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메르의 집에는 의자가 다섯 개 있었다.
거실을 채운 것은 가구보다 봉투였다. 천장에서는 반송 표시가 찍힌 편지들이 풍경처럼 매달려 있었고, 창문마다 낡은 분류표가 붙어 있었다. 집안 한쪽 벽에는 어린아이들이 키를 재듯 연필로 남긴 선이 있었다. 다만 그 선 옆의 이름들은 전부 지워져 있었다.
“앉아.” 니메르가 말했다. “여기 온 사람들은 대개 한 가지만 묻는데, 그 한 가지만 물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
피엘이 의자를 끌어왔다.
“제8문이 어디 있습니까?”
“봐라, 벌써 그 한 가지를 물었잖니.”
벤은 소리 없이 웃었다. 피엘은 귀가 붉어졌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제8문은 무슨 역할을 했습니까?”
니메르는 차를 네 잔 따랐다. 오스벨이 다섯 번째 빈 의자를 바라보자 노파가 말했다.
“마음대로 앉히지 말아 줘. 아직 누구 자리인지 모르거든.”
토비는 그 말을 듣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골에도 오래 비어 있던 그릇이 있었다. 누군가가 잊혔다고 해서 그 자리가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건 아니었다.
니메르는 손을 들어 주전자 뒤에 놓인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 우편국은 깨끗하고 작았다. 천사 둘과 인간 직원 넷이 웃고 있었다. 우체국 건너편에는 장날의 풍경이 흐릿하게 보였다.
“내가 일할 때는 편지를 보내려는 신도, 받으려는 사람도 여기 앉았지. 신이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이면 인간 직원이 차를 한 잔 더 권했고, 인간이 너무 두려워 말을 못 하면 천사가 기다려 줬어.”
“신이 인간 말을 들어요?” 토비가 물었다.
“들어야지. 편지를 왜 쓰겠니?”
벤은 오래된 사진을 들어 빛에 비췄다. 뒷면에는 퇴근 시간과 급여 기록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천사의 급여는 '감사 인사 한 번, 정중한 회신 세 통'이라고 적혀 있었다.
“급여가 이 모양이면 나라도 파업했겠어.”
“그땐 돈이 없어서가 아니야.” 니메르가 대꾸했다. “누군가 당신의 말을 들었다고 답하면 그게 일의 끝이라는 뜻이었지.”
피엘은 사진 속 하급 천사가 자기와 닮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낡았다. 그는 무턱대고 자기라고 단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억과 기록 모두 믿음직하지 못했다.
“옛날에는 신탁이 명령이 아니었어.” 니메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 어려운 일을 앞두고 답을 구하면, 발신인이 가능한 길 하나를 보여 줬지. 그 길을 택할지 말지는 받는 사람이 결정했어. 선택을 거절하면 제8문으로 답장이 돌아왔고.”
“그러면 발신인이 다른 길을 제시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 도울 방법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도 발신인의 몫이었거든.”
그 말은 피엘에게 낯설었다. 그의 교본에는 ‘신탁은 거스를 수 없는 상위 질서’라고 쓰여 있었다. 업무 실적은 배송 완료 건수로만 계산했고, 거절된 신탁은 ‘배달 실패’로 기록됐다.
“왜 바뀌었습니까?”
니메르는 찻잔 아래 오래된 천계 동전을 꺼냈다. 동전 앞면에는 해가 새겨져 있었고, 뒷면에는 비어 있는 의자가 있었다.
“처음엔 통계였어. 발신인은 자기 신탁이 몇 명의 삶을 나아지게 했는지 알고 싶어 했지. 그런데 거절이 늘면 실적이 나빠 보였어. 누군가 방법을 냈어. 반송 문을 닫으면 실패가 없어지는 거 아니냐고.”
토비가 한숨을 쉬었다.
“편지가 안 돌아오면 받는 사람이 만족했다고 치는 거군요.”
“그래. 그 뒤에는 보내는 이들이 답을 보지 않아도 됐지.”
오스벨이 수첩에 적었다. ‘반송 통로 폐쇄 = 책임의 역류 차단.’ 그는 잠시 필기구를 멈추고 니메르에게 물었다.
“여기 빈 이름들은 누구 것이오?”
니메르는 벽의 연필선을 바라봤다.
“반송을 도와주던 아이들이야. 그 아이들은 서류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어른들보다 빨리 알아챘지. 왜 자기 마음이 적힌 답장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느냐고 물었거든.”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죠?” 토비가 물었다.
“어떤 아이는 다 컸을 거야. 어떤 아이는 지워졌고. 어떤 아이는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웠어.”
그녀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비슷한 모양의 열쇠가 일곱 개 있었다. 여덟 번째 자리에는 먼지만 남았다.
“제8문 손잡이를 떼어 간 이가 남긴 물건이야. 문을 열쇠로 열려는 사람을 막으려고 일부러 일곱 개만 남겨 뒀지.”
벤이 상자를 살폈다.
“저건 자물쇠 열쇠가 아니잖아. 각 문 앞에서 권한을 증명하는 인장이지.”
“맞아. 손잡이는 문을 열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어. 손잡이를 잡는 사람이 ‘나는 이 편지를 받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다는 표시였지.”
“그럼 떼어 가면 누구도 거절하지 못하겠네요.” 피엘이 말했다.
니메르는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거절할 수 있어. 그 말을 전해 줄 길만 없어진 거야. 중요한 차이야.”
피엘은 그 차이를 오래 생각했다. 자신도 토비에게 잘못된 신탁을 전달하면서, 받는 사람이 거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신탁의 효력을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거절이라는 버튼이 수첩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제 잘못도 있습니다.”
니메르가 그를 바라봤다.
“무슨 잘못?”
“받는 이에게 없는 선택지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확인하지도 않았고요.”
“좋아. 그럼 이제 설명하면 되겠구나.”
니메르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다. 피엘은 자기 죄를 인정하는 일만으로 무언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이미 배웠다. 다음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 절차가 필요했다.
그날 저녁 니메르는 네 사람에게 반송 서류를 써 보게 했다. ‘수신인은 누구인가’, ‘발신인은 무엇을 약속했는가’, ‘수신인은 어느 부분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는가’, ‘되돌아온 말에 발신인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그는 빈 종이 위에 손을 올리고 오래전 근무실을 떠올렸다. 기억에는 경보음만 남아 있었다. 흰 벽 너머에서 누군가 울었고, 상급자는 '원래 주소를 묻지 말라'고 말했다. 그는 질문을 삼켰다. 질문을 하면 사고 수습이 늦어지고, 늦어지면 사람들을 더 위험하게 만든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잠깐만요.” 피엘이 말했다. “옛날에 우리가 사람들을 보호한다면서 누군가의 답장을 우선순위에서 미룬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정확한 사람과 날짜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니메르는 그의 손목을 살짝 붙들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무턱대고 이름을 적지 말거라. 확인할 수 없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 또 누군가를 없애게 될 테니.”
“기억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네가 이곳에 오지 않았느냐.”
피엘은 그 말을 듣고 종이에 조심스럽게 썼다. '과거 근무 관련 부분 기억 회복. 구체 내용 불확실. 추후 원본 대조 필요.' 그곳에서 그는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보고하는 데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엘은 세 번째 항목을 채우다 멈췄다.
“저는 지금 신탁을 받은 당사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왜 네가 대신 답하려고 해?”
피엘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니메르가 그를 향해 살짝 웃었다.
“잘 배웠네.”
토비가 자기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받았다.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가 썼다.
‘나는 용사가 되라는 명령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돕겠다는 마음까지 거절하지는 않습니다.’
니메르는 글을 읽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문장을 보낸 사람은 무척 놀라겠구나. 자기 말이랑 네 마음이 다른 줄 몰랐을 테니.”
벤도 한 장을 받았다. 그는 농담처럼 펜을 돌리다가 검은 동전을 꺼냈다. 보리골 계약에 증인으로 서명했던 바로 그 동전이었다.
“계약의 본문을 읽지 않고 증인이 된 걸 취소할 수는 없지?”
“이미 일어난 일을 없앨 수는 없어.” 니메르가 답했다. “다만 앞으로 그 계약을 어떻게 다룰지는 말할 수 있지.”
벤은 글자를 천천히 썼다. ‘나는 계약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증인이었습니다. 해당 기록의 공개와 재심사에 동의합니다. 이로 인한 제 책임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스벨은 양계 신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그 내용에 조건을 추가했다. ‘닭을 키우되 닭의 의사를 멋대로 해석하지 않는다. 또한 나는 여전히 마법 연구를 할 것이다.’
“닭은 인간 언어로 동의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그래서 건강과 행동을 잘 살피려는 거지.” 오스벨이 말했다. “내가 보낸 신탁도 그들에겐 간섭일 테니까.”
창밖에는 저녁놀 대신 보랏빛 종이들이 날렸다. 니메르는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천천히 문질렀다. 그녀는 오래전 마지막 출근 날을 이야기했다. 반송 종이 멎었을 때 모든 직원은 누가 줄을 끊었는지부터 물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우편함에는 답장이 쌓였고, 아무도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다.
“나는 매일 아침 편지를 열려고 했어. 그런데 받는 이가 아닌데 내용을 볼 수 없잖니.”
토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지 않고 기다리셨군요.”
“그렇게 오래 기다리다 보니 가끔은 기다리는 게 잘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더라. 누군가 도와 달라고 하는데 그 말을 못 읽는다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그래서 집을 안 떠나신 거예요?”
“떠나면 아무도 종소리를 듣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게 내 선택인지 두려움인지 나도 잘 몰라.”
피엘은 노파 앞에 있는 빈 의자를 바라봤다. 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자리가 아니어도 괜찮을 수 있었다. 니메르 자신이 돌아갈 자리를 남겨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피엘은 묻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대답을 들어야 할 권리는 없었다.
“언젠가 문이 다시 열리면 이 집을 떠나셔도 됩니다.”
니메르가 그를 바라봤다.
“그게 네 명령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다만 그런 선택도 있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그녀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모두가 웃었지만 니메르는 웃지 않았다. 그녀는 한 장의 마지막 서류를 피엘에게 건넸다.
거기에는 수신인과 발신인이 모두 같은 이름이었다.
[수신인: 피엘.]
[발신인: 피엘.]
[본문: 네가 처음 보낸 편지에 답하지 말았어야 했다.]
피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가 쓴 문서가 아닙니다.”
“네가 기억하는 동안에는 그럴 테지.”
“무슨 뜻입니까?”
니메르는 벽에서 낡은 그림을 떼어 냈다. 그림에는 손을 맞잡은 작은 천사 둘이 서 있었다. 한쪽은 오른손에 깃펜을 들었고 다른 쪽은 왼손에 들었다. 두 천사의 발밑에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길게 뻗어 있었다.
“첫 편지를 보낸 날, 너는 혼자가 아니었어.”
피엘은 그림을 바라봤다. 익숙한 얼굴 둘보다 낯선 것은 그 사이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였다.
“이 사람은 누구입니까?”
“너희가 처음으로 대신 결정한 사람.”
그때 빈 의자 하나가 끼익 소리를 냈다. 아무도 앉지 않았는데 의자가 한 뼘 뒤로 밀려났다.
니메르는 방문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그녀가 이야기를 더 듣기 전에.”
“누구요?” 토비가 물었다.
노파가 대답하려는 순간 집 밖에서 셋째 종이 울렸다. 끊어진 줄 때문에 울릴 수 없는 반송 종이었다.
[발신인 이의 신청 도착.]
[신청인: 이시아.]
[내용: 제8문을 열지 마라. 지금 열면 그 안의 봉투가 먼저 너희를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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