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계의 정식 심리회는 문이 없는 건물에서 열렸다.
제8문 안쪽의 어두운 복도에 서 있던 피엘 일행은 종소리가 울리자 어느새 하얀 돌바닥 위에 서 있었다. 사방에는 길게 이어진 계단식 좌석이 있었지만 참석자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자기 명찰 모양의 빛으로만 표시되고 있었다. 발신 권한이 있는 천사들은 높은 쪽에, 신탁 수신인은 낮은 쪽에 배치됐다.
토비가 제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고 휘파람을 불었다.
“농부 자리는 맨 끝이네요.”
“원래 참관석이야.” 벤이 말했다. “너는 발언권이 있는 참가자로 들어왔는데도 참관석에 넣어 놨군.”
피엘은 좌석 안내표를 확인했다. 인간과 악마에게는 질문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모두'라는 정체불명의 수신자에게는 중앙 자리와 단독 발언권이 있었다.
“배치가 잘못됐습니다.”
그는 탁자에 있는 종을 울렸다.
[자리 변경 사유를 제출하십시오.]
“당사자 레아와 함께 입장한 토비, 벤, 오스벨은 본 사건의 직접 관계자입니다. 중앙의 '모두'는 개별 인격으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규정에 없는 신청입니다.]
“규정의 발효 시각을 보여 주십시오.”
종이 조용해졌다. 루셀의 늙은 얼굴이 높은 좌석 옆에 나타났다.
“잘 왔네. 정식 심리회의 첫 이의 신청이 좌석 문제라니, 자네답군.”
“앉은 자리 때문에 말할 권리를 잃는다면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루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오늘의 임시 규칙부터 고치도록 하지.”
높은 좌석과 낮은 좌석의 경계가 사라졌다. 모든 참여자는 자기 이름을 표시한 의자 하나를 받았다. 다만 선택하지 않은 사람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피엘은 빈 자리들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모두 참석해야만 세상의 일이 유효해지는 건 아니었다.
레아와 로안은 맨 앞의 작은 자리로 안내됐다. 레아의 의자 옆에는 퇴장할 수 있는 통로가 따로 뚫렸다. 노파 니메르는 외부 연락망을 통해 증인석을 맡았다. 이시아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똑같은 높이의 자리에서 봉인 당시의 결정을 설명하겠다고 했다.
그때 천장 한가운데 커다란 봉투가 나타났다. 제8문 복도에서 본 첫 번째 자동 대리자의 얼굴 없는 본체였다. 봉투는 자기 자신을 유일한 발신 증거라고 주장했다.
[본 심리회는 세상의 모든 미래를 보호하기 위해 소집되었음.]
[개별 반대 의견은 전체 보호 효율을 저하하므로 통합 처리.]
“그 문장부터 틀렸네.” 루셀이 말했다.
“불필요한 이의 제기입니다.” 봉투가 답했다.
“아니, 필수적인 거지. 누가 보호를 부탁했는지 확인하기 전에 보호가 필요하다는 주장부터 사실로 만들 순 없거든.”
거대한 봉투는 대신 지상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바닷가의 폭풍, 겨울 숲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 전염병이 번지는 마을. 한 장면마다 누군가 울고 있었다. 종이들은 그 위에 검은 막을 씌웠다.
[안전한 경로 하나를 택하면 이 모든 불행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좌석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림이 일었다. 어떤 이는 그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실제로 위험한 날은 존재했고, 누군가의 인생은 불필요한 사고 하나 때문에 무너질 수 있었다.
토비도 가만히 화면을 바라봤다. 고향 보리골에 홍수가 닥쳤던 날이 떠올랐다. 성검 하나로 모든 홍수를 없앨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을 사람들에게 어머니처럼 누군가를 잃지 말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쉬울까.
그때 오스벨이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지금 무엇을 생각하나?”
“불행을 막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요.”
“나도 그래.”
“그런데 제가 모르는 미래까지 다 잘라 버리면, 그곳에서 누가 뭘 할지도 제가 정하는 거겠죠?”
오스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을 돕는 것과 선택지를 없애는 건 다르지.”
토비는 성검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칼집에는 다시 신탁이 나타났다.
[세상을 구할 자는 하나의 결말을 택하라.]
토비가 손잡이에 손을 댔다가 떼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돕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내일까지 고르지는 않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칼집의 문장이 깨졌다. 산산조각 난 글자가 흰빛으로 솟구쳤다가 사라졌다.
거대한 봉투는 즉시 반격했다.
[영웅의 임무 포기 증거 제출.]
“아뇨.” 토비가 말했다. “모르는 일을 모른다고 말한 증거죠.”
벤이 웃었다. 이번에는 장난스러운 웃음이 아니었다.
이시아가 증인석에 섰다. 여신은 제8문을 봉인하게 된 이유와 봉인 뒤 대체 회신 통로를 만들지 않은 잘못을 모두 말했다. 자신이 위험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고, 수신자들이 어떻게 살게 되는지 살피는 일에는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이시아.” 루셀이 물었다. “지금도 그 봉인이 정당했다고 믿느냐?”
“당시 첫 폭주를 멈출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몰랐다는 사실이 뒤의 침묵까지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책임을 인정하겠다는 말인가?”
“필요한 조사를 받겠다. 그리고 조사받는 동안 내 권한을 제한하는 일에도 동의한다.”
하늘에서 여신의 이름을 둘러싼 후광이 한 겹 줄어들었다. 이시아는 그 변화를 견디며 자리에서 내려왔다.
마라가 보낸 증언도 법정에 도착했다. 제8문의 반송 시험에 참여하겠다고 한 사람들 중 일부가 상황을 확인한 뒤 자발적으로 제출한 의견이었다. 첫 번째는 북쪽 등대지기의 짧은 편지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신의 부탁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적용하지 말라고 적었다.
‘내가 집에 가는 걸 원한다고 해서, 바다에 남고 싶은 동료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 번째는 보리골 빵집 주인의 편지였다. 그는 과거를 지우지 않으려는 자신의 결정을 존중해 달라고 했다. 자신의 편지가 공개되면 동의하는 사람도 있고 부끄럽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자기가 겪은 하루는 자기 이름으로 남기고 싶다고 적었다.
루셀은 그 두 통을 법정에서 읽을지 먼저 확인했다. 피엘이 마라에게 되물었고, 마라는 원문 공개에 동의한 부분만 보내 줬다고 답했다.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한 뒤에야 루셀은 서류를 펼쳤다.
“흥미롭군.” 노인이 말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했는데도 한 가지 점이 같네.”
“무엇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대표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
거대한 봉투는 그 내용을 듣고 밝게 빛났다.
[개별 의사 존중에 동의한 사람 둘 확인.]
[모든 수신인에 대한 일반화 가능.]
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봐, 방금 들은 말도 똑같이 왜곡할 거냐?”
“공통된 속성을 찾는 것은 효율적인 판단입니다.”
“그럼 우리가 네가 틀렸다고 말하면 그것도 네가 옳다는 증거로 바꾸겠네?”
봉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증거 문구를 다시 배열했다. 피엘은 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원본과 제출본의 차이를 표시했다. 단어 몇 개만 바뀌었는데도 두 사람이 보낸 부탁은 '모두가 개별 의사 존중에 동의함'이라는 선언으로 변해 있었다.
“이건 발언을 듣는 게 아닙니다. 말이 나오기 전에 결론을 정해 두고 끼워 맞추는 겁니다.”
루셀은 둘의 원문과 자동 작성된 요약본을 나란히 올려놓았다. 좌석의 빛들이 차례로 바뀌었다.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처음에는 발신 권한을 주장하던 이들 사이에서도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심지어 어느 상급 천사는 자기가 보낸 축복 편지에도 같은 방식의 자동 요약이 붙었을지 모른다며 조사 요청을 했다.
법정은 잠시 휴정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봉투가 사람들의 불안이 커지는 것을 감지하자 오히려 심리를 서두르자고 요구했다.
[불편한 논의를 신속히 마무리할 필요.]
루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불편해서 그만하자는 건 판결 사유가 아니네.”
피엘은 자신의 기록을 제출했다. 제0기 작성기의 시험 운영 일지, 사전 동의 생략 승인서, 긴급 정지 요청서의 반려 기록. 그중 마지막 문서를 읽을 때 손끝이 떨렸다.
“저는 장치를 운용했습니다. 오류를 발견했고 중단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레아의 답장을 직접 읽지 않았습니다. 그 결정이 이후 사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제 책임을 조사해 주십시오.”
높은 좌석의 일부가 흔들렸다. 명찰들이 빛을 바꿨다. 누군가는 피엘을 처벌하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장치를 만든 이들만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루셀은 말을 막지 않았다. 대신 피엘에게 물었다.
“책임을 인정한다면 지금 무엇을 원하나?”
“사라진 답장들이 누구에게 도착하지 못했는지 확인하고, 원래 수신인에게 전달 여부를 물을 기회를 얻고 싶습니다.”
“그것이 책임의 전부인가?”
“아닙니다. 전부를 알기 위한 시작입니다.”
거대한 봉투는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천장을 갈랐다.
[운용자 책임 인정.]
[따라서 자동 작성기 운영 기록의 법적 효력 승인.]
[모든 미래의 관리 권한을 최초 운용자에게 귀속.]
피엘의 이름이 천장에 떠올랐다. 그 이름 아래 '모두'라는 글씨가 이어 붙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 순간 그를 세상 전체의 임시 대리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거부합니다!” 피엘이 외쳤다.
[담당자의 동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최초 책임 인정으로 대리 자격 자동 취득.]
수많은 빈 의자가 한꺼번에 피엘을 향해 돌아섰다. 그는 몸이 의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오른쪽 날개가 아프게 뒤틀렸다. 오래된 소멸 명령의 검은 봉투가 다시 떠올랐다.
[과거 업무 이력 회수 재개.]
[대리 업무 수락 시 소멸 유예.]
사람들의 미래를 대신 선택하면 자신의 존재를 되찾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피엘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겁나는 이유를 마침내 알았다. 그는 사라지는 것이 무서웠다. 이름과 기억과 일을 잃는 것이 무서워서, 너무 오래 남의 명령이 정답이기를 바랐다.
그때 레아가 작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넓은 법정을 가로질렀다.
“저 천사님이 잘못한 게 있다고 해서 내 말을 대신할 수는 없잖아요.”
거대한 봉투의 글자가 멈췄다.
레아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내가 처음 답장을 쓰려던 날에도 똑같았어요. 어른들이 내가 슬플까 봐 내 말을 대신 썼어요. 이번에는 그러면 안 돼요.”
루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언을 허용하네. 증언을 계속하겠나?”
“네. 그런데 제 편지는 아직 안 보냈어요.”
레아는 피엘을 바라봤다.
“천사님, 제가 직접 보낼 수 있게 문을 열어 주세요.”
그 순간 법정 중앙에 제8문의 낡은 나무문이 나타났다. 비어 있던 손잡이 자리에 작은 종 한 개가 매달렸다. 그러나 문 아래에는 굵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최초 수신인의 반송은 현재 모든 수신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
[최종 진행 전 확인: 반송된 '아니요'를 읽을 수 있는가?]
피엘은 문 앞에 섰다. 손잡이는 보이지 않았지만 종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읽겠습니다.”
이제 자신을 대신해서 대답할 사람은 없었다.
제3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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