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실의 시계가 삼십 초를 세기 시작했다.
피엘은 라베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를 구원하려는 영웅적인 동작이 아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사람에게 질문 하나를 하고 싶었다.
“그 명령을 계속 수행하시겠습니까?”
라베른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저에게는 대답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도 원하시는지 묻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질문조차 받지 못한 채 여기까지 오셨으니까요.”
라베른의 손등에서 검은 빛이 번졌다. 아홉 번째 구멍이 조금 커졌고, 그 안에서 먼 옛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루셀은 재빨리 인장을 들었다.
“심리 당사자에게 진술 기회를 부여하겠네. 답변을 강제해서도, 침묵을 동의로 간주해서도 안 되네.”
[진술 기회 부여.]
[제9명령 즉시 실행 요청: 유예.]
시계가 멈췄다. 남은 시간은 세 초였다.
벤이 숨을 내쉬었다.
“세 초면 빵 한 조각도 못 먹는데.”
토비는 칼을 내려놓고 라베른을 바라봤다.
“살고 싶다고 말해도 돼요. 말하기 싫으면 지금은 안 해도 되고요.”
라베른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이상하게도 질문을 되돌렸다.
“제가 멈추면 미회신 신탁들은 누가 관리합니까?”
“관리가 필요한 건 맞을 거예요.” 피엘이 말했다. “그런데 당신 한 명이 명령을 거절할 권리 없이 맡아야 하는 일은 아닙니다.”
오스벨이 끼어들었다.
“닭장에도 닭 한 마리만 종일 문을 지키게 하지는 않네.”
“닭이 그런 걸 할 줄 압니까?” 라베른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못하지. 그러니 애초에 시키면 안 된다는 뜻일세.”
사소한 말이 긴장을 조금 풀었다. 라베른은 감찰국 제복의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라는 사실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찾을 수 있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기록이 남아 있다면.”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부터 물어야겠죠.”
루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판결을 서두르지 않았다.
“잠깐. 집행자 본인이 당사자라면 그 명령에 대한 독립 심리가 필요하네. 나는 오래된 민원 담당자라 나를 재판관이라고 부를 권한은 없지만, 당사자의 진술을 보관할 수는 있지.”
라베른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진술이 끝나기 전 라베른은 차가운 책상에 손을 얹었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은 사람의 것처럼 떨렸지만 손등의 구멍들은 미세한 기계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또 하나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이름을 지운 사람은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피엘은 고개를 저었다.
“제 상관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지우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요.”
토비의 얼굴이 굳었다. 루나는 열여덟 해 동안 기록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두 개의 그릇을 꺼내 놓는 몸짓은 사라지지 않았다. 잊힌 사람도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자리를 남긴다는 사실을 토비는 직접 경험했다.
“잘못 배운 것 같네요.”
라베른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그 말이 규정이었습니다.”
“규정이면 무조건 맞아요?”
“아니오.”
라베른이 자기 입으로 그 답을 하고 놀랐다. 그 작은 말이 심리실의 기록 장치에 남았다. 루셀은 옳다거나 그르다고 즉시 판정하지 않았다. 대신 증언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왔는지 날짜와 장소를 적었다.
라베른은 이어 말했다.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은 압니다. 적어도 그 일의 기록을 지우지 않겠습니다.”
그의 고백이 끝나고서야, 책상 위의 손이 조금 덜 떨렸다.
라베른은 입술을 열었다가 멈췄다. 진술을 하기 전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늘 다음 명령이 먼저 떠올랐다. 누구를 찾아라, 누구의 이름을 빼앗아라, 반송 서류를 없애라. 그 명령은 고통스럽다는 감정마저 적당한 양식으로 바꾸어 보관하게 만들었다.
이번에는 말을 시작하기 전에 긴 침묵이 있었다. 심리실의 누군가가 대신 대답할까 봐 피엘은 팔을 들어 기다려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토비는 긴장한 손으로 성검의 끈을 매만졌고 이시아는 눈을 감고 서 있었다.
라베른은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처럼 느리게 말했다.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 말은 '명령 미이행'이라는 익숙한 항목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수첩에는 작은 새 창이 나타났다.
[집행자 진술: 자발적 거절 의사.]
[처리 상태: 검토 필요.]
루셀은 문서에 빨리 확정 도장을 찍지 않았다. 남의 결정을 대신 끝내는 일을 더는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저는 더 이상 이름을 지우고 싶지 않습니다.”
[진술 접수.]
[명령 집행자의 거부 의사 확인.]
검은 원이 우르르 울렸다. 원 안에서 서류 수천 장이 회오리쳤다. 제9명령은 하나의 집행자를 잃자 다른 집행자를 찾으려 들었다.
[대체 집행자 모집.]
[수신 우선순위: 동일 권한 보유자.]
이시아의 눈앞에 검은 봉투가 나타났다.
“나에게 오겠구나.”
여신은 조용히 봉투를 받아 들었다. 피엘이 놀라 손을 뻗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대신 읽지 마라. 이번에는 내가 받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시아는 서명을 확인한 뒤 봉투를 열었다. 원래는 받는 순간 자동으로 효력이 발생하는 집행권 위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봉투 뒷면을 뒤집어 빈 칸을 찾았다.
“거절합니다.”
문장은 너무 짧아서 오히려 방 안에 오래 울렸다. 봉투의 귀퉁이가 검게 탔다. 이시아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이 명령에 따라 사람들의 선택을 다시 지울 권한을 받지 않겠습니다.”
[집행권 위임 거절.]
[대체 집행자 검색 실패.]
벤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끝났나?”
“아닙니다.” 피엘이 말했다. “명령이 사라진 게 아니라 집행자가 없어진 것뿐입니다.”
제9명령을 만든 발신인이 남아 있었다. 라베른은 장갑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등의 아홉 번째 구멍에서 작은 회색 종이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내가 가진 마지막 개인 기록입니다.”
피엘이 종이를 받았다. 그 안에는 라베른의 옛 이름이 적혀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다른 문장이 있었다.
[첫 집행자에게.]
[당신이 보호해야 할 것은 명령이 아니라,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답장을 돌려보낼 수 있는 권리다.]
서명은 없었다. 단 하나의 도장만 있었다. 손잡이가 달린 여덟 번째 문의 모양이었다.
니메르가 종이를 보자 손을 떨었다.
“저 도장……. 내 제자들이 만들었던 거야.”
“그 아이들이요?” 토비가 물었다.
“예전에 여기서 일하던 아이들. 이름을 지우기 전에는 제8문을 고치겠다고 했지.”
피엘은 순간 첫 근무 때의 장면을 떠올렸다. 작은 방, 자신의 손을 잡은 또 하나의 천사, 그 뒤에서 편지를 들고 기다리던 인간 아이. 세 사람이 만든 것은 거창한 음모가 아니었다. 사라진 사람에게 답장할 길을 돌려주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그 시도마저 누군가에게 이용됐다.
“제8문은 누가 다시 열 수 있습니까?”
니메르는 오랫동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창고 한쪽 벽을 두드렸다.
“손잡이가 없으니 열쇠도 소용없어. 그 문을 처음으로 닫게 만든 사유에 답해야 해.”
이시아가 물었다.
“첫 번째 잘못된 신탁 말이군요.”
“그래. ‘반드시 행복해야 한다’는 말에 거절을 전달할 수 있으면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 신탁의 수신인은 세상의 모든 미래야. 한 사람이 대신 답하면 처음 잘못을 반복하는 셈이지.”
제9명령의 검은 원은 잠시 조용했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집행자가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그림자 같았다. 오스벨은 달걀을 들어 명령의 가장자리를 살폈다.
“마법적으로 보면 아주 위험하네. 이 명령은 아무도 실행하지 않아도 계속 대기할 수 있어. 누군가 힘든 날 서류를 읽지도 않고 도장을 찍는 순간 다시 움직일 거야.”
“그럼 찢어 버리면 되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원본이 무엇인지 모른 채 사본만 찢으면 다른 곳에서 다시 집행될 수 있지.”
피엘은 검은 원에 붙어 있던 인장의 옆면을 확대했다. 서명은 라베른의 것이었지만 원본 발신 번호는 공란이었다. 원본을 찾으려면 발신인에게 답장을 보낼 길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이 처음 찾아온 제8문의 문제로 돌아온 셈이었다.
“저는 숫자를 보겠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제9명령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몇 번이나 발령됐는지.”
“저는 편지의 재료를 보겠네.” 오스벨이 말했다. “정상 문서라면 남기지 않을 흠집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발신 경로를 추적하지.” 벤이 말했다. “계약은 항상 흔적을 남겨.”
토비는 잠시 셋을 보다가 성검을 땅에 세웠다.
“그럼 저는 사람들한테 물어볼게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역할을 이해했다. 그들이 무언가를 해결하려면 각자의 기술도 필요했지만, 어느 한 사람의 답만으로는 부족했다.
토비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모두를 대신하지 말고, 각자가 한 문장씩 쓰면 되지 않아요?”
루셀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곳의 사람들만으로는 부족하네.”
“그렇다고 오늘 모든 사람을 불러올 수는 없죠.” 토비가 답했다. “한 번에 문을 활짝 여는 대신 조금만 열어서 답장이 지나가게 하면 안 돼요?”
오스벨이 느리게 미소 지었다.
“물꼬를 트는 것이군.”
“예. 보리골 둑에서 그랬어요. 처음부터 큰 물길을 열면 마을이 떠내려가니까.”
니메르는 손잡이가 없는 문을 상상하듯 허공에 손을 뻗었다.
“제8문에는 예전에 작은 투입구가 있었어. 손잡이를 떼어도 그 구멍만은 남았을지 몰라.”
그때 창고 바깥에서 종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세 번. 높은 절벽에 매달려 있던 반송 종이 누군가의 답장에 맞춰 울리고 있었다.
피엘의 수첩에 마라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제0경로 보관인 마라입니다.]
[미해결 1,006건 중 직접 답장을 보내겠다는 수신인 11명 확인.]
[조건: 당사자 본인이 문장을 선택할 것. 수신인 정보 공개 범위는 개별 결정.]
토비가 피엘을 보았다.
“이제 첫 번째 물꼬를 틀 사람들이 있네요.”
피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을 대신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편지를 돌려보내려는 열한 명. 문은 그들이 두드려야 할 것이었다.
그때 라베른이 조용히 말했다.
“그분들에게 먼저 경고해야 합니다. 제8문의 투입구에는 편지를 받는 척하는 다른 존재가 있습니다.”
니메르의 얼굴이 굳었다.
“빈 발신인.”
라베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 답장을 훔쳐 자기 이름으로 새로운 신탁을 만드는 자입니다.”
제28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