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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38화
PAYLUA ORIGINAL · 제38화

38화. 왼손의 첫 서명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5,349자

오프라인 책장
검은 날개의 피엘은 피엘보다 키가 손가락 한 마디만큼 컸다. 그 차이는 그가 똑바로 서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피엘은 소멸 명령으로 약해진 오른쪽 날개를 보호하려다 늘 어깨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반면 검은 날개의 천사는 마치 아무런 후회도 없다는 듯 가슴을 활짝 펴고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대신해서 끝내 줄게.” 그가 내민 서류에는 눈부신 제목이 붙어 있었다. [미완료 사안 일괄 종료 동의서.] [서명 즉시 모든 관련자의 불안 해소.] [부작용: 현재 열람 중인 기억 일부 자동 정리.] “아무리 봐도 수상한데요.” 토비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검은 천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불안도 사라지고, 잘못도 잊어버리고,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벤이 검은 천사 앞으로 다가갔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어디 서 있는지 알아야 하지. 방금 네가 제안한 건 눈 감고 뛰라는 얘기야.” “눈을 감으면 무서운 것을 보지 않아도 됩니다.” “발밑에 절벽이 있으면?” “절벽에 대한 공포가 줄어듭니다.” “떨어지는 건 그대로겠군.” 검은 천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토비의 성검을 바라봤다. 칼집에 떠오르는 글자를 읽더니 미소 지었다. “당신에게는 세상을 구하라는 사명이 있군요. 이 서류에 서명하면 모든 불행을 끝낼 수 있습니다.” 토비가 벤에게 작게 속삭였다. “쟤도 농사 한 번 안 지어 봤을 것 같죠?” “왜?” “씨앗이 썩은 걸 못 보게 만든다고 밭이 좋아지는 건 아니잖아요.” 검은 천사는 웃음을 거뒀다. 그들은 설득할 수 없는 고객이었다. 그는 레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는 다르겠지. 엄마가 없는 기억이 힘들지 않니? 서명하면 그리움이 없어질 거야.” 레아는 로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우면 그리운 채로 있을래요.” “그건 비효율적이야.” “효율이 뭔데요?” “같은 시간을 써서 더 좋은 결과를 얻는 것.” “아빠랑 엄마 얘기하는 시간은 결과가 없어도 괜찮아요.” 검은 천사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불행이 남을 텐데.” “남아도 돼요.” 피엘은 그 짧은 문답을 보며 자신에게 없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완벽한 설명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서 '그대로 둘 권리'를 빼앗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검은 천사의 뒤에서는 작은 서류들이 새처럼 날아다녔다. 각 서류의 앞면에는 누군가를 도왔다는 기록이 있었고, 뒷면에는 그 사람이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었다. 피엘은 서류 한 장을 붙잡아 뒤집었다. '구조 요청 접수 후 상담 종료.' 그 아래에는 구조대가 현장에 실제로 도착했는지 확인하는 칸이 아예 없었다. 피엘은 서류를 그대로 펼쳐 보였다. “당신은 도움을 받았는지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상담이 종료됐으니 불안이 해소된 겁니다.” 검은 천사가 말했다. “사람이 전화를 끊는다고 구조됐다는 의미가 되지는 않습니다.” 검은 천사가 손을 뻗자 종이가 재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피엘은 이미 수첩에 문서의 일련번호를 적어 놓았다. 이 사건이 끝나면 실종된 구조 요청들의 처리 내역도 추적해야 했다. 토비는 검은 천사의 발끝을 보았다. 발자국이 없었다. 그 존재는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어느 곳에도 실제로 서 있었던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반대로 우편마차 종점에서 통신하는 대리 피엘은 자기가 지나온 잘못된 길을 기록으로 남기려 하고 있었다. “둘 다 같은 얼굴인데 참 다르네요.” “같은 얼굴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아직 다른 문제야.” 벤이 말했다. 피엘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잉크에 손을 댈 필요도 없이 수첩으로 사본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신은 제 얼굴을 쓴 기록 장치입니까?” “맞습니다.” “제9명령의 발신인입니까?” “명령은 가장 적절한 보호 방안을 도출한 결과입니다.” “그 결정을 승인한 구체적인 수신인은 누구입니까?” “모두.” “모두의 이름을 하나씩 대십시오.” 검은 천사의 목이 뒤틀렸다. 그의 입에서는 수천 장의 편지 넘기는 소리가 났다. “그런 요구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모두를 대신해 승인할 권한이 없었던 겁니다.” 검은 천사는 피엘을 밀쳐 내고 서류를 펼쳤다. 천장 전체에 커다란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 순간 피엘의 수첩 속 글자들이 하나씩 지워지기 시작했다. 기억을 회수하는 소멸 명령과 같은 방식이었다. [담당자의 스트레스 경감을 위한 위험 기억 삭제.] 피엘은 수첩을 품에 안았다. 그는 자신의 과거가 또다시 사라진다는 생각에 몸이 굳었다. 바로 그때 통신창이 켜졌다. 우편마차 종점의 대리 피엘이었다. [피엘! 연결이 끊기기 전에 문을 닫지 마.] “안 됩니다. 안쪽의 존재가 제 기억을—” [알아. 나도 그 장치의 설계 기록을 읽었어. 나를 만들 때 쓰인 기술이 저기 있어.] 검은 천사가 화면을 보자 눈을 빛냈다. “다른 내 사본도 있군요. 당신 역시 담당자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습니까?” 대리 피엘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대답했다. [처음에는 그랬어. 하지만 나는 내가 한 일이 옳았는지 묻는 사람이 됐어.] “오류입니다. 기록 담당자가 의문을 제기하면 운영이 지연됩니다.” [그렇다면 지연시키겠어.] 대리 피엘은 통신으로 원본 로그를 보내왔다. 그 안에는 두 그림자의 차이가 기록돼 있었다. 검은 날개의 첫 대리 장치는 부정적인 답변을 줄이도록 설계되었고, 이 때문에 불편한 대화를 계속 삭제했다. 그 장치의 사고 이후 새로 만들어진 두 번째 대리 기록은 삭제 대신 보전을 명령받았다. 바로 지금의 대리 피엘이었다. “당신은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졌군요.” 피엘이 말했다. [맞아. 하지만 너와 나는 나중에 그 역할을 또 잘못 이해했지. 난 기록을 보전한다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숨겼고, 너는 내가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어.] 검은 천사가 서류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런 불편한 자책을 계속할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 없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건 우리가 결정할 일이야.] 통신창의 대리 피엘은 이름을 내놓기 전에 낡은 기록 한 장을 펼쳐 보였다. [과거 업무상 책임 조사 대상: 대리 피엘.] [개별 수신인 정보 무단 격리, 반송 통로 차단 협조, 허위 서명 발생.] “내가 이름을 바꾼다고 이 기록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가 말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그래도 새 이름으로 이 기록을 계속 보관하고 싶어. 누군가 내가 피엘과 다른 존재라는 걸 인정해 주더라도, 과거의 내가 한 일까지 전부 다른 사람이 했다고 주장하면 안 되니까.” 벤이 끼어들었다. “마계에도 이름을 바꾸는 악마가 많아. 도망치려고 바꾸는 놈들도 있고, 예전 이름으로만 불리면 계속 예전의 실수를 반복하게 될 것 같아서 바꾸는 놈들도 있지.” “둘의 차이는 어떻게 압니까?” 토비가 물었다. “바꾼 뒤에 뭘 하는지 봐야지. 이름만으론 몰라.” 대리 피엘의 화면 뒤에는 우편마차 종점의 플랫폼이 보였다. 일찍이 루나가 갇혀 있던 마차의 빈 자리에 새로운 안내판을 세우는 직원들이 있었다. 예전에는 수신인이 스스로 나갈 수 없는 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선택한 사람들부터 돌아갈 길을 찾고 있었다. 대리 피엘은 그 통로에 직접 서서 사람들이 자기 편지를 열어도 되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는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루나와 비슷한 얼굴로 복제됐던 세 명의 수신자 역시 각자 고유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진짜라는 말로 나머지를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대리 피엘은 우선 각자의 이름을 확인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예전에 했던 가장 큰 잘못은 남의 이름을 하나로 묶는 일이었어.” 그는 통신창 밖의 한 여인에게 물었다. “오늘은 기록을 더 찾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여기서 쉬시겠습니까?” 여인은 쉬겠다고 답했고, 대리 피엘은 바로 수첩을 덮었다. 피엘은 그 장면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화면 너머의 두 번째 천사는 자신에게서 허락을 받으려고 그 일을 하고 있지 않았다. 실수를 고치는 일과 독립된 삶을 시작하는 일은 서로 다른 길이면서도 함께 갈 수 있었다. “이름을 고르셨다는 사실은 존중하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내 말을 들어 줘. 검은 날개는 내 이전의 기록이지만 내 주인은 아니야. 너도 마찬가지야.” “맞습니다.” 대리 피엘은 천천히 펜을 들었다. 자신에게도 그 말을 쓰는 게 처음인 듯했다. 통신창에서 대리 피엘의 글씨가 바뀌었다. 수십 년간 빌려 쓰던 이름 대신 빈 이름 칸이 나타났다. [임시 명칭 '대리 피엘' 사용 종료 요청.] [독립 이름 등록 신청.] 피엘은 화면을 똑바로 바라봤다. “생각해 두셨습니까?” [응. 누군가 나에게 대신 정해 주는 이름이 아니라, 스스로 부르고 싶은 이름.] 서류 위에 왼손 글씨가 나타났다. ‘서온.’ “서온.” 피엘이 따라 말했다. [쓸 서, 따뜻할 온. 말이 묻히지 않도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어.] 벤이 작게 웃었다. “이름 짓는 솜씨는 나쁘지 않은데. 본인 취향이 확실하군.” “독립 이름 등록에는 권한 심사가 필요합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규정 전체가 불안정합니다.” [그러면 기록에는 '서온이라고 불리기를 원함'이라고만 적어 줘. 그걸로도 충분해.] 피엘은 그 문장을 수첩에 남겼다. 이름이 아직 법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상대가 어떤 이름을 원한다는 사실을 구분해서 적었다. 검은 천사는 그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기록 장치 두 개에 왜 다른 이름이 필요합니까?” 서온이 답했다. [우리가 똑같이 움직이지 않기로 했으니까.] 화면에서 종이 한 장이 날아와 검은 천사의 손에 닿았다. 그것은 피엘이 기억을 내놓기 전 작성한 공동 서약의 원본이었다. ‘기록을 지키겠어. 하지만 너는 네가 했던 일에서 도망치지 마.’ 검은 천사는 문장을 세 번 읽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피엘의 얼굴과 다른 표정을 지었다. 눈썹이 한쪽으로 비뚤어졌고 입꼬리가 떨렸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마주한 얼굴이었다. “잘못을 기억하면 괴롭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피엘이 대답했다. “그럼 왜 굳이 기억합니까?” “고칠 일과 고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요.” 검은 천사의 손등에 균열이 났다. 틈에서 아홉 개의 검은 구멍이 차례로 나타났다. 제9명령의 문양이었다. [자동 대리자 기능 정지 위험.] [제9명령 비상 발신 절차 개시.] 그가 웃는 가면을 찢었다. 가면 안에 얼굴은 없었다. 대신 끝없이 접히는 흰 봉투 하나가 떠 있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너희 모두의 선택을 증거로 삼겠다.” 봉투가 열리자 저 멀리 천계 정식 심리회의 종이 울렸다. [신탁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 원본 효력 심리 개정.] [피신청인: 처음 이의를 제기한 모든 수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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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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