신의 동전이 우체국 안쪽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듣자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아내한테 전해 달라는 거였네. 십 년 전에 죽었어.” “편지를 보내셨나요?” “아니. 말 한마디를 전하고 싶었지. 살아 있을 때 고맙다는 말을 못 했거든.” 토비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분수대 앞에서 노인과 잠시 함께 서 있었다. 피엘은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천계의 신탁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보내지 못한 말들이 가득했다. 그 말들을 함부로 태울 권한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노인은 돌아서기 전에 조용히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군. 내 아내 이름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아.” 피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분수대가 그 사람의 소원을 가져간 순간, 기억까지 조금 떼어 간 것이었다. 야간 배달실을 찾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피엘은 손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털며 봉투를 다시 들여다봤다. ‘수신자: 아직 태어나지 않음’. 평생 신탁을 나른 천사에게도 처음 보는 형식이었다.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는 행정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신탁은 누군가를 향한 약속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받을 사람이 없다면 왜 쓰였을까요?” 토비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중에 태어날 사람한테 주려고요.” “그럼 배송 예약 신탁으로 등록해야 합니다.” “그런 걸 모르는 사람이 쓴 편지인가 봐요.” 피엘이 말을 멈췄다. 그 단순한 가능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신탁이 천계에서 만들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 천계 밖에서 신탁을 써 넣었다면? 그때 우체국 불 꺼진 창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깜박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벤이 일어섰다. “누군가 우릴 기다리고 있어.” 창문에 작은 글자가 떠올랐다. [야간 배달실은 분실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분실된 사람을 기다립니다.] 피엘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자신이 잃어버린 첫 근무 기억의 빈자리가 아프게 저리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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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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