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편지가 도착한 것은 밤의 가장 조용한 순간이었다.
검은 창고 밖에서는 별 대신 봉투가 떨어졌다. 창고의 시계는 멈춰 있었고 제9명령은 집행자를 잃은 채 보류 상태였지만, 피엘은 그 침묵을 평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발신인이 반송 편지를 훔쳐 간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자가 원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라베른은 손등을 내려다봤다.
“사람들이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기록하는 겁니다.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니면서 사람이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문서는 강한 힘을 갖습니다.”
벤이 차갑게 웃었다.
“마계에서는 그런 걸 위조 계약이라고 불러. 가장 비싼 범죄지.”
“천계에서는 어떻게 부릅니까?” 토비가 물었다.
피엘은 쉽게 답하지 못했다. 이제껏 자신이 다룬 수많은 신탁의 발신인 확인란을 떠올렸다. 상급자의 직인, 부서 승인번호, 배달 경로. 그러나 당사자가 실제로 그런 말을 원했는지 확인한 칸은 거의 없었다.
“그냥…… 정식 배송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시아가 눈을 감았다.
“그렇기 때문에 빈 발신인은 오래 숨어 있을 수 있었다.”
루셀은 회색 기록장을 펼쳤다. 그 안에는 제8문이 닫힌 뒤 발생한 이상 현상들이 적혀 있었다. 누구도 보내지 않은 승진 신탁, 누구도 원하지 않은 결혼 신탁, 돌아갈 곳이 없어진 아이에게 전달된 영웅의 사명. 제0경로에 남은 오배송도 그중 일부였다.
“문제는 단순히 주소를 잘못 쓴 게 아니로군.” 루셀이 말했다. “받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의 삶을 문서로 차지하는 일이었어.”
토비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처음 받은 용사의 신탁을 떠올렸다. 그때는 영광스럽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사람들은 ‘드디어 마왕을 물리칠 용사가 왔다’고 외쳤고, 그는 자기가 농사를 계속 짓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저한테 그 신탁을 보낸 사람이 정말 있는 건가요?”
피엘은 토비를 바라봤다.
“발신인이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
토비는 검집을 내려놓았다. 그가 용사가 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 이제는 위로가 아니었다. 누군가 처음부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제가 받은 게 무슨 뜻이었는지는 제가 말할게요. 다른 사람도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세 사람은 편지의 전달 규칙을 정하느라 반나절 가까이 보냈다. 오스벨은 봉투에 감지 마법을 걸어 누군가 뜯으면 빨간 빛이 나게 하자고 제안했다. 벤은 빨간 빛을 훔쳐 다른 편지에 붙일 수 있는 악마를 안다고 반박했다. 피엘은 봉투를 건드리지 않고도 발송 기록을 여러 장소에 보관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토비는 한참 듣다가 손을 들었다.
“그걸 왜 우리끼리 정해요?”
셋이 그를 바라봤다.
“편지를 쓴 사람한테 어떻게 보낼지 물어보면 되잖아요.”
그날 우편마차 종점에는 연락이 여러 번 오갔다. 사람마다 원하는 보호 방식이 달랐다. 어떤 사람은 봉투를 공개해도 된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발신인이 누구인지 확인될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감춰 달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원본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전에는 보내지 않겠다고 했다.
피엘은 시간을 적으며 하나씩 대답했다. 누군가의 말이 짧다고 해서 동의가 간단한 것은 아니었다. 자기 이야기를 세상에 다시 보내는 일은 당사자에게 크고 작은 두려움을 남겼다.
마라는 마지막 통신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낸다고 대답한 열한 명 중 두 분은 다시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어요.”
“그 결정도 존중하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럼 현재 운송 대기자는 아홉 명이에요.”
피엘은 숫자를 수정했다. 11명의 최초 의향 확인자 가운데 현재 의향을 유지한 이는 9명, 2명은 보류. 이 가운데 원문 공개에 동의한 세 통만 확인한 상태였다. 적어도 기록에선 그 차이를 흐리지 않기로 했다.
마라가 보내 준 열한 개의 봉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봉인돼 있었다. 하나는 실로 묶였고 하나는 밀랍으로 닫혔으며 하나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피엘은 이들을 전부 같은 방식으로 뜯어 보지 않았다. 마라가 별도 동의를 받아 전달한 봉투는 세 개뿐이었다. 나머지 여덟 개는 닫힌 채 제8문으로 운송하기로 되어 있었다.
첫 번째는 북쪽 등대지기의 편지였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근무를 마치고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고 썼다. 두 번째는 오래전 물살에 떠내려갔다고 기록된 제분소 직원의 편지였다. 그는 기록상 죽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삶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세 번째는 보리골의 빵집 주인에게서 온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내가 두려워했던 날을 없애고 싶지 않습니다. 그날 내가 문을 닫지 못한 것은 잘못이었지만, 그날 도와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토비는 편지를 한참 바라봤다. 자신이 어릴 때 그 빵집에서 얻어먹었던 따뜻한 빵 냄새가 떠올랐다. 누군가의 잘못 하나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날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절벽 아래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구름이 한번 지나갈 때마다 절벽의 색이 달라졌다. 편지를 보내려는 사람들은 멀리서 검은 바람을 보고 걱정했다. 그 바람이 우편함에 닿으면 모서리에 적힌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잠깐 흐려졌다.
오스벨은 바람에 섞인 마법을 분석했다. 누군가 사람의 이름을 통째로 훔치려는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글자 하나만 바꾸어도 편지의 목적지가 달라질 수 있었다. 그는 수정구에 그 흔적을 담아 보여 주었다.
“우리의 봉투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 있었군. 이름을 완전히 지우지 않아도 위조가 가능해.”
피엘은 토비의 이름을 종이에 여러 번 적어 보였다. 한 글자를 빼자 완전히 다른 사람의 이름처럼 보였고, 띄어쓰기를 옮기자 별개의 문장이 되었다.
“그래서 도착하기 전과 후의 원본을 서로 대조해야 합니다. 전달 확인만으로는 부족하겠어요.”
벤은 마계의 계약에서 쓰던 이중 확인 방식을 설명했다. 각자 보관한 영수증의 가장자리가 맞물리는지 보는 방법이었다. 완전히 안전한 수단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몰래 글자를 고쳤을 때 찾아낼 단서는 하나 더 생겼다.
니메르는 작은 투입구를 찾는 방법을 설명했다. 제8문의 모습은 절벽 정상에 없는 것처럼 보여도, 원래는 반송 종소리가 닿는 모든 우편함 뒤에 겹쳐 있었다. 다만 답장을 보내는 이가 실제로 동의해야 문이 잠깐 보였다.
“각 편지에 따로 길을 열면 빈 발신인이 중간에 손을 댈 가능성도 줄일 수 있겠군.” 피엘이 말했다.
“그렇지.” 니메르가 답했다. “그리고 편지가 도착했다고 해서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해야 해.”
오스벨은 달걀을 탁자 가운데 올렸다. 달걀은 많은 사람의 증언을 저장할 수 있었지만, 누가 무엇을 기록할지 정하는 기능은 없었다. 그는 그 빈자리에 새로운 마법진을 그렸다.
“이건 증언의 내용을 읽는 장치가 아니네. 사람이 진술을 직접 보냈는지, 중간에 글자가 바뀌지 않았는지만 확인할 거야.”
벤이 감탄했다.
“마법사가 개인정보를 덜 모으는 쪽으로 발전하다니. 보기 드문 광경이군.”
오스벨은 얼굴을 붉혔다.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지.”
실험 전 토비는 성검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칼집 표면에는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작은 글씨가 나타났다. 그는 그것을 읽는 동안 심장이 두근거렸다.
[수신인: 세계를 구할 용사.]
[사명: 모든 불행의 가능성을 차단할 것.]
“이게 제 원래 명령이었나요?”
피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탁의 원문과 비교하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칼에 나타났던 글씨가 바뀐 걸 보면 누군가 내용을 덧쓰고 있을 수 있습니다.”
토비는 칼을 잡았다. 칼날이 흰빛을 띠며 마치 '모든 불행'이라는 글자가 실물이기라도 한 듯 어둠을 베어 냈다. 그는 순간 유혹을 느꼈다. 불행이 다 사라진 세상이라면 에마가 루나를 잃고 슬퍼했던 날도 없을 것이다. 자기도 죄책감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는 루나를 다시 만났을 때 느낀 기쁨도 사라질 것 같았다. 고통이 없는 날을 향해 남의 기억을 지워 버릴 수는 없었다.
“이 칼을 써서 세상을 다 고치지는 않을 거예요.” 토비가 말했다. “사람들 집 앞의 무너진 다리 정도는 고칠 수 있겠지만.”
피엘은 그 말과 성검의 새로운 문구를 각각 기록했다. 같은 검에서 나온 두 문장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세 개의 확인 가능한 편지로 실험했다. 토비가 보낸 첫 편지는 다음과 같았다.
‘나는 영웅이 되라는 명령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을 돕기로 선택할 수는 있습니다. 그 선택을 제 이름으로 남깁니다.’
봉투가 밝게 빛났다. 절벽 한쪽에서 희미한 손잡이 모양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니메르가 숨을 들이켰다.
“투입구야.”
두 번째 편지는 벤이 보냈다. 그는 보리골 계약에 잘못 서명한 일을 인정하고 앞으로 계약서를 읽지 않은 증인을 세우지 않겠다고 적었다. 그의 봉투가 투입구에 닿자 검은 동전이 빛났다. 마계의 계약이 천계의 문 앞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답장을 가진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이시아의 편지였다. 여신은 자기가 봉인한 제8문 때문에 답장을 보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명을 요청받을 권리가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봉인이 필요한 동안에도 대체 반송 수단을 만들지 못한 책임을 인정했다.
세 통의 편지가 지나가자 투입구가 손바닥 하나만큼 열렸다. 안에서 따뜻한 빛이 나온 것은 잠깐이었다. 곧 어둠 속에서 하얀 손이 뻗어 나왔다.
“다음 편지는 내가 대신 써 줄게.”
목소리는 토비와 같았다.
토비가 뒤로 물러났다.
“저 아니에요.”
손은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토비가 하고 싶은 말과 거의 비슷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다만 한 줄이 달랐다.
‘나는 앞으로 영원히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겠습니다.’
피엘은 즉시 투입구를 가렸다.
“지금 말씀하신 건 당사자의 서명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훨씬 좋은 문장인데.”
하얀 손이 토비의 목소로 웃었다.
“세상 사람들은 아름다운 말을 좋아하지 않나?”
토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저는 평생 다른 사람을 돕겠다고 약속한 적 없어요. 제가 농사짓고 싶을 때는 농사짓겠죠. 그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손이 잠시 멈췄다.
“그런 평범한 약속으로 어떻게 세상을 구하겠다는 거지?”
“당신이 정한 세상은 모르겠어요. 제가 사는 마을은 그런 식으로도 구했어요.”
투입구에서 검은 잉크가 튀었다. 오스벨의 달걀이 강하게 빛났고, 벤이 그림자로 우편함의 모서리를 붙들었다. 니메르는 오래된 반송 종을 세 번 울렸다.
피엘의 수첩에 경고가 떴다.
[위조 신탁 발행 시도 차단.]
[피해 예방: 수신인 임의 확정 금지.]
[원본 편지 보전.]
하얀 손은 사라졌다. 하지만 투입구 아래에 작은 새 봉투가 남았다. 겉면에는 아주 반듯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발신인: 피엘.]
[수신인: 대리 피엘.]
[작성 시각: 피엘이 둘로 나뉘기 하루 전.]
피엘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나타났던 빈 발신인의 흔적과는 다른, 오래된 자신의 오른손 글씨였다.
그리고 봉투 뒷면에 아주 작은 문장이 있었다.
‘내가 기억을 버리더라도, 네가 대신 사람들의 목소리를 버리지는 마.’
제29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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