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해나 앞서 있었다고요?”
토비는 숫자를 두 번 셌다. 계산은 오스벨보다 느렸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일에는 빠르게 반응했다.
“대리 피엘이 태어나기도 전에 대리 피엘이 여기 있었다는 얘기잖아요.”
“외모가 같다고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지.” 오스벨이 말했다.
벤은 기록 화면에 남은 그림자를 확대했다. 두 번째 천사는 왼손으로 펜을 받았지만 날개 끝의 색이 달랐다. 대리 피엘은 은빛이었고 화면 속 천사는 먹물을 칠한 것처럼 검었다.
“위조된 몸일 수도 있어. 빈 발신인은 누구의 목소든 빌릴 수 있잖아. 얼굴이라고 못 빌릴까.”
피엘은 그 판단을 유보했다. 근거 없는 확신으로 누군가를 범인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는 기록 옆에 두 가지 가능성을 나란히 적었다. '대리 피엘의 원형 기록'과 '타인의 외형을 사용한 위조'. 어느 쪽도 확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더 큰 문제는 열려 있었다. 자동 작성기는 멈췄지만 제9명령의 근거가 된 '모두의 동의'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장치가 수십 년 동안 모아 온 미표현 감정의 총합이었다. 법정은 그것을 하나의 수신인으로 취급할 수 있었고, 빈 발신인은 그 명목으로 어떤 신탁도 만들 수 있었다.
오스벨은 수신자 목록이 왜 위험한지 직접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는 화면에 같은 날짜의 신탁 두 건을 불러왔다. 하나는 비가 오지 않아 우물물이 줄어들던 평원의 농부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비에 무너진 고개 아래에서 집을 다시 짓던 석공에게 보내진 것이었다.
첫 번째 편지의 신청인은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 두 번째 편지의 신청인은 적어도 사흘간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누구도 잘못된 소원을 빌지 않았다. 둘 다 자기 삶에서 중요한 일을 위해 간절히 부탁했을 뿐이었다.
“둘을 하나의 수신자로 묶으면 무슨 답이 나올까?” 마법사가 물었다.
토비는 생각에 잠겼다.
“하루는 비가 오고 하루는 안 오면요?”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사흘 동안 석공이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평원의 작물이 어느 정도로 메말랐는지 모르고 정한 일정이네.”
“그러네요.”
“더구나 둘이서만 결정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몰라.”
벤이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래도 둘 다 뭔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알려 주면 도움은 될 텐데.”
오스벨은 두 편지의 아래에 놓인 미완료 신청서를 가리켰다. 둘 다 자동 작성기가 ‘모두에게 가장 좋은 날씨’라는 문장으로 바꾸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실제 기상 기록을 살피니 그날은 폭우와 가뭄 어느 쪽도 아니었다. 평범한 흐린 날이었다.
“이것도 이상하군.” 오스벨이 말했다. “기계는 가장 좋은 날씨를 골랐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누가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기록하지 않았어.”
토비가 소리 없이 웃었다.
“농사짓는 사람들한테 날씨를 물어봤어야죠.”
“맞아.”
그때 레아가 끼어들었다.
“그럼 모두의 이름으로 온 편지가 있다면, 그걸 꼭 받을 필요도 없는 거죠?”
“그렇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특히 다른 사람의 대답이 이미 들어 있는 편지라면요.”
로안은 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동안 행복을 골라 준다는 편지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평원의 농부도 고개의 석공도 서로가 무슨 날씨를 원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물며 아내를 그리워하는 자기 가족의 마음을 천계가 한 문장으로 대신 쓸 수는 없었다.
피엘은 과거의 자신이라면 이 사례를 ‘수신인 간 의견 상충’이라고 분류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른 말이 떠올랐다. '서로 다른 사람의 삶.' 분류를 바꾸자 수첩의 빈칸이 조금 늘어났지만 그 빈칸은 오류가 아니라 필요한 자리였다.
레아는 자신이 예전에 받은 축제 참가증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누렇게 바랜 참가증에는 자기 이름 대신 0000000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같은 숫자가 로안의 참가증에도 있었다.
“아빠랑 나랑 같은 사람으로 적혀 있어요.”
“같은 축제에 왔다고 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로안이 말했다.
아이는 망설이더니 참가증 두 장을 겹쳐 보았다. 처음에는 숫자가 같아 완전히 한 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찢어진 모서리와 종이의 결이 달랐다. 레아는 두 장을 다시 떼어 내며 작게 웃었다.
“우린 따로 써도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그 말에 피엘이 수첩을 펼쳤다. 한 묶음의 문서를 분리한다고 가족이나 이웃이라는 관계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제0경로의 오래된 복원 작업에서도 그는 사람들을 한 명씩 확인하느라 관계를 끊어 놓을까 봐 걱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개별 주소가 없던 시절에는 오히려 가족들에게 보낼 답장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로안은 두 장의 참가증 가운데 자기 것을 접어 보관했다. 레아에게는 자기 것을 어떻게 할지 직접 고르라고 했다. 아이는 그것을 버리지 않았다. 뒤편에 연필로 이름을 적은 뒤 목도리 안에 넣었다.
“이건 내가 얼마나 오래 웃는 척했는지 기억하려고 갖고 있을래.”
피엘은 그 결정을 문서 삭제도 보관 강요도 아닌 '당사자 소지'라고 적었다. 어린아이가 자기 물건을 어디에 둘지 결정했다는 사소한 일이 오히려 통합 수신인 제도의 허점을 가장 또렷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원본 수신자 00000000.” 피엘이 명찰을 들어 올렸다. “이 번호가 처음부터 사람 하나를 가리킨 것인지, 나중에 여러 사람을 묶은 것인지 조사해야 합니다.”
레아가 말했다.
“처음엔 내 이름이었어.”
“그걸 기억합니까?”
“명찰 뒤에 네가 써 줬으니까.”
피엘은 자신의 오른손 글씨와 명찰 뒤의 연필 자국을 대조했다. 확실히 같았다. 그런데 명찰 앞의 숫자가 찍힌 시점은 나중이었다. 오래된 구리판 아래에 아이의 이름이 지워진 홈이 있었다.
오스벨이 정밀 감정 마법을 펼쳤다. 홈 안에서 레아의 이름과 다른 글자들이 차례로 되살아났다.
레아.
로안.
동쪽 고개의 구조자들.
북쪽 마을의 아이들.
미확인 수신인.
모두.
“주소를 추가하는 데 문제가 생길 때마다 범위를 넓힌 겁니다.” 피엘이 말했다. “한 사람에게 보낸 문서가 오배송되자, 그 실수를 수정하는 대신 수신자 정의를 확장했습니다.”
벤이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니까 주소를 못 찾겠으면 세상 전체를 주소로 만들자고?”
“맞습니다.”
“천계의 천재성에는 가끔 소름이 돋는다.”
그때 자동 작성기 안에서 쇠울림이 났다. 멈춰 있던 바퀴 하나가 천천히 돌며 새로운 문장을 토해 냈다.
[집합 수신자 '모두'의 이의 제기 기한 만료 예정.]
[유효한 반론: 전체 구성원의 만장일치에 한함.]
토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한 방에 모여서 같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해 두면 사실상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합니다.” 피엘이 답했다.
“그럼 왜 굳이 이의 신청 버튼을 만든 걸까요?”
“버튼이 있다는 사실만 남기려고요.”
피엘은 수첩을 통해 루셀에게 통신했다. 민원 심리관은 여전히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응답했다.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숟가락이 찻잔에 부딪히는 소리가 함께 들렸다.
“피엘인가? 회부된 사건의 보충 자료라면 보내게. 단, 상대방에게 읽어도 되는 자료와 비공개 자료를 구분해서.”
“집합 수신자 번호의 생성 이력을 확인했습니다.”
“그럼 사건이 커졌군.”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최초 수신인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루셀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이름 하나가 모든 사람을 대표하지는 않겠지?”
“그렇습니다.”
“그 점부터 명시해야 하네. 한 사람에게 부당한 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이 모든 이의 말을 대신할 권한을 얻는 건 아니니까.”
피엘은 레아를 바라봤다. 아이는 자기 이름이 새겨진 명찰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모두 대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잘 들었네.” 루셀이 말했다. “법정에서 증언할 의사는 있겠나? 원치 않으면 문서를 보관만 해도 돼.”
레아는 아버지를 보았다. 로안은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가 어떤 대답을 바라는지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내가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시 웃어야 하는 건 아니죠?”
“절대로.” 피엘이 말했다.
“그럼 말할래요.”
루셀은 접수 시간을 안내했다. 피엘은 레아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증언 내용과 감정에 관한 보호 절차를 요청했다. 루셀은 동의했고, 정식 심리회가 열리기 전까지 일체의 대량 배포를 금지하는 임시 결정을 내렸다.
[최초 수신인 레아의 증언 보전.]
[집합 수신자 00000000의 대표권 잠정 부인.]
[모두에 관한 자동 동의 추정 중지 신청 접수.]
“신청이면 아직 확정은 아니군요.” 토비가 말했다.
“맞습니다. 법정이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토비는 잠깐 생각하다 자기 보리주머니를 열었다. 씨앗을 열 개씩 나눠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벤이 물었다.
“농부 입장에선 이해가 안 돼서요. 씨앗을 한 포대에 넣었다고 다 똑같이 자라진 않잖아요. 물을 많이 줘야 하는 것도 있고, 그늘에서 자라는 것도 있죠. 씨앗 하나가 다 잘 자란다고 했다고 해서 모든 씨앗이 잘 자라는 건 아니에요.”
오스벨이 그를 쳐다봤다.
“자네가 방금 매우 괜찮은 비유를 했네.”
“제가 농부니까요.”
벤이 씨앗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보았다. “그런데 왜 두 봉지만 이렇게 꽉 채웠어?”
“그건 제가 나누다 실수했어요.”
“좋군. 통계 조작을 막으려다 직접 사고를 냈어.”
레아가 처음으로 크게 웃었다. 웃음 뒤에는 갑작스러운 울음이 따라왔다. 아무 종도 울리지 않았다. 그녀는 웃다가 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낯설어서 한참 눈을 깜박였다.
로안이 딸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괜찮아. 아빠도 그렇게 할 거야.”
그 짧은 순간 발송실의 검은 바닥이 흔들렸다. 기계가 경고를 보냈다.
[행복 유지율 계산 불가.]
[미표현 감정 수집량 급감.]
[보호 대상자 개별 의사 감지.]
벤은 환호하려다 화면 아래의 작은 수치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제9명령 심리 개시 요청자: 미확인.]
[증거 제출 목록 1번: 최초 수신자 00000000의 동의서.]
[동의 내용: 모든 미래를 단일 명령에 맡길 것.]
피엘은 화면에 표시된 문서를 자세히 보았다. 문서는 수십 년 전의 것이었지만 가장 마지막 페이지의 서명이 지금 막 적힌 것처럼 젖어 있었다.
레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난 그런 데 동의한 적 없어요.”
서명 밑의 작은 점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피엘은 수첩을 움켜쥐었다. 문서 작성자는 그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날 밤 정식 심리회가 열리기도 전에 레아의 동의서를 제출하려 했다.
제3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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