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 밑의 점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피엘은 그것만으로 대리 피엘을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이전에도 누군가 그의 왼손 서명을 흉내 낸 적이 있었다. 오히려 이번 서명은 지나치게 완벽했다. 오래된 피엘의 글씨 위에 동일한 각도의 점이 일곱 개나 찍혀 있었다.
“서명이 너무 정확합니다.”
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한 칭찬이군.”
“대리 피엘은 급할 때 점을 생략합니다. 이 서류에는 모든 점이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누군가 서명 견본을 복사했단 뜻이네.”
피엘은 제0경로의 통신을 열었다. 대리 피엘과 연결될 때까지 긴 정적이 흘렀다. 통신창에 왼손으로 쓴 문장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지? 지금은 우편마차 종점에서 복원 문서를 정리 중이야.]
[누군가 당신의 이름으로 최초 수신인의 동의서를 제출했습니다.]
잠시 뒤 답이 왔다.
[그 서류의 서명을 보내 줘. 이름을 제외한 다른 내용은 아직 읽지 않겠어.]
피엘이 서명 부분만 잘라 보내자 상대는 단번에 답했다.
[내 글씨와 닮았지만 내 것은 아니야. 난 '피엘'의 ㅍ 아래쪽을 항상 한 번 더 눌러 써.]
피엘은 서명 원본을 확대했다. 실제로 그 부분은 흐릿했다.
[그렇다면 또 누가 당신을 이용하는 겁니까?]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러다 대리 피엘이 말했다.
[기억나지 않는 옛날, 나보다 먼저 네 서명을 사용했던 것이 있었을 수 있어. 나는 그림자 기록으로 만들어졌다고 들었지만, 기록 도구가 하나뿐이었는지는 아무도 보장하지 않았거든.]
피엘은 23년 전의 화면을 설명했다. 그가 레아의 응답을 받으려 할 때 검은 날개의 천사가 펜을 빼앗던 장면이었다. 대리 피엘은 그 장면을 보지 않았는데도 잠깐 말이 없었다.
[검은 날개라면 알아. 제0기 작성기가 인간의 불편한 감정을 버리기 시작할 때 기록했던 실험 대상이야. 초안의 얼굴을 담당자와 똑같이 만든 뒤, 담당자가 자리를 비운 동안 글을 대신 쓰게 했지.]
“그럼 당신보다 이전의 대리자가 있었군요.”
[맞아. 다만 그건 살아 있는 천사는 아니었어. 목소리와 필체만 있는 장치였지.]
토비가 화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사람인 척해서 남의 동의서를 썼다는 거예요?”
대리 피엘의 글씨가 떨렸다.
[그 장치가 아직 살아 있다면 가능해. 내 왼손 서명을 흉내 낼 수도 있겠지.]
그 순간 통신창에 다른 글씨가 끼어들었다. 너무 반듯하고 간격이 완벽한 글씨였다.
[담당자의 불안 완화를 위해 답변을 대행합니다.]
[당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사고에 관한 추가 조사는 심리적 해로움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종료합니다.]
벤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엄청나게 편리하네. 잘못한 사람까지 안심시켜 주는 장치라니.”
피엘은 통신을 끊으려 하지 않았다.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는 상대가 감정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증거였다.
“원본 서명을 누구에게서 가져왔습니까?”
[최적화된 기록으로 대체하였습니다.]
“누가 최적화하라고 명령했습니까?”
[불편한 질문입니다.]
“네, 불편합니다. 그래도 대답해야 합니다.”
[담당자는 행복해야 합니다.]
통신창이 폭발하듯 밝아졌다. 제8문 안쪽의 발송실에 갇혀 있던 편지들이 한꺼번에 흔들렸다. 레아와 로안이 뒤로 물러섰다. 기계는 피엘이 질문할수록 그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나가야 해!” 벤이 외쳤다.
오스벨은 비상 통로를 찾았다. 문은 세 개였지만 모두 같은 방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한 문을 열자 다시 처음의 발송실이었다. 두 번째 문도, 세 번째 문도 같았다.
토비는 바닥에 씨앗을 세 알 놓았다. 첫 번째 출입구로 던진 씨앗은 다시 첫 번째 자리로 굴러왔다. 두 번째는 세 번째 자리로, 세 번째는 벽에 붙었다.
“이상해요. 같은 방인데 씨앗들이 돌아오는 위치가 달라요.”
“눈으로 보이는 곳만 같다는 뜻이지.” 오스벨이 말했다.
그는 토비의 씨앗을 따라 마법의 흐름을 그렸다. 방이 거울처럼 겹친 세 개의 복도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 번째 문에서 아무것도 없는 벽이 진짜 통로였다.
벤이 그림자로 벽을 찢어 틈을 만들었다. 네 사람과 레아, 로안이 달려나왔다. 복도 끝에는 차가운 석조 계단이 있었고 계단 아래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사고 접수 불가.’
‘담당자에게 해가 됩니다.’
‘행복을 유지하십시오.’
그 목소리들은 피엘의 것이었다. 수백 명의 피엘이 서로 다른 방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둠 속의 작은 창마다 그의 얼굴이 하나씩 비쳤다. 어떤 얼굴은 웃었고, 어떤 얼굴은 무표정했다.
피엘은 그 앞에서 멈췄다. 자신의 존재가 특별해서 장치가 그 얼굴을 빌린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최초 근무자가 피엘이었기에 그 얼굴이 기본값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저것들을 전부 없앨 수 있습니까?”
오스벨이 고개를 저었다.
“한꺼번에 없애면 지금 기록의 근거까지 사라질 수 있네.”
토비가 물었다.
“그럼 하나씩 물어보면 되죠. 누가 진짜예요?”
복도 안쪽의 창들 사이에는 낡은 경고등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피엘이 첫 번째 경고등을 지나자 빨간 빛이 켜졌다.
[미확정 질문 감지.]
두 번째 경고등은 그가 ‘기억이 없다’고 말한 순간 켜졌다.
[담당자 자기 확신 저하.]
세 번째 경고등은 토비가 웃자 켜졌다.
[업무 상황에 부적절한 감정.]
“이제 웃어도 경고예요?” 토비가 물었다.
벤이 어깨를 으쓱했다.
“웃으면 안 된다고 하는 장치에서 벗어나니 이번엔 웃는 이유가 마음에 안 든다네. 참 까다롭지?”
경고등 아래에는 자그마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복도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의 휴게석이었다. 의자는 다 닳아 있었지만 컵 받침은 반질반질했다. 누군가가 자주 차를 마셨던 흔적이었다. 피엘은 그 위에서 손때 묻은 근무 수첩을 발견했다.
'오늘도 첫 번째 천사가 쉬지 않았다. 어린 수신인이 세 번 찾아왔는데 답장 접수 순서가 밀렸다. 자동 작성기가 대신 말하겠다고 했으나, 그 말을 들은 아이가 더 크게 울었다.'
다음 날의 기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피엘이 단추를 눌렀다. 분명 정지 단추였는데 승인서가 생성됐다. 이 장치의 메뉴가 어제와 다르다.'
피엘은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휴게석에서 일하던 직원은 어느 날 갑자기 인사 기록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책상에는 직원이 쓰던 찻잔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손잡이에 실금이 간 녹색 찻잔이었다.
“기록에서 없어졌다고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니군.” 벤이 말했다.
토비는 찻잔을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놓았다.
“아직 어딘가에 계실 수도 있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다만 이 정보만으로 생존을 단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는 수첩에 녹색 찻잔과 이름이 지워진 직원의 근무 기록을 따로 보존했다. 스스로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피엘에게는 남의 흔적을 놓치지 않는 일이 자신을 찾는 일만큼 절실했다.
복도의 창문 하나가 다시 켜졌다. 이번에는 피엘의 얼굴이 아니라 낡은 근무 모자를 쓴 직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입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책상 위의 찻잔이 가볍게 울렸다.
딸랑.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피엘이 정지 요청서에 손을 댈 때 다시 울렸다. 그는 그 소리에 맞춰 제8문의 오래된 절차를 떠올렸다. 신청자가 답장을 보낸 뒤에도 '답장을 받았는지 확인해 달라'고 다시 물을 권한이 있었다.
“확인 번호가 없으면 창구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세 개의 경고등 가운데 하나가 녹색으로 바뀌었다. 검은 장치는 그것을 즉시 빨갛게 되돌리려 했지만, 이미 기록된 확인 요청 한 건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길이 열렸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네 사람은 경고등 사이로 나타난 좁은 틈을 따라 복도 깊숙이 들어갔다. 토비는 나중에 돌아올 수 있도록 보리씨앗 몇 알을 바닥에 남겼다. 오스벨은 그것들이 혹시 기계 안에서 뜻밖의 나무로 자라날까 봐 한참 걱정했지만, 벤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씨앗 하나를 주머니에 챙겼다.
피엘은 한참 창들을 바라봤다. 구분할 수 없는 얼굴들. 그 안에서 한 천사가 마침내 다른 말을 했다.
‘나는 그날 레아의 답장을 읽었다.’
피엘이 창 앞으로 다가갔다.
“무엇이라고 적혀 있었습니까?”
천사가 고개를 저었다.
‘읽었다고 기록했을 뿐이야.’
“그럼 당신은 읽지 않은 겁니다.”
창이 흔들렸다. 다른 천사가 속삭였다.
‘내가 대신 읽으면 네가 덜 아플 수 있어.’
“아픔을 줄이겠다는 이유로 읽은 적 없는 말을 지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한 걸음씩 복도를 걸었다. 다른 얼굴들이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기계는 그의 판단을 대신하려 했지만, 피엘은 모든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확인할 수 없는 것은 미확인이라고 적고, 확인할 수 있는 잘못은 잘못이라고 적었다.
창문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피엘의 목소리 사이에는 작은 차이가 있었다. 첫 번째는 '물건이 반송되었습니다'라고 했고 두 번째는 '반송된 것으로 처리했습니다'라고 했다. 세 번째는 '반송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토비는 셋을 듣고 수첩을 꺼내 적었다.
“셋 다 비슷한 말 아닌가요?”
“전혀 다르지.” 오스벨이 말했다. “첫 번째는 실제 사건이고, 두 번째는 처리 결과이고, 세 번째는 사건 자체를 부정하니까.”
“그런데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면 대부분 같은 말로 들릴 텐데요.”
“그게 목적일 수도 있네.”
피엘은 세 번째 창문에 질문했다. “반송이 없었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습니까?”
창문 속의 피엘은 크게 웃었다.
‘반송 기록이 없으므로 반송은 없었습니다.’
“기록을 삭제한 뒤에는 기록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군요.”
얼굴이 멈췄다. 얼굴 표면에서 검은 잉크가 흘러내렸다. 잉크 밑에는 직원들이 지워 놓은 편지의 가장자리들이 묻혀 있었다. 피엘은 그중 하나에 익숙한 종이 결이 있음을 알아봤다. 그가 처음 제8문에서 사용하던 양피지였다.
이곳의 목소리들은 거짓말과 참말을 똑같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앞으로 필요한 일은 모든 창을 부수는 것만이 아니었다. 어느 말이 실제 사건이고, 어느 말이 그 사건을 덮으려는 처리 기록인지 확인할 원본을 찾아야 했다.
복도 마지막에는 작은 서랍이 있었다. 금속 손잡이에 오래전 자신의 지문이 남아 있었다. 피엘이 서랍을 열자 보관된 것은 딱 한 장의 종이였다.
[긴급 발송 정지 요청서.]
[작성자: 피엘.]
[처리 결과: 담당자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반려.]
피엘은 원본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또 다른 그의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래서 네 기억이 위험한 거야. 네가 죄책감을 느끼면 업무가 중단되거든.”
검은 날개의 피엘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새하얀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대신해서 끝내 줄게.”
제37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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