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 명령은 빛이 아니라 그림자로 내려왔다.
오스벨의 마법탑 마당에 있던 닭들이 한꺼번에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볕을 쪼이던 수탉은 날개를 어설프게 펼친 채 굳어 버렸고, 우물에서 퍼 올린 물방울은 양동이 가장자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마저 잠시 숨을 참는 듯했다.
피엘의 앞에 떠오른 검은 봉투는 손바닥만 했다. 그러나 봉투 뒤로 드리운 그림자는 탑의 벽을 넘고 숲 끝까지 뻗었다. 천계에서 가장 무서운 명령은 큰 소리로 읽히지 않았다. 작은 글씨가 정확한 수신자에게 닿는 것만으로 효력이 있었다.
[지상 체류 천사 피엘. 기록 말소 및 존재 소멸을 명한다.]
[집행 대기: 03:00]
“삼 분?”
피엘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 천계에서 징계를 받은 적은 많았다. 서류 반려, 월급 깃털 차감, 업무 효율 재교육. 하지만 소멸은 달랐다. 이름이 지워지면 함께 일한 동료의 기억에서도, 자신이 썼던 장부에서도 흔적이 사라진다. 한 번도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천사님, 왜 그렇게 하얗게 질리셨어요?”
토비는 서쪽 텃밭에서 뽑은 무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피엘은 그 무를 보고 엉뚱하게도 ‘저것을 먹을 기회는 다시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저를 없애라는 명령입니다.”
“누가요?”
“천계가요.”
“천계에 민원 넣을 데는 없어요?”
“있습니다. 다만 민원 접수자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토비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빨리 넣어야죠.”
피엘은 수첩을 펼쳤다. 항목을 찾는 손이 떨렸다. ‘소멸 집행 이의’, ‘명령의 적법성 확인’, ‘관할 부서 확인’. 첫 항목을 누르자 새 창이 떴다.
[집행 대상자 본인의 이의 제기는 접수되지 않습니다.]
“왜요?” 토비가 물었다.
“대상자가 스스로 살겠다고 하는 건 이해관계가 너무 뚜렷하니까요.”
“그건 누구나 그렇잖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벤이 울타리에서 뛰어내렸다. 구두 밑창이 돌바닥에 닿을 때마다 잿가루가 날렸다. 작은 뿔을 가린 검은 머리칼 사이로 악마 특유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오, 삼 분짜리 집행 명령. 천계가 널 꽤 싫어하는군.”
“도움이 안 되는 감상평은 사양합니다.”
“도와주려고 내려왔는데?”
“악마가 천사를 돕는다고요?”
“천사가 천사를 죽이려 하잖아. 이 정도면 우리 쪽이 상대적으로 친절해 보이겠는데.”
오스벨은 수첩에 적힌 숫자를 살폈다. 은백색 수염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시간이 흐르는 방식이 특이하군. 주변은 정지했는데 피엘에게만 집행 시간이 흐르고 있어. 마법으로 시계를 멈추는 일은 무의미하네.”
“그럼 방법이 없습니까?”
“마법사에게 묻지 말고 서류를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지. 자네가 그쪽 전문가 아닌가?”
전문가. 피엘은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삼백 년 동안 신탁을 나르면서 출근 시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자신이었다. 그런데 삼 분짜리 목숨 앞에서 남은 수단이라곤 업무 지침서뿐이었다.
수첩의 맨 아래에는 평소 아무도 읽지 않는 작은 문구가 있었다.
[공동 의무가 성립한 계약은 보호 의무자에 의한 집행 보류 신청 가능.]
피엘이 눈을 크게 떴다.
“공동 의무!”
“뭐가요?” 토비가 되물었다.
“당신이 받은 구원 신탁은 제 배송 업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사명을 수행하는 동안 관리자인 제가 사라지면 인계 서류가 필요해요. 그전에 이해당사자가 보류 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하면 되겠네요.”
“문제는….”
피엘이 항목을 눌렀다.
[보호 신청 자격 확인: 신성 계약의 수신인.]
[신성 계약의 보증인 또는 공동 수행자.]
[신성 계약으로 보호받는 제삼자.]
“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해요. 그리고 모두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토비가 즉시 손을 들었다.
“저요. 저 수신인이에요.”
그의 손에 있던 성검이 낮게 울렸다. 농사일을 마치고 흙까지 묻어 있는 검인데도 허공에 금빛 서명선이 생겼다. 토비는 무를 내려놓고 검 손잡이를 잡았다.
[첫 번째 확인 완료.]
[집행 대기: 01:46]
“두 번째는 나겠군.”
오스벨이 똑바로 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닭 모이를 연구하던 노인답지 않게 그의 로브 아래로 오래된 마법진이 떠올랐다.
“나는 원래 토벌 신탁의 수신인이었네. 배송이 잘못된 덕분에 이 농부와 연결됐지. 공동 수행자로 인정되지 않겠나?”
“오스벨 님이 신탁을 받긴 했지만….”
“닭 열두 마리의 생산량을 개선하라는 엄숙한 명령을 받았지.”
그가 품에서 달걀을 꺼냈다. 미세한 금빛 무늬가 감긴 달걀이었다.
“이것도 신성 계약의 산물일세.”
달걀이 빛났다. 문서가 마지못해 두 번째 칸을 채웠다.
[두 번째 확인 완료.]
[집행 대기: 00:58]
모두 벤을 돌아보았다.
“왜.”
“제삼자요.” 피엘이 말했다.
벤은 입술을 비틀었다.
“천사가 왜 악마에게 자기 목숨을 맡기는 건데?”
“당신이 먼저 도와주겠다고 했잖아요.”
“말로 도와주겠다는 거였지. 서명하겠다는 말은 안 했는데.”
“제가 사라지면 오배송을 목격했다는 당신 주장도 확인할 사람이 없어집니다.”
벤의 눈빛이 바뀌었다. 피엘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악마는 처음부터 자신을 놀리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었다. 천 건이 넘는 신탁을 바꾼 누군가를 벤도 쫓고 있었다.
“서명하면 내 이름도 천계에 남겠지?”
“그렇습니다.”
“그쪽에서 추적해 오면?”
“제 민원 창구로 접수해 드리죠.”
“정말 최악의 보호 약속이군.”
그때 숫자가 서른을 가리켰다. 피엘의 오른쪽 날개 끝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먼지처럼 부스러진 깃털이 공중에서 사라졌다. 아픔은 없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끔찍했다.
토비가 벤의 코트 소매를 움켜쥐었다.
“저분이 잘못했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잘못한 사람을 그냥 지워 버리면 누가 바로잡아요?”
“넌 내게 선의를 기대하는 건가?”
“아뇨. 방금 무서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사람을 찾으려면 피엘 씨가 필요해 보입니다.”
벤이 짧게 웃었다. 아주 잠깐, 비웃음이 아닌 웃음이었다.
“인간들은 가끔 쓸데없이 정확해.”
그가 서명선에 손가락을 댔다. 붉은 불꽃이 일었다가 금빛 문서 위에서 지직 소리를 냈다. 천계의 규정이 악마의 이름을 거부하고 있었다.
[비인가 종족.]
“거봐.”
“잠깐!” 피엘이 외쳤다. “제삼자 자격은 종족이 아니라 보호받는 사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업무 규정 제칠장, 신탁 집행의 평등 원칙!”
그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 가장자리에 이의 제기 번호를 적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으로 업무용 도장을 찍었다.
쿵.
도장이 떨어지자 문서가 멈칫했다.
[차별적 접수 거부에 대한 내부 감사 자동 개시.]
[세 번째 확인 완료.]
피엘의 날개가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 숫자는 00:01에서 멈췄다. 검은 봉투가 접히더니 작고 납작한 쇳조각으로 변해 땅에 떨어졌다.
[집행 잠정 보류: 72시간.]
[보류 사유: 보호 신청 접수 및 처리 기관 충돌.]
“살았다!”
토비가 펄쩍 뛰었다. 오스벨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무심코 달걀을 높이 던졌다. 다행히 둥실 떠오른 달걀은 마법진에 붙잡혔다.
그러나 피엘은 웃지 못했다. 날개 끝의 작은 부분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잠시 보류된 것일 뿐, 소멸 명령은 취소되지 않았다.
토비는 보류된 쇳조각을 발끝으로 건드렸다. 쇳조각은 살아 있는 곤충처럼 몸을 웅크렸다가 다시 펼쳐졌다. 토비가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거 도장 찍힌 게 아니라 정말 살아 있는 것 같은데요?”
“신탁은 문서인 동시에 계약의 집행체입니다. 저 쇳조각도 명령을 수행하려는 작은 존재죠.”
“명령이 잘못됐는지는 생각 안 해요?”
“그러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으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 피엘은 스스로 낯이 뜨거워졌다. 조금 전까지 자신도 천계의 규칙이라면 언제나 옳다고 생각하던 존재였으니까. 토비는 쇳조각에서 떨어져 오스벨의 마당으로 향했다. 작은 닭들이 먹이를 찾느라 흙을 쪼고 있었다.
“그럼 이 닭들은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먹고 싶은 걸 찾아다니잖아요.”
“닭과 신탁을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피엘이 답했다.
오스벨이 끼어들었다.
“꼭 곤란할 건 없네. 이 녀석들에게 먹이를 정해 줘도 자기 마음에 드는 것만 고르는 데 말이야. 자유 의지는 어쩌면 알을 낳는 능력보다 중요한 조건인지도 모르지.”
벤이 혀를 찼다.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마법사가 닭의 자유 의지로 토론하다니. 전성기에는 사악한 용과 싸웠다더니 그동안 많이 변했군.”
“전성기에는 용의 심장을 얼리는 마법을 연구했지. 요즘은 달걀이 깨지지 않게 얼리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네. 후자가 훨씬 섬세한 일일세.”
피엘은 벤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마당의 벽돌이 차곡차곡 쌓인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수십 년 전 여러 건물이 합쳐진 흔적이었다. 오스벨은 성탑을 높이는 대신 아래층을 넓혀 마을 사람들이 비가 올 때 피할 공간을 만들었다고 했다. 마법사는 세상을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비를 피할 지붕 하나를 남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피엘이 수첩을 펼쳐 토비의 구원 신탁을 다시 읽었다. 첫 줄에는 대륙의 미래를 구하라는 거창한 문장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에는 사명을 다하지 못하면 계약을 종료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몇 명을 구해야 하는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누구에게 의견을 물어야 하는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토비 씨. 이 계약은 정말 이상합니다.”
“이제야요?”
“구원해야 할 대상조차 지정되지 않았어요. 성공의 기준도 없습니다. 명령을 받는 사람은 인생을 걸어야 하는데, 명령을 내린 쪽은 언제 끝나는지도 알려 주지 않은 겁니다.”
“그런 일을 시키면 우리 마을에선 아무도 안 나가요.”
토비는 자루에서 감자 하나를 꺼냈다. 흙이 묻은 작고 못생긴 감자였다.
“이걸 심으면 무엇이 나올지는 알죠. 씨감자를 고르고 물을 주면 대충 얼마나 자랄지도요. 그런데 언제 끝날지 모른 채 마왕을 잡으러 가라면,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합니까?”
피엘은 감자를 받아 들었다. 그에게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질문이었다.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니까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시작과 끝을 알 권리가 있었다.
그는 수첩 빈칸에 작게 적었다.
[임시 관찰: 신탁의 정당성은 전달 여부와 별개로 확인할 필요가 있음.]
도장 대신 자신의 손글씨로 쓴 첫 기록이었다. 누가 승인할지는 몰랐다. 다만 누군가는 남겨야 했다.
“사흘 안에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무슨 증거요?”
“제가 오배송을 승인하지 않았다는 증거요. 그리고 이 명령이 적법하게 내려온 것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벤은 손가락을 털며 말했다.
“서명을 도용한 놈을 찾아야겠네. 그 전에 알아 둬야 할 게 하나 있어.”
그는 작은 흑요석 조각을 꺼냈다. 겉면에는 피엘의 업무용 인장과 똑같은 모양이 새겨져 있었다. 뒤집자 인장의 가운데에 있어야 할 일곱 개의 별 대신 아홉 개의 구멍이 있었다.
“천계 봉인은 빛으로 만들지만, 그걸 복제하려면 그림자가 필요하지.”
“그게 왜 당신한테 있습니까?”
“누군가 내 지하 거래소에서 그림자를 샀거든.”
피엘이 숨을 삼켰다.
“판매 기록은요?”
“여기.”
벤은 조각을 건네지 않고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검은 표면에 희미한 날짜가 떠올랐다.
[거래 시각: 금일 오전.]
[구매자 확인: 피엘.]
“말도 안 됩니다. 그 시간에 저는….”
“배식 봉사 중이었다고? 알아. 그 때문에 이상한 거야.”
벤이 이어 말했다.
“내가 본 구매자는 네 얼굴을 하고 있었어. 네 이름으로 거래했고, 네 목소리로 말했다.”
오스벨의 눈이 가늘어졌다.
“변신술일 수도 있겠군.”
“아니.” 벤이 단호하게 잘랐다. “악마의 거래는 겉모습이 아니라 영혼의 결을 읽어. 그날 계약 상대에게는 정말로 피엘의 영혼 서명이 있었어.”
피엘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가슴을 쓸었다. 천계의 서명은 손글씨가 아니었다. 이름과 존재 자체를 묶은 흔적이었다. 그것이 똑같다는 건 누군가 도장을 베꼈다는 이야기보다 훨씬 위험했다.
“그러면 제가 두 사람이란 뜻인가요?”
“아직은 몰라.”
벤은 흑요석을 쥐었다.
“하지만 네가 아닌 네가 한 거래라는 건 확실해.”
그때 소멸 명령의 쇳조각이 혼자 움직였다. 땅을 긁으며 네 사람의 발 앞까지 기어오더니 옅은 글자가 새겨졌다.
[보류 중에도 증거 인멸 방지 조치 시행.]
[대상자의 과거 업무 이력을 순차적으로 회수합니다.]
피엘이 제복 주머니를 뒤졌다. 늘 넣어 다니던 첫 근무 배치 통지서가 없었다. 삼백 년 동안 간직해 온 종이였다.
그는 어떤 부서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는지 떠올리려 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72시간은 단순히 목숨이 남은 시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미 그의 과거부터 지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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