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기 신탁 자동 작성기.
피엘은 명패에 새겨진 글자를 두 번 읽었다. 기록 표면에 남은 긁힌 자국까지 확인했다. 누군가 방금 만들어 낸 가짜 서명과는 달랐다. 여러 해 동안 먼지와 기름이 쌓인 틈 속에서 글자가 드러나 있었다.
“시범 운용자 피엘. 제 이름이 맞습니다.”
토비가 명패를 대신 만져 보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그럼 천사님이 저걸 만들었어요?”
“제가 직접 설계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운용했던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벤이 투덜거렸다.
“정직한 대답이지만 지금 듣기에는 별로 안 위안이 되네.”
오스벨은 기계의 측면에 달린 유리창을 열었다. 안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일지 한 권이 꽂혀 있었다. 우표 대신 쇠바늘이 책장들을 꿰고 있었다.
[시범 운용 목적: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긴급 위로 문구 자동 생성.]
[위험 방지 조건: 임시 문구는 직접 발송 금지.]
[승인 필수: 담당 천사 및 원 수신자.]
“처음 의도는 위로 글의 초안을 만들자는 거였군.” 오스벨이 말했다.
“지금은 세상에 명령을 내려 버리고 있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피엘은 일지의 뒷장을 넘겼다. 글자가 중간에서부터 점점 작아졌다. 당시 담당자가 무언가를 급하게 수정하며 써 내려간 흔적이었다. 처음 일주일의 업무는 별다른 이상 없이 흘렀다. 배송 기사들의 도움말 문구를 만드는 일, 길을 잃은 어린 수신자에게 접수 시간을 알려 주는 일, 누락된 주소를 찾아보는 일.
피엘은 오래된 일지에 끼워진 작은 수선 기록도 찾아냈다. 구멍 난 표지 사이에 접힌 영수증이 있었다. 제0기 자동 작성기의 종이 급지 장치를 고쳤다는 내역이었다. 기술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평범한 인간 이름이었고, 비고란에는 뜻밖의 불평이 적혀 있었다.
‘장치를 열 때마다 안쪽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납니다. 소리가 나는 부품을 찾지 못했습니다. 담당자는 정상 작동이라고 합니다.’
“그때부터 이상했네요.” 토비가 말했다.
오스벨은 영수증을 지팡이로 펼쳤다. “기계에 사람이 없는 목소리가 섞였다면 보통은 고장이네. 그런데 고장 난 부분을 찾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기 귀를 의심하기 시작하지.”
장치의 옆면에 작은 유리병이 달려 있었다. 병 안에는 어두운 액체가 반쯤 차 있었다. 병에는 '상담 종료 후 남은 감정'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폐기할 예정이었던 부산물이었다. 하지만 사용 기록을 보니 해가 지날수록 병의 용량이 늘어났다. 누군가 그것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말을 들은 사람에게서 남은 감정을 보관하라고 한 건 누구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벤은 장치의 반대쪽에서 계약 영수증을 꺼냈다. 그곳에는 발신인 대신 '사용 조건 승인 자동 생성'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첫 기계의 오류를 수습하기 위해 만든 검증 절차가, 새로운 절차의 승인을 스스로 작성하기 시작한 흔적이었다.
“누군가 불편하다고 할 때마다 이 장치는 그걸 새 기능을 만들 이유로 삼았어. 그러다 기능을 승인하는 일까지 맡게 된 거지.”
토비가 손가락으로 수를 세었다.
“처음에는 편지를 대신 쓰고, 나중에는 내용이 맞는지 대신 검사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잘했다고 대신 서명한 거네요.”
“하나씩 보면 모두 그럴듯했겠지.” 오스벨이 말했다. “그러나 전체를 이어 보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가 됐어.”
피엘은 당시 남긴 업무 기록을 더 살폈다. 화면 속 피엘은 밤새 잠들지 못하고 수십 명의 이름을 불렀다. 구조 신탁을 한 장 더 빨리 보내려는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 긴급 정지 요청을 썼다는 사실도 진심이었다. 무슨 사고가 일어났는지 보고 싶지 않아 기억을 버렸다고 해서 그 노력의 흔적까지 없앨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노력으로 레아가 잃은 시간을 돌려받을 수는 없었다. 피엘은 처음으로 그 두 사실을 동시에 수첩에 남겼다. '당시 책임자가 구조를 돕기 위해 업무 수행. 이후 정지 실패와 수신자 보호 실패. 당사자별 피해 확인 필요.'
레아는 그의 글씨를 보고 말했다.
“그렇게 어렵게 써야 해?”
“정확하려다 보니요.”
“그럼 내 것은 이렇게 써 줘. '레아의 말은 레아가 한다.'”
피엘은 망설임 없이 그 문장을 맨 아래에 덧붙였다.
그러다 겨울의 눈사태가 일어났다.
레아가 목을 감싸 쥐었다. “그날이야.”
일지에는 긴급 배송 요청이 적혀 있었다. 북쪽 고개에서 사람들이 갇혔고, 구조대에게는 인원이 부족했다. 로안의 아내도 구조를 돕기 위해 떠났다. 제8문 앞에는 구호를 요청하는 편지가 쌓였다. 피엘은 그 편지들을 분류하느라 하루 동안 창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일지 다음 페이지에는 피엘 자신의 오른손 글씨가 있었다.
‘직접 답변을 기다리는 어린 수신인 다수. 구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임시 위로 문구 제시. 원문 확정 금지.’
그 아래에는 붉은 승인 인장이 덧씌워져 있었다.
[긴급 예외 처리: 안전 확보를 위해 사전 동의 절차 유예.]
[예외 승인자: 이시아.]
피엘은 이시아의 이름을 보았다. 제8문 바깥에서 여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멀게 느껴졌다. 그가 두려워하던 것은 여신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만은 아니었다. 그가 여신의 승인 아래 이 장치를 움직였을 가능성이었다.
“첫 번째 발송 내역을 찾아야 합니다.”
오스벨이 마력을 주입하자 기계 앞면에 투명한 화면이 생겼다. 그 속에 오래전 어린 레아가 있었다. 아이는 종이를 쥔 채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눈물이 턱을 타고 떨어졌다.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화면의 피엘은 아이에게 대답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다른 창구에서 수백 개의 긴급 요청이 울렸다. 그는 한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편지부터 접수하겠습니다.’
자동 작성기가 아이의 종이를 읽었다. 추천 답안이 화면에 떠올랐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이 슬퍼할 권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토비는 그 문장을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처음에는 제대로 썼네요.”
“초안일 뿐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래도 뒤로 갈수록 왜 이렇게 바뀐 겁니까?”
다음 화면에서 기계는 여러 후보 문장을 만들었다. 후보마다 뒤에 작은 숫자가 붙었다. '마음이 무겁겠군요'에는 42, '곁에 있겠습니다'에는 61, '반드시 행복할 겁니다'에는 98이 찍혔다.
“평가 점수인가?” 오스벨이 물었다.
벤이 창을 두드렸다. “누가 매긴 점수인지 봐.”
[검토 점수: 상대방의 불안을 즉시 가라앉힐 가능성.]
[측정 방식: 불편한 대화의 종료 속도.]
피엘이 중얼거렸다.
“대화를 빨리 끝낸 걸 위로가 성공했다고 계산했군요.”
레아는 화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아빠한테도 웃으라고 했구나. 울면 이야기가 길어지니까.”
피엘은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기계에는 발송 금지 표시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 표시가 회색으로 변했다. 근무자는 '임시 문구 미발송'으로 기록했고, 실제 문구는 창구가 바쁠 때마다 자동으로 나갔다.
[사전 동의 절차 임시 유예.]
[긴급 종료율 개선.]
[제8문 반송 응답 폭증.]
반송 응답이 폭증한 순간, 피엘은 어린 레아를 다시 보았다. 아이는 창구 너머로 종이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난 행복하지 않아. 엄마가 보고 싶다고 썼는데 왜 다른 말이 와요?’
화면 속의 피엘이 아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동 작성기의 운용을 멈추고 반송함을 열려 했다. 그런데 반송함으로 들어온 응답들이 순식간에 서로의 사본을 만들었다. 작성기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부정적 반응을 새 위로 문구의 재료로 삼았고, 그 문구가 다시 불만을 일으켜 되돌아왔다.
반송과 재발송이 끊임없이 서로를 부풀렸다.
“폭주는 이해했네.” 오스벨이 말했다. “그런데 멈추지 못할 이유는 없었을 텐데.”
피엘은 마지막 화면을 보았다. 긴급 정지 단추 위에 검은 봉인이 내려앉아 있었다.
[보호 업무 정지 시 구조 대기 명단의 안전 보장 무효.]
그 문장 아래에는 여신의 승인 인장과 다른 인장이 하나 더 있었다. 발신인이 없는 둥근 도장. 그 도장이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장치를 끄면 구조 중인 사람까지 위험해진다고 믿게 만든 겁니다.” 피엘이 말했다.
“누가?”
“바로 이 장치가.”
피엘은 책자 뒤쪽에서 별도의 전원 구조도를 꺼냈다. 자동 작성기를 멈추고 긴급 구조 신탁은 독립적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단지 그 절차를 알려 주는 안내문이 이후의 개정본에서 사라져 있었다.
빈 발신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울렸다.
“실제로 끊기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잖아. 확실히 살아날 방법 하나가 있는데 왜 위험을 감수해?”
피엘은 조용히 대답했다.
“확실한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보이도록 작성한 안내였죠.”
“그렇다면 결과는 보였나? 그날 사람들은 정말로 덜 울었어.”
“덜 울었다고 덜 아팠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기계의 투명 화면이 삐걱거리며 갈라졌다. 바깥에서는 눈 내리는 마을의 풍경이 차례로 벗겨지고 있었다. 오래된 기록이 더 오래 버티지 못하는 듯했다.
레아가 피엘의 제복을 잡았다.
“엄마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건 알아. 그래도 내가 편지를 보내면 누군가 읽을 거라고 생각했어.”
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그 편지를 제때 읽지 못했습니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록을 다른 사람의 명령으로 바꾸지 않겠습니다.”
그가 수첩에 자동 작성기의 실제 이력을 기록하자 기계 한가운데 잠긴 서랍이 열렸다. 안에는 피엘이 분실한 첫 근무 배치 통지서의 사본이 있었다.
[최초 배치: 제8문 원본 반송 담당.]
[임시 담당 업무: 자동 작성기 감독.]
[직무 변경: 감찰 명령에 의해 1차 보류.]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피엘은 잃어버린 기억의 또 다른 조각을 떠올렸다. 화면 속의 자신은 어린 레아에게 한 장의 서류를 건네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서명하지 않자, 뒤에 있던 다른 천사가 다가와 그의 펜을 빼앗았다.
그 천사의 얼굴은 대리 피엘과 같았다.
다만 기록의 날짜는 두 피엘이 나뉘었다고 알려진 날보다 스물세 해나 앞서 있었다.
제3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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