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경로’라는 글자가 나타나자 심사실의 오래된 창문들이 하나씩 닫혔다. 그동안 책상 위에 쌓여 있던 작은 봉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발송인이 없는 봉투들, 수신인이 지워진 봉투들이었다. 각 봉투에는 같은 문장이 들어 있었다.
'수신인의 뜻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 제0경로가 수신한다.'
토비는 그 문장을 읽고 벤을 돌아봤다. “그 길이 편지까지 받아요? 길이 편지를 받으면 답장은 누가 합니까?”
“그걸 묻는 사람이 없었던 거지.” 벤이 말했다.
피엘은 켈린에게 문서의 제정 경위를 요청했다. 최초 설계안에는 제0경로가 수신인으로 쓰이지 않았다. 원래는 목적지가 잘못된 우편물을 사람이 다시 분류할 때까지 잠시 두는 ‘미배달 보관함’이었다. 아무도 대신 수신하지 않는다는 표시인 0000과 함께 기록됐다. 그런데 수백 년에 걸쳐 수신 불가, 보류, 거절, 주소 불명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가 하나로 묶였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세아가 물었다.
사일의 목소리가 조망실에서 들려왔다. “처음엔 기다릴 시간이 없었으니까. 폭풍이 오고 있었고, 편지가 늦으면 배도 늦게 떠났네. 나중에는 기다리는 일이 불편해서였지.”
사일은 자신의 근무 장부를 펼쳤다. 첫 번째 피엘이 떠난 밤, 그는 수신인이 없는 긴급 구조 요청을 잠시 보관함에 넣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와서 요청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필요한 구조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관리실은 이후 미완결을 줄이려고 보관함이 스스로 수신하는 것으로 규칙을 고쳤다. 사람의 부재가 곧 기계의 동의로 변했다.
피엘은 책상 위의 낡은 봉투 하나를 들어 보았다. 앞면에는 아직도 ‘미배달’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부터 누군가의 이름이 적히지 않았기 때문에 미배달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수취인이 사라진 마을의 이주자가 남겼다는 주소가 조금 번져 있었다. 우편물을 다시 찾아 주려면 사람에게 물어야 할 정보가 남아 있는데, 자동 회수기는 그것까지 발송 완료라고 분류하려 했다.
피엘은 봉투를 되돌려 놓았다. 해결할 수 있는 편지가 남아 있다면 남았다고 기록해야 했다. 누군가 읽지 못한 편지의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은 업무를 마치는 방법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피엘은 1화의 기록을 떠올렸다. 그는 겨우 몇 건의 오배송을 처리하면 되는 줄 알았다. 실제로는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수많은 편지가 누군가에게 물어보지도 않은 채 ‘받았다’고 처리되고 있었다.
켈린은 심사실의 전원을 내릴 준비를 했다. 하지만 세아가 막았다. “지금 끊으면 제0경로에 묶인 긴급 구조 요청까지 함께 사라질 수 있습니다.”
토비는 툴툴거리면서도 창가에 쌓인 모래주머니를 가져왔다. “문제가 생긴 수로라도 물이 들어가고 있으면 아무 생각 없이 메울 수 없죠. 아래에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
통신이 연결되기 전에 제7문의 관측소에서 짧은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 바람이 세게 불어 외딴 섬의 작은 등대가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정기 신탁망을 중지했으니 이번에는 사람이 직접 위치와 위험을 확인해야 했다. 세아는 현장 연락원이 확인한 좌표를 별도 봉투에 기록했고, 아지는 인근 구조선 담당자를 연결했다. 답이 도착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출항 여부는 바다의 풍속과 선박 상태를 확인한 선장이 결정했다.
“중앙선에서 일괄 승인하지 않는데도 배가 나가는군요.” 켈린이 작게 말했다.
“그렇다고 매번 이렇게 될 거라고 보장할 수도 없어요.” 세아가 답했다. “현장 인원이 부족한 곳도 있으니 보완해야겠죠.”
그들은 구조선이 실제로 출항했다는 회신을 기다린 뒤 다시 심사실 화면을 보았다. 한쪽에는 미해결 신탁 원장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방금 확인한 출항 기록이 있었다. 둘 다 편지였지만 하나는 사람의 선택을 대신하는 문서였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선택을 돕는 연락이었다. 비슷해 보이는 두 장치를 구분하지 않으면 개혁은 또 다른 재난이 될 수 있었다.
이시아가 조망실 통신에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신탁 체계의 봉인을 지켜온 여신은 처음으로 자신의 책임을 상세히 말했다. 제8문을 봉인하던 당시, 반송 권리가 거절의 증거와 함께 남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큰 혼란을 피하겠다는 이유로 절차를 미뤘다. 그 결정이 무명 보관함의 권한을 키웠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제가 승인한 것은 불완전한 봉인이었습니다.” 이시아가 말했다. “그 책임을 모르는 수신인에게 돌리는 문서에는 이제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사일이 화면 안으로 다가왔다. “나는 먼저 멈출 수 있었네. 그런데 보류 중이라는 말을 너무 오래 믿었어. 떠나지 않으면 적어도 누군가 보고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지켜보기만 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습니까?” 켈린이 물었다.
“있을 수 있습니다.” 피엘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사람에게 모든 피해를 씌우고 다른 사람을 풀어 주지는 않겠습니다.”
서온은 오래된 보관함의 출입 원장을 펼쳤다. 그 안에서 뜻밖의 흔적이 발견됐다. 일곱 문의 최근 오배송 기록이 제0경로를 지날 때마다 날짜가 뒤집혀 있었다. 일부는 아직 발송되지도 않은 문서였고, 일부는 이미 복원된 여섯 건까지 다시 미완결로 표시하려 했다.
[기존 보존 수치: 미해결 오배송 1,006건, 복원 완료 6건.]
[신규 재분류 요청: 복원 완료 6건 재미완결 처리.]
“이미 해결된 것까지 다시 망가뜨리겠다는 겁니다.” 세아가 말했다.
피엘은 6건의 당사자 기록을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복원 결정을 정당하게 내렸다는 독립 심리 확인서가 보관돼 있는지 하린에게 문의했다. 확인서는 있었다. 날짜도, 증인도, 이의 처리 기록도 남아 있었다. 제0경로는 그 내용을 보지 않고 숫자만 다시 덮으려 했다.
피엘은 모두를 돌아봤다. “당장 전부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먼저 되돌아갈 수 없는 피해를 막고, 나중에 각 문서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는 사일에게 한 가지를 요청했다. 지금까지 조망실을 떠나지 못하도록 묶인 자신의 마지막 근무 시간을 외부 증거로 남겨 달라는 것이었다. 사일은 망설였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내게 징계를 내릴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습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러나 당신이 했다고 확실하지 않은 일까지 책임지게 두지는 않겠습니다.”
사일은 회중시계를 내놓았다. 시계 뒷면에 적힌 문구가 서온의 빛 아래서 드러났다.
‘마지막 근무자는 제0경로의 수신인이 될 수 없다.’
그 문구는 첫 번째 피엘이 떠나기 전날 적어 둔 제한 조항이었다. 사일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그러나 한 번도 사라지지 않았던 규칙이었다.
그들이 조항을 외부 심리에 제출하자 창밖의 무명 도장들이 일제히 검게 변했다. 스스로 편지를 받던 제0경로가 처음으로 수신인 자격을 의심받았다.
그런데 화면 아래에서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미배달 편지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은 오래전부터 아무도 정면으로 답하려 하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제178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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