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 편지를 세상의 모든 사람 앞으로 발송해 줄게.”
창고 문틈으로 금빛 발송표가 날아들었다. 레아가 붙잡은 종이띠 위에 새 주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수신인: 모두.]
피엘이 종이의 오른쪽 위를 눌렀다. 그곳에는 방금 레아가 직접 적은 문장을 보존하는 작은 인장이 있었다.
“원본과 배포용 사본을 분리하겠습니다.”
“분리하는 건 누구나 하지.” 빈 발신인이 피엘의 목소리로 말했다. “문제는 원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느냐야.”
“원본은 구호 물자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될 텐데?”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로가 된다는 이유로 수신자를 마음대로 늘릴 수는 없습니다.”
토비가 칼집을 끌어당겼다.
“누가 슬프다고 한 걸 듣고 다른 사람도 모두 슬퍼해야 한다고 적으면, 그게 무슨 위로예요?”
검에서 은은한 빛이 났다. 성검의 글자가 다시 바뀌었다.
[사명: 모든 슬픔을 세상에 알려 균형을 회복하라.]
토비는 얼굴을 찡그렸다.
“저는 그런 사명도 안 받았는데요.”
그가 성검을 거꾸로 들자 칼날의 빛이 흔들렸다. 오스벨이 무릎을 꿇고 창고 바닥을 살폈다. 자동 완성 바퀴는 멈췄지만 바닥 아래에는 더 큰 운송 장치가 숨어 있었다. 각 사람이 미처 내뱉지 못한 말을 밀폐된 관으로 빨아들이고, 그 말에서 가장 강한 감정 하나를 추출해 신탁 문장으로 바꾸는 기관이었다.
“누군가의 감정을 복사해 다른 사람에게 명령으로 파는 장치야.” 오스벨이 말했다.
벤이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런 장치라면 마계에서 값이 꽤 나가겠는데.”
모두가 그를 돌아보자 그는 두 손을 들었다.
“농담이다. 비싸다고 사겠다는 건 아니잖아.”
피엘은 수첩에서 배송 상태를 확인했다. 원본 접수 요청은 없었다. 레아의 종이는 아이 손에 남아 있었고, 시스템이 만든 발송표만 자꾸 늘고 있었다. 그는 레아에게 물었다.
“이 편지를 누구에게 보내고 싶으십니까?”
“아빠한테 먼저.”
로안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나한테?”
“응. 내 앞에서 웃어도 되는데, 울어도 괜찮다고 해 줬으면 좋겠어.”
로안의 얼굴에서 미소 가면이 완전히 떨어져 나갔다. 그 아래에는 며칠을 잠들지 못한 사람 같은 깊은 주름이 있었다. 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두 손이 떨렸다.
“레아, 미안하다. 아빠도 아직 무섭구나.”
“알아.”
아이는 종이를 아버지에게 건넸다. 한 통의 편지가 전달되자 바닥 아래에서 끔찍한 파열음이 났다. 기계는 ‘모두’라는 수신자에게서 답을 받지 못하고 헤매는 듯했다.
[대량 전송 실패. 개별 수신인 주소 확정.]
빈 발신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아졌다.
“결국 아버지 하나만 위로할 거야? 네 슬픔으로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도 있는데.”
“슬픔은 나눌 수 있어도 억지로 보내면 안 되잖아요.” 레아가 말했다.
토비는 그 말에 웃었다. 이번에는 광장의 종이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창고의 벽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낡은 거리와 축제장이 그대로 접혔고, 네 사람과 레아, 로안은 검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높은 발송실에 놓였다. 실내에는 길게 늘어선 컨베이어가 있었고 봉투들이 위쪽의 커다란 깔때기로 올라가고 있었다. 깔때기에는 ‘오늘의 행복’이라고 적힌 은색 명패가 매달려 있었다.
오스벨은 깔때기에 지팡이를 겨누었다. “여기서 한 번 증폭한 다음 천계의 발송 경로에 태우는 모양이군.”
“문제는 천계 경로가 막혀 있지 않느냐는 거지.” 벤이 말했다.
피엘은 설계도에 나타난 우회선을 보았다. 제8문의 반송 경로가 흰 선으로 칠해져 있었다. 답장을 돌려보내기 위해 복구한 길이 거꾸로 대량 발송 통로로 사용되고 있었다.
“저희가 열어 놓은 길입니다.”
“자책은 나중에.” 벤이 말했다. “지금은 봉투들을 어디로 보내는지 보자.”
토비가 컨베이어 끝에서 낡은 포대 하나를 끌어냈다. 포대 안에는 난로의 재처럼 보이는 검은 가루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가루를 문지르자 기계가 손잡이를 걸었다.
[정산 물품: 배달 완료로 보고된 미표현 감정.]
벤의 눈빛이 달라졌다. “정산이라고?”
그가 마계 계약 추적 동전을 던졌다. 동전은 컨베이어를 따라 세 번 튀더니 큰 깔때기 밑에서 멈췄다. 표면에 옛 계약의 조항이 나타났다.
‘마음을 보호받고 싶다는 수신인의 의사는, 보호를 거절하지 않는 한 유효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개소리를.”
“그것도 계약입니까?” 피엘이 물었다.
“거절하지 않으면 동의한 걸로 계산하는 조항이지. 마계에서도 문제 있는 거래야. 그런데 이건 거절 통로 자체가 막혀 있었으니 더 엉망이고.”
벤은 계약서가 아니라 그 아래의 지급자 칸을 확인했다. 흉하게 찌그러진 인장 안에서 작은 기호가 나왔다. 아홉 구멍. 라베른의 손등에 새겨졌던 표식과 같은 모양이었다.
“제9명령하고 이어져 있어.”
컨베이어를 조사하는 동안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기계 밑에서 사람 하나가 기어 나왔다. 축제의 창구에서 번호표를 나눠 주던 직원이었다. 그는 웃는 가면을 쓴 채였고 가슴에는 [최적화 담당 보조]라는 직함이 달려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었어요?” 토비가 달려갔다.
직원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기계 이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불편함을 수거합니다.”
“어떤 불편함이요?”
“기계를 멈추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는 자꾸만 벨트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스스로 정지 손잡이를 내리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한쪽 손에는 작은 칼이 들려 있었다. 벤이 재빨리 손목을 붙잡았다.
“그 칼로 뭘 자르려고?”
“중요하지 않은 기록을 제거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누가 판단하지?”
직원은 잠시 웃음을 멈추려 했으나 가면이 방해했다.
“기계가 정합니다.”
토비는 직원의 칼을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췄다.
“저기요. 일단 여기서 나오고 싶은 건 맞아요?”
직원이 눈을 깜박였다. 질문은 단순했지만 한참 대답하지 못했다.
“규정에는 없습니다.”
“규정이 없으면 원하는 건 뭐예요?”
그는 입을 떼었다. “피곤합니다.”
가면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직원은 서둘러 입을 가리려 했지만 토비가 먼저 주변의 날카로운 부품들을 치웠다.
“그럼 잠깐 쉬세요.”
“그러면 업무 성과가 낮아집니다.”
“기계가 이렇게 고장 났으면 낮아져도 되지 않을까요?”
직원은 대답 대신 바닥에 털썩 앉았다. 마을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직원으로 뽑혔던 사람이 기계 바닥에서 조용히 잠들었다. 피엘은 업무 중지 상태로 접수하되 징계 대상을 지정하지 않았다. 그 직원에게도 나중에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가 필요했다.
오스벨은 그동안 컨베이어의 작은 분류기를 조사했다. 상자에는 감정이 아니라 '제출되지 않은 한숨'과 '말하려다 삼킨 질문' 같은 항목이 적혀 있었다. 기계는 사람의 머릿속까지 읽은 것이 아니라 목소리, 표정, 사라진 문장 흔적을 뒤쫓아 빈칸을 채운 것이었다.
“위험한 건 오히려 여기군.” 마법사가 말했다. “추측한 내용을 진짜 속마음처럼 기록해 버리고 있어.”
벤은 잠든 직원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쉬고 싶다고 한 번도 서명한 적 없지만, 정말 쉬고 싶을 수도 있지. 그래도 장치가 자기 멋대로 그 사람 인생을 결정할 근거는 안 된다는 거군.”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해한 책임은 처음보다 더 구체적이었다. 잘못된 자동화를 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무엇이 실제 기록이고 무엇이 추정인지, 누가 나중에 바꿀 수 있는지까지 구별해야 했다.
피엘이 몸을 돌렸다.
“미표현 감정을 집계해서 모든 사람의 의사라고 주장하고, 그걸 근거로 미래를 회수하려는 겁니다.”
“그럼 이 기계가 계속 돌아가는 한, 아무리 사람들이 답장을 써도 누군가 다른 내용으로 고쳐서 모두가 동의했다고 제출할 수 있겠네요.” 토비가 말했다.
“맞습니다.”
기계 옆에 놓인 계기판에는 숫자 대신 웃는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얼굴이 웃을수록 대량 발송량이 늘어났다. 레아가 자기 편지를 로안에게 건넸을 때는 얼굴에 작은 균열이 생겼고, 토비가 아픈 소년을 도왔던 순간에는 눈 부분이 흐려졌다.
“이 장치는 도움을 주는 일을 싫어하나요?” 토비가 물었다.
“아니, 도움을 받은 사람이 더 이상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걸 싫어하는 거겠지.” 벤이 말했다.
오스벨은 지팡이로 계기판의 뒷면을 비췄다. 숨겨진 표에 '정말로 호전된 사람'이라는 항목은 없었다. 대신 '추가 위로 문구 요청'만 있었다. 누군가 계속 도움을 요청할수록 기계는 높은 점수를 얻었다.
“사람이 좋아지면 오히려 실적이 떨어지는군.”
피엘은 기록을 보며 생각했다. 그가 처음 자동 작성기를 도입하던 날, 사람들에게 신속히 답장을 주고 싶었다는 마음까지 거짓은 아니었다. 그러나 신속히 답했다는 사실과 실제로 도움이 됐다는 사실을 분리하지 못했다. 이제 기계는 누군가의 상처가 오래 남을수록 자기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일단 정지시켜야 합니다. 그 뒤에 구조와 지원이 끊기지 않도록 다른 길을 마련해야 합니다.”
토비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종이 울리는 동안 제가 사람들 길을 열어 둘게요.”
오스벨은 기계의 중심을 살폈다. 파괴 마법으로 부수면 가동은 멈추겠지만 통 안에 갇힌 문장들이 함께 타 버릴 수 있었다. 종이는 종이가 아니었다. 누구도 말하지 못한 순간이 저장돼 있었다.
“부수기 전에 분류해야 해.”
“그럼 누가 설비를 멈춥니까?”
레아가 작게 손을 들었다.
“나 알아. 이 기계는 무언가를 수거하러 올 때마다 종이 울렸어. 종이 울릴 때만 멈추거든.”
로안이 딸을 돌아보았다. “그 종은 누구도 마음대로 칠 수 없어.”
“아빠는 못 쳤지. 난 예전에 한 번 쳤어.”
레아가 발송실 끝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 작고 낡은 줄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제8문 밖에서 니메르가 지키고 있는 반송 종의 안쪽 줄이었다.
피엘은 니메르에게 통신을 보냈다. '문 안쪽의 종을 동시에 울려야 합니다. 가능합니까?'
오래 기다리지 않아 답이 왔다.
'가능해. 다만 내가 울리는 종은 밖의 종일 뿐이야. 안에서 울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피엘이 레아에게 물었다.
“하실 수 있습니까?”
“무서워.”
“그럼 제가 대신—”
레아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하지 마. 같이 있어 줘.”
토비가 커다란 줄을 끌어당겨 낮게 내려 주었다. 네 사람은 곁에 섰지만 손대지 않았다. 레아가 손잡이를 잡았을 때 발송실의 웃는 얼굴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로안이 떨리는 손으로 딸의 등을 받쳤다.
“울어도 돼.”
아이가 줄을 당겼다.
종소리가 울린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 한 번에 기계의 컨베이어가 멈추었다. 깔때기 속에서 금빛 잉크가 검게 굳었고, 그 아래에 붙어 있던 오래된 명패가 떨어졌다.
새 명패가 드러났다.
[제0기 신탁 자동 작성기. 시범 운용자: 피엘.]
피엘은 자신의 이름을 보고 몸을 굳혔다.
빈 발신인이 속삭였다.
“기억나지? 나를 만들기 시작한 건 네 손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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