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바람 마을은 계절을 늦게 받는 곳이었다. 아래쪽 평원은 가을 추수를 끝냈는데, 마을 입구의 자작나무에는 아직 여름 잎이 몇 장 남아 있었다. 바람이 언덕을 넘을 때마다 세 개의 풍차가 서로 다른 속도로 돌았다. 가장 작은 풍차 아래에는 시계 수리소가 있었다.
문 앞 간판은 손으로 쓴 것이었다.
‘고장 난 시계는 고칩니다. 지나간 시간은 고치지 않습니다.’
토비가 간판을 읽고 손목을 만졌다. 손목시계는 없었다. 대신 밭에서 쓰는 해시계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지나간 시간이 제멋대로 바뀌는 걸 봤으니 좋은 가게 같네요.”
문을 열자 종소리가 났다. 천계 경보처럼 높지 않았다. 손님이 왔다는 사실만 알려 주는 평범한 종이었다.
작업대 앞 여자는 작은 돋보기를 눈에 걸고 있었다. 은색 머리를 땋았고 왼손 엄지에 붉은 실을 감았다. 그녀는 피엘을 한 번 본 뒤 시계 부품을 내려놓았다.
“장부가 결국 당신을 데려왔군요.”
“에르다 씨입니까?”
“그렇게 불렸죠. 지금은 그냥 수리공입니다.”
피엘은 봉투를 꺼내 놓았다. “삼백 년 전 서명이 발견됐습니다. 그분이 남긴 기록과 오늘의 신탁 조작을 구분하려고 왔습니다.”
에르다는 봉투를 열지 않았다. “저 종이가 내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도 당신에게 유리하지 않을 텐데요.”
“저에게 유리한 답보다 사실이 필요합니다.”
“사실을 얻고 나면 누가 그걸로 무엇을 할지도 생각하셔야겠죠.”
에르다는 가게 문에 ‘잠시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었다. 그제야 오래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삼백 년 전, 서리바람 마을에는 홍수 예보를 담당하는 관측소가 있었다. 아래쪽 강변의 구호 급식소에서 구조 요청이 올라왔지만, 천계의 발송 명부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등록돼 있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사람에게 보내는 구조 신탁은 허가되지 않았다. 에르다는 당시 우편망을 설계하던 민간 기술자였다. 장부 속에서 이름 대신 좌표만 남은 요청들을 보며, 언젠가는 그 요청이 도착할 곳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주소로 보내도록 만들었군요.” 벤이 말했다.
에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의 문 앞에 소식을 놓는 것까지가 제 생각이었어요. ‘당신이 직접 이 사람을 구하라’고 명령하는 건 아니었죠.”
그녀는 낡은 도면 하나를 펼쳤다. 선 두 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작은 네모가 있었다.
[대체 안내 경로. 수신 시 의무 발생 없음. 원수신인에게 재확인 필요.]
“원래는 농부에게 ‘강변에 사람이 위험하다’는 편지를 보내고 싶었어요. 가까운 사람에게 소식을 알려 주면 구조선을 부를 수 있으니까. 그런데 관리실에서 이 도면을 보더니, 안내 문구는 긴급 상황의 속도를 늦춘다고 했습니다.”
세아가 물었다. “그때부터 신탁이라는 명령으로 바뀌었습니까?”
“첫 개조는 구조 인력을 빨리 보내기 위한 것이었어요. 두 번째는 책임자를 하나로 정하기 위해서. 세 번째부터는 제가 관여할 수 없었죠.”
수리소의 벽에는 멈춘 시계가 일곱 개 걸려 있었다. 각각 다른 시각을 가리켰지만 모두 바늘 아래 작은 종이가 붙어 있었다. ‘다른 사람의 결혼식’, ‘노인의 마지막 약속’, ‘고장 난 배달 종’, ‘돌아온 아이의 생일’. 시계를 고칠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이 특정 시각을 기억하기 위해 그대로 두어 달라고 부탁한 것이었다.
“이 가게에 천계 검문이 들어온 적은 없습니까?” 세아가 물었다.
“수없이 있었죠. 생전에 했던 일을 증명하라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손님 수리 내역과는 별개로 내 인생을 증명하는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에르다는 벽의 선반을 가리켰다. 안에는 수리 날짜만 적힌 종이가 묶여 있었다. 누구의 시계인지 공개하지 않고도 같은 가게에서 삼십 년 동안 매일 일을 했다는 사실은 보여 줄 수 있었다.
“삼백 년을 살았다는 말입니까?” 토비가 물었다.
“천계의 긴급 우편망에 오래 묶인 사람들은 시간이 똑같이 지나가지 않아요. 저는 오래전 설계가 끝날 때까지 유지보수 담당자로 남아야 한다는 계약에 묶였었죠. 풀렸을 때는 밖의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있었습니다.”
벤이 계약 문구를 보고 혀를 찼다. “유지보수 기간을 ‘시스템이 완성될 때까지’라고 써 놓다니, 악마라도 이런 계약은 고객에게 다시 읽어 줘야 합니다.”
“읽어 줬다면 제가 서명했을까요?” 에르다가 물었다.
벤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랬을 수도 있죠. 다만 그때는 당신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남았겠죠.”
에르다는 벤에게 처음으로 짧은 미소를 보였다. 오래된 탁자에는 수리를 기다리는 시계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중 가장 작은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에르다는 찻주전자를 올렸다. 물이 끓는 사이 그녀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온은 그 떨림을 스캔하지 않았다. 앞선 사건을 겪으며 누군가의 몸에서 정보를 읽어 내는 일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임을 배웠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나요?” 피엘이 물었다.
“말했어요. 설계 변경 반대서를 열세 장 썼죠. 열세 장 모두 오배송 사고 책임자 본인에게 반송됐습니다.”
에르다는 작은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자기 손으로 만든 기계식 발송 알림기가 있었다. 종이 끼면 빨간 바늘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하지만 바늘은 부러져 있었다.
“전 떠났고, 마을은 살아남았어요. 하지만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엉뚱한 명령을 받았죠. 처음엔 우연처럼 보였어요. 나중에는 아니란 걸 알았고요.”
토비가 조용히 말했다. “저도 그런 명령을 받았어요. 농사짓던 날 갑자기 세상을 구하라고요.”
에르다는 고개를 숙였다. “그 편지에 제 잘못이 한 조각 들어 있을 겁니다.”
피엘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직 확인할 사실이 남아 있었다. 대신 물었다.
“첫 번째 편지를 받을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에르다가 작업대 밑에서 낡은 회중시계를 꺼냈다. 뒷면에는 네 개의 원이 새겨져 있었다.
“정확히는 사람 네 명이었어요. 하나를 골라서는 안 됐습니다. 그런데 원본 장부에는 한 명만 남았을 겁니다.”
그때 수리소 밖 풍차가 동시에 멈췄다. 세 풍차가 같은 방향을 향했다. 마을 시계탑에서 종이 열두 번 울렸다. 아직 오전 열 시였는데도.
서온이 경고를 띄웠다.
[이 지역의 구조 요청 자동 발신이 시작됐어. 발신인: 에르다.]
에르다가 부러진 바늘을 내려놓았다. “제가 여기 있다고 누군가 알아냈군요.”
제18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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