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원은 서온의 발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그의 발밑에서 이름표를 떼어 내려 했다. 방금 세아가 적어 준 ‘서온이라고 불리길 원함’이라는 글자가 종이에서 천천히 지워졌다. 그 자리에 ‘잠정 발신 책임자’라는 새 직함이 나타났다.
“정중히 사양할게.”
서온은 이름표를 떼어 손에 들었다. 글자가 지워지는 속도가 멈췄다. 검은 원은 잠깐 망설이는 듯하다가 피엘의 발밑으로 이동했다.
[대체 후보: 제7물류국 피엘.]
[과거 운용자 인정 확인.]
“이전에 책임을 인정했다고 해서 최초 발신인이 되는 건 아닙니다.” 피엘이 말했다.
[책임자 미지정 상태 지속 불가.]
[최초 발송 효력 유지에 대리 인가 필요.]
벤이 바닥에 붉은 선을 그었다. “참 편리한 체계군. 첫날엔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고 하네.”
검은 선이 벤에게까지 달려왔다. 벤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나한텐 발신 권한 없어! 악마가 천계 신탁 보냈다고 적으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라고!”
“악마도 겁내는 일이 있네요.” 토비가 말했지만, 웃을 여유는 없었다. 천장에 매달린 발신 종이 마지막으로 흔들렸다. 마르켈은 녹슨 열쇠를 꽉 쥐었다.
“세 번째 종이 울리면 원본 관리실 기록은 재정렬돼요. 그 전에 일단 문을 열어야 합니다.”
“서명 자격이 부족하다면서요.” 세아가 말했다.
“그래도 열쇠를 꽂는 사람은 필요해요. 문이 열리지 않더라도 거부 기록이 남습니다.”
마르켈이 서명을 했다. 피엘이 다른 칸에 서명하려다가 멈췄다. 자격 없음이라고 기록될 것을 알면서도, 규정을 위반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책임 전가의 근거가 되지 않을지 생각해야 했다.
“제 이름을 자격 있는 서명으로 제출하지 않겠습니다.”
토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문을 못 열잖아요.”
“서온의 독립 장부를 근거로 발신 기록의 존재부터 확정하고, 법정에 문 개방 명령을 요청하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가 문을 열 수 있는지 규정에 맞게 판단받는 겁니다.”
“그동안 세 번째 종이 울리면요?”
서온이 장부를 들어 올렸다. “원본이 재정렬돼도 독립 장부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야. 우리가 잃는 건 편의와 속도지, 모든 증거가 아니야.”
토비는 입을 다물었다. 앞서 몇 번이나 성급히 칼을 빼 들었던 사람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만큼은 자신이 문을 부수는 용사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때 온실 문이 열리고 이시아가 나타났다.
여신은 긴 외투 끝을 끌며 걸어왔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은빛 꽃이 피었다가 바로 시들었다. 제8문 법정 이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뒤에는 루셀이 있었다.
“법원에서 원본 관리실 기록에 긴급 보전 명령을 내렸어.” 루셀이 말했다. “다만 문을 열 권한까지 즉시 준 건 아니야. 관련자의 의견을 들어야 하니까.”
이시아가 마르켈을 바라봤다. “나도 증인이 될 수 있겠니?”
마르켈은 눈을 내리깔았다. “여신님께선 첫 발송을 막지 못하셨습니다.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알고 있어.”
“그런데도 참여하시겠다는 겁니까?”
“그래.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확인받는 일에서 빠지고 싶지 않거든.”
이시아는 첫 신탁의 사본을 꺼냈다. 다른 문서들처럼 금빛은 아니었다. 무광의 검은 종이 위에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
‘슬픔을 겪지 않도록 할 것.’
토비가 물었다. “이게 원래 기도문에서 바뀐 거죠?”
“처음 바뀐 문장이야. 그다음에는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로 다시 바뀌었지.”
“누가 바꿨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첫 번째는 당시 구호 담당 부서가. 두 번째는 등록 위원회가. 그리고 나는 두 번째 변경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고도 제8문을 닫는 쪽을 선택했어.”
“왜 닫았나요?”
이시아는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반송을 시작하자 너무 많은 편지가 한꺼번에 돌아왔어. 그걸 그대로 열어 두면 모든 신탁이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지. 그래서 일부 신탁만 손보면서 문은 닫아 둔 거야. 하지만 그 사이에서 고칠 수 있었던 잘못까지 묻혔어.”
루셀이 말을 이었다. “법정은 그 과거 결정을 아직 판결하지 않았네. 현재 필요한 건 자료를 보전하고 책임 범위를 분명히 하는 일이야.”
“제가 사과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겠지.” 이시아가 말했다.
미나가 작은 인형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맞아요. 사과를 꼭 지금 듣고 싶지도 않아요. 먼저 제 이름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려 주세요.”
이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럴게.”
마르켈이 숨을 내쉬었다. “서명이 두 개 필요한 까닭을 이제 알겠습니다. 등록관이 자기 판단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다른 관계자의 동의 또는 법원의 검토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게 귀찮아서 늘 봉인을 택했지만.”
문이 열릴 것 같아지자 대합실에 있던 직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세아는 사람들을 무조건 물리려 하지 않고 누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를 물었다. 오래된 기록을 찾으려는 사람, 발신 종을 멈추라는 사람, 본청의 안전이 걱정된다는 사람. 그들은 같은 문을 바라봤지만 원하는 일이 같지 않았다.
한 직원이 말했다. “원본을 모두 공개하면 발신된 축복의 효력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가족에게 좋은 신탁을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죠?”
피엘은 그 우려를 함부로 무시하지 않았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괄 취소하자는 게 아닙니다. 원본을 검토한 뒤 어떤 기록이 거짓이었는지, 누구에게 확인 기회를 줘야 하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럼 오배송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들은 당장 어떻게 합니까?” 다른 직원이 물었다.
“긴급 피해가 있다면 별도로 보호 조치를 요청해야 합니다. 오늘 원본을 여는 절차는 그 요청을 막지 않아야 합니다.”
벤이 그 말을 듣고 피엘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네 말이 점점 길어지는데?”
“짧게 말하다가 틀린 의미를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천계 사람답군.”
“악마는 어떻게 말합니까?”
“짧고 비싸게.”
토비가 웃으려다 문 쪽을 봤다. 마르켈이 들고 있던 열쇠가 검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손수건으로 열쇠를 감쌌다. 그 순간 이시아가 손을 내밀어 열쇠의 열기를 잠재웠다.
“천계의 문이란 참으로 오래된 두려움 위에 세워진 물건들이구나.” 여신이 말했다.
“여신님도 그 두려움을 아셨겠지요.” 마르켈이 답했다.
“알았지. 그래서 그 두려움 때문에 너희가 침묵할 때 나는 더 많이 물어야 했어.”
이시아는 그를 향해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거기에는 자신이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법정에서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그 일을 피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것뿐이었다.
피엘은 주변을 돌아봤다. 처음 제8문을 열 때만 해도 모두가 거대한 악을 부수면 끝날 거라 생각했던 순간이 있었다. 이제 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문을 부수지 않고 여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루셀은 명령서를 펼쳤다.
[제1문 원본 관리실 개방: 조건부 허가.]
[첫째, 독립 감사관 입회.]
[둘째, 이해관계자의 서명은 증언으로만 사용.]
[셋째, 원본 공개 범위는 수신인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제한.]
“독립 감사관은 누구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문 뒤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종이에 찍힌 잉크처럼 검은 옷을 입은 천사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등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었다.
“라베른.” 벤이 낮게 말했다.
감찰관 라베른은 피엘을 바라보지 않고 루셀에게 인사했다. “제9명령을 감사해야 할 사람으로 지목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자네는 제9명령을 집행하려 했던 사람이기도 하네. 이해관계를 공개하고 감사 대상에서 자신을 제외할 수 있어야 하네.”
라베른은 손등의 구멍을 천천히 세었다. “그렇다면 제가 독립 감사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직접 확인하려고 불렀네.”
피엘은 감사관이 올 때까지 문가에 섰다. 세아가 작은 접수대 위에 네모난 천을 깔아 놓았는데, 그 위에는 방문자 이름이 적힌 돌이 하나씩 놓였다. 토비의 돌에는 흙이 묻어 있었고, 벤의 돌에는 누가 그었는지 모를 작은 악마 뿔이 있었다.
“왜 돌을 써요?” 토비가 물었다.
“나중에 누가 이 방에 들어왔는지 확인하려고요. 종이 명부는 자꾸 바뀌거든요.”
“돌도 바꿀 수 있잖아요.”
“그럼 종이와 돌을 같이 확인하죠.”
토비는 자신이 놓인 돌을 만지다가 장난기가 발동해 뒤집었다. 뒷면에는 보리 이삭이 그려져 있었다. 누가 그렸는지 묻자 세아는 자기가 그렸다고 했다.
“이름을 적을 때마다 같은 그림을 그리면 바꿔치기한 돌을 나중에 구별할 수 있거든요.”
벤이 혀를 찼다. “우리 마계에서 저런 장부 관리인을 구하기는 힘들겠어.”
“일은 많이 시키면서 돈은 적게 줄 거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정답이라 반박할 수 없군.”
잠깐 웃음이 돌았다. 그 웃음이 사라졌을 때도 네모난 천 위에는 돌들이 남아 있었다. 이곳에 누가 들어왔는지를 적는 평범한 절차가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마르켈이 놀란 얼굴로 루셀을 봤다. 루셀은 피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감사는 자격 있는 중립 인력이 맡고, 자네는 참고인으로 들어오게. 그동안 기록을 끝까지 읽겠다고 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었으니까.”
잠시 뒤 녹슨 열쇠가 처음으로 돌아갔다. 문이 열리자 열두 개의 빈 의자가 나타났다. 의자마다 이름표가 있었지만 글자는 검은 밀랍으로 덮여 있었다.
중앙 책상 위에는 단 한 줄의 원본 기록이 떠 있었다.
[등록번호 0000의 발신 서명 검증 결과.]
[열두 개의 흔적이 있으나 최종 승인 서명은 하나.]
피엘은 다음 줄을 읽고 숨을 멈췄다.
[최종 승인자: 현재 조사 대상자 중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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