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우편함은 사람 키보다 낮았다. 제1문 설계 열람실 지하실에서 발견한 물건치고는 초라했다. 발견 뒤 사흘 동안 외부 회선을 봉인하고 내부 구조를 감정하는 사이, 최종 신탁 예정일은 이제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금칠도 없었고, 날개 장식도 없었다. 다만 뚜껑에 적힌 글자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질문 종료 장치.]
서온이 접근 기록을 분석했다. [이 장치는 최종 신탁을 발송하기 직전, 아직 답장이 도착하지 않은 모든 사람의 칸을 자동으로 채우도록 설계됐어.]
“원래 그런 용도였습니까?” 피엘은 에르다에게 물었다.
에르다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만들었던 건 주소를 찾지 못한 구조 요청을 보관하는 상자였어요. 누구도 거절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쓰려는 상자가 아니었죠.”
“그걸 누가 바꿨습니까?”
“나사 하나를 바꾼 사람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장치를 새로 연결한 사람이 있었을 테고, 그걸 계속 돌려도 된다고 승인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비라는 우편함을 열기 전에 봉인 번호를 세 군데 기록했다. 오래된 구조 장치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무작정 부수면, 나중에는 그 안의 실제 피해 기록도 사라질 수 있었다. 하린은 임시 보전 명령을 읽었다. 독립 감정인 벤이 마력 흔적을 대조하고, 서로가 제8문 반송망에 대기했다.
토비는 삐걱거리는 바닥을 발로 눌러 보았다. “보물 상자를 열 때는 보통 함정이 나오던데. 이건 열기도 전에 함정이네요.”
뚜껑이 세 손가락 높이만큼 열리자 서온이 경고했다. [모든 반송 주소를 ‘열람 불필요’로 바꾸고 있어.]
“닫아요!” 세아가 외쳤다.
사일이 오래된 손잡이를 당겨 열림을 막았다. 하지만 장치 안에서는 카드들이 계속 움직였다. 뚜껑을 닫는 것과 발송 신호를 끊는 것은 달랐다.
그들은 긴급 전원을 내리고 기록용 회선을 남겨 둔 상태로 장치를 시험대로 옮겼다. 비라가 공개망의 복제된 회로만 잘라 내자 작은 창문에 숫자가 나타났다. ‘확인할 수 없는 수신인’의 수였다. 그 숫자는 누구나 쉽게 놀랄 만큼 컸다. 이름을 말소당한 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 수신 기록 자체를 받은 적 없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들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질문을 받지 못했는지 보여 주는 숫자군요.” 세아가 말했다.
“저 기계는 그걸 동의하는 사람의 숫자라고 부르겠죠.” 서로가 답했다.
피엘은 임시 시민 협의회를 소집했다. 제1문 우편 직원, 제2문 구조 담당자, 제6문의 로마, 제8문의 반송 창구, 마계의 외부 감정인이 각자 회선으로 참여했다. 마르켈은 승인 권한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건의 증언자로 호출됐다. 그에게는 자신의 기록을 읽고 바로잡을 권리가 있었지만, 회의를 종료할 권한은 없었다.
의견은 갈렸다. 어떤 이는 장치를 폭파하자고 했고, 어떤 이는 열흘 동안 신탁 발송을 모두 멈추자고 했다. 제인은 폭우 예보의 신호가 끊기면 실제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로마는 자동 장치가 또다시 거절을 지울까 두렵다고 했다. 피엘은 누구의 우려도 과장이라고 적지 않았다.
하린이 새로운 시험을 제안했다. 최종 완결 명령의 발신 권한과 긴급 구조 연락망의 실제 작동을 분리하는 것이었다. 일단 한 지역에서 짧게 시도하고, 위험이 생기면 주민들에게 사전에 공지한 수동망으로 되돌아오도록 계획했다.
시험 지역은 여울 마을이었다. 모라와 리오가 구조 연락판을 점검했고, 토비는 배를 가진 사람들의 자발적 당번표를 만들었다. 누구도 약속하지 않은 시간을 채워 넣지 않았다.
여울 마을에서는 임시 연락망의 첫 운영을 기념할 행사 대신 소방 훈련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 방패를 들고 물길을 나눴고, 모라는 부엌에서 끓인 수프를 운동장으로 가져왔다. 종이 한 번 울리면 모두가 무조건 달려가는 방식이 아니었다. 담당자는 어떤 종류의 경보인지 확인한 뒤 각자 맡은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낮은 지대의 낡은 집에 사는 남자가 뒷문으로 대피하는 길을 설명하다가 자신은 그 통로를 사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리가 불편해 계단을 내려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피엘은 지도에서 통로를 바꾸자고 제안했지만, 남자는 자신에게 먼저 물어봐 달라고 했다. 그는 이웃의 손수레를 이용할 수 있고, 집 앞 넓은 길로 나가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 의견을 반영하자 훈련의 이동 시간은 조금 늘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동할 수 없는 사람을 가장 빠른 탈출 지도 위에 남겨 두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모라는 시간을 기록하고, 다음 훈련까지 손수레에 필요한 손잡이를 보수하기로 했다.
“안전을 위해 모두 똑같은 길을 따르라고 하던 때보다 확인할 게 많네요.” 리오가 말했다.
“그렇지만 도착할 수 있는 길이 생겼지요.” 모라가 답했다.
첫 시험은 성공했다. 구조 요청이 사람 손을 거쳐 도착했고, 거절 기록도 그대로 남았다. 그러나 두 번째 시험에서 어두운 글씨가 덧붙었다.
[전체 연락망 일시 지연 발생. 질문 종료 장치에 긴급 복구 권한 요청.]
서온이 즉시 확인했다. [실제 지연은 삼십 초야. 그런데 지연 기록을 열흘로 부풀려 자동 승인 근거로 삼으려 해.]
“또 숫자를 바꾸는군.” 벤이 말했다.
“숫자를 바꾸지 않아도 늦어지는 사람은 있겠죠.” 피엘이 답했다. “그래서 지연 사유와 복구 시간을 그대로 공개해야 합니다. 오작동을 숨기는 순간 저 장치가 내세울 핑계가 생겨요.”
해 질 무렵 여울 마을에서 답장이 왔다.
‘우리는 시험망을 계속 사용하겠습니다. 내일 상태가 나빠지면 다시 바꾸고 싶습니다.’
그 아래 모라가 덧붙였다. ‘선택을 바꿀 수 있어야 선택입니다.’
피엘은 답장을 세 번 읽었다. 그날 밤, 검은 우편함은 새로운 글씨를 토해 냈다.
[최종 신탁 준비 단계 완료.]
[실제 답장 차단 실패.]
[추가 집행 대상: 답장을 받는 자.]
서로의 이름이 그 아래에 나타났다. 원본 직인의 그림자가 제8문을 향해 길게 뻗었다.
제196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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