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은 봉투에 손대지 않은 채 봉인 번호부터 읽었다. 여섯 장은 기존 심리에서 발급한 복원 확인서와 번호가 같았다. 일곱 번째는 표지조차 없었다. 한쪽 모서리가 접혀 있고 종이에서 밀가루 냄새가 났다.
“누가 여기까지 들고 온 겁니까?” 세아가 물었다.
서온은 발송 경로를 추적했다. [발송 기록 없음. 그런데 진본 보존 표식은 있어. 이 종이는 오늘 새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피엘은 일곱 번째 종이를 곧장 복원 건수에 더하지 않았다. 서류 한 장이 있다고 해결됐다고 적는 것은 그들이 맞서 싸운 방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별도의 미확인 문서로 보존하고, 봉인이 만들어진 장소를 찾기로 했다.
사일은 조망실 밖의 아침을 처음 맞았다. 삼백 년 동안 구름의 색이 이렇게 자주 바뀐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지는 그에게 담요를 주었다. 두 사람은 한참 나란히 서 있었다. 사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만들고 고치고 모른 체한 기록이 많네. 증언하겠어. 하지만 내가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기억하지 못하는 건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면 돼.” 아지가 대답했다. “그걸 대신 써 줄 사람을 찾지는 말고.”
그날 제6문의 진료소에서는 주소가 지워졌던 아이의 이름으로 종이 진료기록이 이어졌다. 제1문의 미나는 임시 우편창구를 두 사람에게 인계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제7문의 관측소에서는 폭풍 예보가 제때 나갔다. 완전성 회수기는 멈췄지만 현장의 일은 계속됐고, 실제로 사람들을 도운 직원들의 이름이 장부에 남았다.
토비는 시장에서 작은 빵 두 개를 샀다. 하나는 피엘에게 건넸고 하나는 자기가 먹었다. “천계 사건을 쫓아다니느라 봄 파종이 끝나겠어요.”
“돌아가셔도 됩니다.” 피엘이 말했다.
“당연하죠. 허락받아야 하는 일도 아닌데.” 토비가 웃었다. “하지만 다음 사건이 농부가 보면 바로 알 만한 문제라면 편지는 보내 주세요. 제가 받을지 말지는 그때 결정하겠습니다.”
벤이 그 말을 듣고 수첩을 펼쳤다. 악마의 계약 수첩 한구석에는 각 문이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적혀 있었다. 피해 보상, 이름 복구, 억지로 발송된 신탁의 효력, 임시 구조 회선의 정규화. 대부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대한 사건을 하나 이겼더니 할 일이 더 많이 보이네.” 벤이 말했다.
“안 보였던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 거겠죠.” 세아가 답했다.
하린의 심리실은 긴급 중지 결정의 본문을 공고했다. 공개할 수 없는 개인 기록은 익명화했고, 피해자가 자신에게 어떤 조치가 적용됐는지 확인하는 창구를 따로 열었다. 사일과 켈린, 관리실의 책임은 각각 확인하기로 했으며 누구에게도 일괄 면책이 주어지지 않았다.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제0경로 미해결 오배송은 1,006건, 복원 완료 6건으로 유지됐다. 제8문의 임시 창구가 생겼다고 숫자가 저절로 좋아지지는 않았다.
제8문의 오래된 제본실에서는 작은 환영 자리가 마련됐다. 케이크도 폭죽도 없었다. 서로가 처음 받은 정식 급여 명세서와 자신의 이름으로 만든 조그만 열쇠 하나가 놓였을 뿐이다. 열쇠는 우편함의 것이 아니라 그가 따로 쓰기로 한 작은 방의 것이었다.
“혼자 살면 아주 시끄러울 거예요.” 토비가 말했다. “누가 밥을 챙기라고 명령하지 않으니까 배고플 때까지 모를 수도 있죠.”
“저는 아직 배고픔이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서로가 대답했다. “기계가 시키는 대로만 있던 시간이 더 길어서요.”
피엘은 그를 바라봤다. 닮은 얼굴이기에 더더욱 자신의 삶을 기준으로 조언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세아가 먼저 쉬는 시간에 할 일을 물었다. 서로는 창구 옆 빈 화분에 씨앗을 심어 보고 싶다고 했다. 토비가 당장 감자 씨눈을 꺼내자 벤이 말렸다. “저것부터 심으면 새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밭일에 묶일 거다.”
모두가 웃었다. 서로는 작은 화분에 토비가 가져온 꽃씨 하나를 심었다. 꽃이 언제 피는지 아무도 보장하지 않았다. 그 불확실함이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그는 그것이 자기한테 남겨진 시간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이해했다.
한편 서로는 새 이름을 등록하는 서류를 받아 들었다. ‘기존 원본과의 관계’라는 칸이 있었다. 직원은 습관적으로 ‘복제’라고 쓰려 했다가 펜을 멈췄다.
“관계는 설명할 수 있어요.” 서로가 말했다. “하지만 제 삶을 한 단어로 분류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직원은 그 칸을 비워 둔 채 추가 확인 절차를 안내했다. 서로가 다 적응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도 자신에게 명령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두려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제8문 우편함에 새 편지가 도착했다. 배달할지 반송할지부터 묻는 편지들이었다.
피엘은 그날 처리한 일을 한 장짜리 보고서에 적었다. 오늘 막은 것, 아직 증명되지 않은 것, 지원이 계속 필요한 현장. 로마의 거절서 원문은 보고서에 넣지 않았다. 아이의 진료기록 역시 봉인 번호만 표기했다. 그는 보고서를 다 쓴 뒤 날짜 칸을 다시 확인했다. 삼백 년 전의 사고와 오늘의 책임을 하나의 시각으로 묶지 않으려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세아가 그 보고서를 읽었다. “종결이라는 단어가 없네요.”
“오늘 끝난 일을 적었고, 아직 안 끝난 일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쓰면 보고받는 사람은 불편해하겠죠.”
“그럴 겁니다. 그래도 읽을 수는 있을 테니까요.”
일곱 번째 확인서는 오후가 되어서야 실마리를 드러냈다. 나엘이 종점의 오래된 기록과 대조한 것이다. 밀가루 냄새가 나는 종이는 삼백 년 전의 구호 급식소에서 쓰던 영수증 용지였다. 첫 번째 피엘과 야간 담당자들이 감자를 나눠 먹던 바로 그 급식소였다.
[발신 전 보류. 회수기 경유 기록 없음.]
“애초에 배송망에 들어오지 않은 편지군요.” 피엘이 말했다.
[그런데 내용은 읽을 수 있어.] 서온이 대답했다. [수신인란이 빈 것이 아니라 잘려 나갔어. 누가 의도적으로 숨긴 것 같아.]
나엘은 복구된 가장자리에서 작은 문장 하나를 읽었다.
'제0경로는 사람을 대신해 답하지 못한다. 다만 그곳에 먼저 맡겨진 한 통의 편지는 아직 주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피엘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부러진 깃펜을 꺼냈다. 편지에 적힌 잉크와 펜촉의 흠집이 이상할 만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진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증거를 봉인하고 나엘에게 실제 검사를 부탁했다.
저녁 무렵, 피엘은 어느 작은 벤치에 앉았다. 도시의 종은 새벽 다섯 시 십칠 분에도, 저녁 일곱 시에도 울렸다. 그는 종소리를 듣고도 이제 자신이 사라질 시간을 계산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 사람들과 나눴던 말들을 떠올렸다. 토비의 빵, 로마의 차, 서로의 새 이름, 사일이 처음 밟은 문턱.
“다 끝났습니까?” 서온이 물었다.
“아닙니다. 하나 막았을 뿐입니다.”
[그럼 내일도 출근해?]
“제가 선택해서요.”
서온의 빛이 부드러워졌다. [나도 내가 선택해서 같이 갈게.]
바로 그때 나엘에게서 마지막 회신이 도착했다.
[영수증 용지 접합 결과 확인. 잘려 나간 수신인 이름이 아니라 발신인 서명이 일부 복구됨.]
[서명은 첫 번째 피엘이 아닙니다.]
피엘은 화면을 바라보았다. 서명은 고작 세 글자였다. 그 세 글자는 1화에 등장한 오배송 장부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서명 밑에는 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오배송은 실수가 아니었다. 첫 번째 편지는 잘못 보낸 것이 아니라, 잘못 보내도록 설계되었다.'
피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일의 조망실을 떠나 이제 제0경로의 원본 장부로 향할 때였다. 누군가 거절을 지우기 시작한 최초의 순간이, 아직 정식 기록에는 나타난 적 없었다.
제18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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