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종이 울리자 마을의 색이 바뀌었다.
하얀 눈은 금빛 가루가 되었고, 회색 벽은 밝은 복숭아색으로 물들었다. 시장의 상한 과일에는 신선한 윤기가 돌았다. 그러나 냄새만은 그대로였다. 축제를 알리는 악단이 거리 끝에서 나타났다. 악사들은 웃는 가면을 쓴 채 연주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는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악기를 놓지 못했다.
“이건 축제가 아니라 검열이잖아.” 벤이 말했다.
“웃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무언가가 실제 상태를 덮어쓰고 있네.” 오스벨이 지팡이를 세웠다. “마법의 원인이 어디인지 찾아야 해.”
레아의 아버지가 피엘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마을은 슬픔이 없는 곳입니다.”
“이름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로안입니다. 모두가 행복하도록 나무새를 만드는 일을 하지요.”
“지금 행복하십니까?”
남자의 미소가 조금 커졌다.
“물론이지요.”
피엘은 질문을 바꾸었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해도 괜찮습니까?”
로안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그 순간 가면이 남자의 볼에 더 깊숙이 붙었다. 벤이 재빨리 그림자를 펼쳐 종이 날아오는 길을 가로막았다.
“그만. 대답하라고 다그치지 마.”
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 질문도 이곳에서는 위험했군요.”
로안이 울 듯 웃었다.
“전 이미 잘못 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레아가 사라질 뻔했어요.”
남자는 자신이 깎던 나무새를 보여 주었다. 새의 배 속은 비어 있었고 안에 작은 종이를 넣을 수 있었다.
“레아 엄마는 북쪽 고개에서 사람들을 구하러 갔어요. 눈사태가 난 날이었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축제 담당자가 말했습니다. 슬픔을 보이면 구호 인력이 우리 집을 찾지 못한다고.”
토비가 조용히 물었다.
“그 말을 믿으셨어요?”
“믿고 싶었어요.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로안이 새를 열자 안쪽에서 구겨진 메모가 나왔다.
‘나는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찾겠다. 기다리라고만 하지 않겠다.’
그건 아내가 사고 전날 남겨 둔 글이었다.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적은 문장. 로안은 그 종이를 여러 번 읽어 닳게 만들었다.
로안이 나무새 안에 넣어 둔 메모를 다시 접으려 할 때 레아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는 엄마가 마지막으로 한 말도 기억해?”
“기억하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안 해 줬어?”
로안은 손에 쥔 나무새를 내려놓았다. 대답하기 전에 세 번이나 입술을 적셨다.
“그 말을 하면 네가 정말로 기다리기 어려워질까 봐.”
레아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고 기다리는 게 더 어려웠어.”
그는 천천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장화를 신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눈보라가 밀려오는 고개로 가기 전, 그녀는 문 앞에서 신발끈을 묶으며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겠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 그래도 길에 남은 사람을 두고 올 수는 없잖아.’
그 말은 희망이면서 두려움이었다. 로안은 그 뒤의 시간을 견딜 수 없어서 마지막 문장을 가려 버렸다. 레아는 아버지의 설명을 듣고 조용히 말했다.
“엄마도 무서웠구나.”
“그래.”
“그런데 갔네.”
“그랬지.”
토비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성검을 내려다봤다. 검은 자꾸 영웅이 될 결정을 강요했지만, 레아의 어머니는 어떤 신탁 때문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었기에 움직였다고 했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단순히 판정할 수는 없었다. 다만 누군가가 대단한 용사여야만 남을 돕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토비에게 조금 새로웠다.
“마을에서 어머니를 기억하는 사람은 더 있나요?” 토비가 물었다.
로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 구조대의 노인이 한 분 계시지. 지금은 축제위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해. 원래는 고개 지도를 그리던 분이었어.”
그들이 창문 밖을 살피자 노인은 가게 앞에 서 있었다. 언제나 웃어야 하는 축제위원들 중 그 사람만 외투에 작은 검은 리본을 달고 있었다. 리본을 살피던 오스벨이 말했다.
“이건 항의 표시야. 애도하는 사람들이 남몰래 사용하던 방식이지.”
벤은 자기가 아는 마계의 장례 관습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 계약서를 태우지 않고 접어 둔다고 했다. 잊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악마의 풍습을 듣고 토비가 놀라자 벤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악마도 다 똑같이 나쁘거나 웃긴 건 아니야. 계약서 잘못 쓰면 나도 오래 괴롭다고.”
그들은 구조대 노인을 찾아가 증언을 청했다. 노인은 당시 산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다만 누구의 최후를 직접 확인했는지 구별해서 말했다. 레아의 어머니가 실종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사망이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 살아 있을 수도 있나요?” 레아가 물었다.
노인은 망설였다. 쉬운 희망을 말하면 아이가 기뻐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확신이 없는 말로 아이를 다시 오래 기다리게 할 수도 있었다.
“모른단다. 내가 본 마지막 모습은 사람들을 고개 아래로 인도하던 뒷모습이야. 그 이후는 직접 보지 못했어.”
레아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피엘도 수첩에 '실종, 생사 미확인'이라고 적었다. 슬픔을 허락하는 것과 사실을 단정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구조대 노인이 떠나자 레아는 목도리를 여몄다. “그래도 아빠한테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는 말하고 싶어.”
그 말을 한 뒤에야 아이는 창고의 난로 앞으로 다시 걸어갔다.
“이걸 읽을 때마다 슬펐어요. 그래서 웃어야 했습니다. 웃으면 적어도 누가 제 표정을 고치러 오지는 않았으니까.”
오스벨이 눈을 감았다. 그는 오래전 가장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는데도 닭 한 마리의 죽음을 막지 못해 한동안 마당에 나오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스스로 자책할 자유마저 허락되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잃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
“로안 씨.” 마법사가 말했다. “마법이 이 마을에 언제부터 걸렸는지 아십니까?”
“눈사태 다음 날부터요. 하늘에서 축제 안내서가 떨어졌어요.”
로안은 그들에게 목공소 뒤편의 창고를 열어 주었다. 선반마다 나무새가 빼곡했고, 구석에는 커다란 난로가 있었다. 난로의 재받이 안에 타지 않은 종이들이 쌓여 있었다.
“울고 싶을 때마다 편지를 써서 태웠어요. 그러면 아무도 못 보니까.”
피엘이 한 장을 살폈다. 종이는 모서리가 까맣게 그을렸지만 글씨는 온전했다.
‘여보, 내가 레아를 혼자 키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다른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이한테 내가 무섭다고 말할 수 없어서 더 무서워.’
피엘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자신에게 보내진 편지가 아니었다. 대신 로안에게 물었다.
“보관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없애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셔도 됩니다.”
로안은 난로 앞에 털썩 앉았다. 미소가 조금 내려앉았다.
“모르겠다는 말을 얼마 만에 하는지 모르겠어요.”
레아는 아버지에게 다가가려다가 멈췄다. 오래 묻어 둔 시간은 짧은 사과 한 번으로 지워지지 않았다.
“아빠, 나한테는 엄마 얘기해 줘도 돼요.”
“널 슬프게 만들까 봐.”
“이미 슬퍼요.”
그 말에 난로가 화르륵 타올랐다. 불길은 붉지 않았다. 유리처럼 투명한 불꽃이 재받이를 훑더니 수십 장의 편지를 들어 올렸다. 종이들이 허공에 일렬로 정렬됐다.
[미발송 슬픔 신고서 확인.]
[발신인 확인 요청.]
오스벨이 놀라 외쳤다.
“여기야! 눈 마법의 근원이 이 난로에 연결돼 있어.”
“사람이 편지를 태운 걸로요?” 토비가 물었다.
“태우지 못한 편지로. 이 편지들은 전부 발송되려던 것이었는데 어딘가에서 경로를 가로챘네.”
로안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아무 데도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래서 이 편지들을 임의로 접수하면 안 됩니다.”
그는 수첩에 기록을 남겼다. '미발송 사적 기록. 당사자 동의 없음. 수거 금지.' 기록을 마치자 불꽃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창고 문 너머에서는 축제 음악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벤이 난로 뒤를 살피다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굴뚝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멍이었다. 둥근 통로 안에 쇠바퀴가 달렸고, 바퀴에는 빈 발신인의 표식과 동일한 문양이 있었다.
“이 자식, 편지를 태울 때 생기는 한숨까지 모아 갔군.”
쇠바퀴를 돌리자 벽 뒤에 접힌 공간이 열렸다. 그 안에는 수많은 짧은 말이 작은 종이띠로 보관돼 있었다.
‘싫어.’ ‘무서워.’ ‘돌아와.’ ‘잘 모르겠어.’
모두 이 마을 사람들이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었다. 가장 아래에는 두 갈래로 찢어진 어린 글씨가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레아는 그것을 보자 숨을 멈췄다.
“내 거야.”
피엘이 종이를 꺼내려 하자,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꺼낼래.”
쇠바퀴가 날카롭게 울었다. 작은 창고의 문이 안쪽에서 잠겼다. 종이띠들이 뱀처럼 꿈틀거리더니 레아의 손목을 감았다.
[미완성 문장 자동 완성 준비.]
[권장 답안: 엄마가 없어도 나는 행복해.]
“그건 내가 쓴 말이 아니야!”
토비가 칼을 뽑았다. 그러나 피엘이 막았다. 종이띠를 한꺼번에 잘라 버리면 레아가 직접 쓰려던 말까지 사라질 수 있었다. 오스벨은 얼어붙은 바퀴에 열을 가해 움직임만 늦췄다. 벤은 그림자로 통로 바깥에 붙은 장치를 막았다.
피엘이 레아를 보았다.
“그 문장의 마지막을 제가 채우지 않겠습니다. 대신 당신의 손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돕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레아가 눈물을 닦았다.
“응.”
그는 손목의 종이띠 중 하나를 골라 느슨하게 풀었다. 토비가 옆에서 레아의 팔을 받쳤다. 아이는 찢어진 종이띠를 붙잡고 천천히 글자를 썼다.
‘엄마가 보고 싶어. 그리고 나는 슬퍼.’
바퀴가 비명을 질렀다. 자동 완성 장치에서 금빛 잉크가 분수처럼 솟았다. 마을 전역에서 축제 음악이 끊겼다.
로안의 얼굴에 붙어 있던 미소 가면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바깥에서 빈 발신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썼네, 레아. 이제 그 편지를 세상의 모든 사람 앞으로 발송해 줄게.”
피엘은 몸을 돌렸다. 아이의 첫 번째 진짜 문장이 만들어졌지만, 누군가 그것을 다시 자기 신탁으로 바꾸려 하고 있었다.
제33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