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문의 광장에서는 종이 냄새보다 음식 냄새가 먼저 났다. 주민들이 긴 줄을 기다리는 동안 먹을 수 있도록 빵과 따뜻한 차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첫 번째 탁자에는 편지를 쓸 종이가, 두 번째에는 한 문장씩 읽어 주는 안내판이, 세 번째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빈 봉투가 놓였다.
서로가 이름표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반대 서명을 모으는 날이 아닙니다. 어떤 답도 쓰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시험하는 날이에요.”
토비는 빈 봉투 앞에 서 있었다. “저는 원래 농부였는데 자꾸 서류 교육을 듣네요. 집에 돌아가면 밭에 ‘본 작물은 수확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음’이라고 붙일 것 같습니다.”
로마가 웃으며 맞받았다. “그럼 수확할 때 그 말하는 감자부터 가져오세요.”
웃음은 줄을 따라 번졌다. 그러나 누가 첫 편지를 쓰겠느냐는 질문에는 모두가 잠깐 망설였다. 제6문에서 이름이 지워졌던 청년은 타인이 자신의 답장을 알아볼까 두려워했다. 제4문의 아린은 또다시 자신의 목소리가 복제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입술을 다물었다. 제5문에서 기억을 보관했던 사람은 자기가 쓴 문장이 정말 자기 선택인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세아는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에 자기 이름을 쓰고 한 번 지운 뒤, 다시 썼다. “제가 마음을 바꿨다고 해서 예전 글씨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록에는 바꾼 시각을 함께 남겨야 하죠.”
하루는 수어로 '거절'이라는 손짓을 보였다. 통역사가 그것을 소리로 바꾸기 전에, 서로가 제8문의 반송 판에 원문 손짓이 남았는지 확인했다. 아린은 자신의 실제 목소리와 위조된 목소리를 서로 다른 봉투에 넣었다. 그녀의 허락 없이는 어느 쪽도 방송하지 않기로 했다.
세아가 아이들 앞에 섰다. 아이 하나가 물었다. “우리는 아직 어려서 답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요?”
“당장 내일 위험하다는 소식은 보호자가 함께 확인해야겠죠. 하지만 네가 어른이 될 때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약속은 지금 누군가 대신 쓸 수 없어요.”
“그럼 아직 답 못 하는 건 잘못이 아니군요.”
“그렇죠.”
광장의 다른 쪽에서는 작은 인형극이 열렸다. 제2문의 구조 직원들이 아이들을 위해 만든 짧은 이야기였다. 인형은 길에서 울고 있는 친구를 발견하고, 도와주겠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어떤 아이는 도와준다고 소리쳤고, 다른 아이는 어른을 불러야 한다고 했다.
“그럼 안 도와준 아이는 나쁜 아이예요?” 한 아이가 물었다.
인형극을 맡은 직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도울 수 없는 일을 만났을 때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해도 된단다.”
무대 뒤에서 토비는 인형이 걸린 줄을 풀다가 매듭을 더 엉키게 만들었다. 벤이 그것을 보고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아이들은 인형 하나가 거꾸로 매달리자 크게 웃었다. 그 짧은 소란 사이에도 새 편지를 내러 온 부모들이 창구로 향했다. 누구도 줄을 빨리 줄이기 위해 아이의 이름으로 답장을 대신 써 주지 않았다.
이후 인형극에 쓰던 종이 인형을 접수대 옆에 놓았다. 답장을 쓰기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잠시 그것을 만지며 쉬었다. 그날 가장 많이 반복된 질문은 동의도 거절도 아니었다. '조금 더 생각해도 돼요?'라는 물음이었다. 직원들은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서온은 접수량을 세고 있었다. 하루 만에 들어온 답장은 여러 문을 거쳐 수천 건이 되었지만, 그는 아무 숫자도 ‘동의율’로 부르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같은 사람이 다른 문제에 서로 다른 뜻을 밝힌 경우도 있었다. 무엇보다 공용 권한이 발송한 문서를 애초에 받아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새 분류 기준에서 위험한 건 중복이야.] 서온이 말했다. [한 사람의 ‘도움은 계속 받고 싶다’라는 답이 ‘미래 신탁을 받겠다’라는 답으로 옮겨 붙을 수 있어.]
벤이 두 봉투를 손끝에 걸었다. “그런 조항을 적어 두면 마계에선 손해 배상을 각오해야 하지. 문제는 천계에서 그동안 배상이 누구에게 갔느냐는 거야.”
일몰 무렵 제7문의 채무 기록을 가지고 온 한 부부가 편지 접수대 앞에 섰다. 남편은 부당한 미래 채무를 거절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대신해 아무 약속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두 사람이 서명하려 하자 기록판이 번쩍였다.
[가족 대표 응답 감지. 동일 가구 전체 수신인 처리 가능.]
“안 됩니다.” 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족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닙니다.”
접수대 뒤의 자동 장치가 작은 날개를 펼쳤다. 오래전 제0경로의 분류 장치였다. 다른 문에서 수리한 장비 한 개가 재사용되면서 문제의 조건이 그대로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서온은 강제로 명령을 지우지 않았다. 직원들이 안전 전원을 내리고, 하린에게 재사용 기록을 넘겼다. 봉투들은 수작업으로 다시 분리됐다.
부부는 한참 뒤 각자의 답장을 남겼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칸은 그대로 비워 두었다.
밤이 깊어지자 토비가 탁자에 엎드렸다. 피엘은 그의 앞에 수건을 놓아 주었다.
“당신 답장은 썼습니까?”
“예. 그런데 아직 안 냈습니다.”
토비는 종이를 보여 주었다. 용사가 되라는 오래된 신탁의 사본 옆에 작은 글씨가 있었다.
‘저는 세상을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 명령 때문에 남을 돕지는 않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도운 날도 있었고, 하기 싫어서 집에 간 날도 있었습니다.’
피엘이 물었다. “다음 문장은요?”
“아직 못 정했어요. 집에 돌아가면 농사를 다시 지을 겁니다. 그런데 필요하면 또 사람을 구하러 오고 싶기도 해요. 둘 중 하나만 답하면 안 될까요?”
“둘 다 당신의 답입니다.”
토비가 종이를 접자 빈칸이 아직 남았다. 고작 한 줄이었지만, 그 작은 빈자리가 제0경로의 거대한 기계보다 더 많은 미래를 허락하는 것 같았다.
그때 천막 밖에서 우편 종이 하나가 떨어졌다.
[답장 집계 완료 예상 시점: 새벽 05:17.]
[무응답 자동 확인 절차 준비 완료.]
서로는 봉투를 접수함에 넣는 손을 멈췄다. 답장을 받는 창구가 많아질수록 무응답도 더 많이 보이는 구조였다. 관리실은 그것마저 마지막 서명에 사용하려 하고 있었다.
제19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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