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진료소 뒤 작은 주방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데우려 끓인 생강차에서 김이 올랐다. 그녀는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붉은 종이를 보다가 컵을 내려놓았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위험해지는 거라면 입을 닫겠어.”
피엘은 바로 반대하지 않았다. 입을 닫을지 말지도 로마가 결정할 일이었다. 그는 다만 사실을 설명했다. 현재 시스템은 침묵을 동의로 계산하고 있었고, 이제는 증언을 두 번 한 사람부터 위험 대상으로 묶고 있다고. 말해도 위험하고 말하지 않아도 불리한 구조였다.
“참 훌륭한 선택지네요.” 로마가 웃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할 건가요?”
“저희가 할 일은 그 선택지를 없애는 겁니다. 당신의 대답을 정하는 게 아니라요.”
로마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거절서 사본을 증거로 쓰는 데 동의했다. 단, 가족 이름과 사적인 사유는 빼 달라고 부탁했다. 세아는 동의 범위와 철회 방법을 별도 종이에 적어 로마에게 건넸다.
조망실로 돌아온 일행은 사일이 놓아 둔 설계도를 펼쳤다. 일곱 문의 신탁은 뿌리부터 연결돼 있었지만, ‘완전성 자동 회수기’라는 이름은 설계도 어디에도 없었다. 아지는 낡은 돋보기를 썼다. 후대에 덧씌운 붉은 선 밑으로 오래된 배선이 드러났다.
“원래는 반송물을 다시 분류하는 기계였네. 수신인이 잘못되면 잠깐 보류하고 사람이 원본을 확인하도록.”
“그럼 회수기는 왜 거절을 지우죠?”
“반송 건수를 오류로 세지 않게 만들면 보고서가 깨끗해져. 누군가 성과를 위해 기계를 바꿨겠지.”
사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동의한 개조가 어디까지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몇 개의 허가서에 자신의 필체가 있음을 인정했다. ‘임시 보류 자동 해제’, ‘야간 책임자 사전 대행’에는 분명 자신의 서명이 있었다. 하지만 ‘거절자 정리’ 항목은 날짜조차 잘못돼 있었다.
“내가 저지른 일과 내가 하지 않은 일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되겠군.” 사일이 말했다. “그러면 내가 한 일도 끝내 보이지 않을 테니까.”
서온이 도면 아래쪽의 봉인 번호를 비교했다. [회수기는 밤마다 조망실의 서명을 받아. 그런데 오늘 낮엔 서명 없이 실행됐어. 어디선가 사전 승인 증빙을 복제해 사용한 거야.]
벤은 서랍에서 금빛 실이 감긴 펜촉을 발견했다. 펜촉을 비틀자 작은 숫자가 보였다. '0000'. 제7문에서 미래 채무를 부당하게 승인하던 바로 그 번호였다. 하지만 제0경로의 초기 문서에서 0000은 '아직 아무도 승인하지 않음'을 뜻했다.
“빈칸을 승인이라고 읽는 사람에게는 모든 세상이 찬성표야.” 벤이 중얼거렸다.
일행은 회수기를 멈출 방법을 두 가지로 좁혔다. 조망실의 중앙 전원을 끊으면 모든 우편 업무와 긴급 구조 연락까지 끊길 수 있었다. 대신 실제 구조 통신을 다른 곳으로 옮긴 다음 회수기만 분리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문제는 일곱 문이 같은 긴급 통신선에 묶여 있다는 점이었다.
그 전에 아지는 시험용 경보를 하나 보냈다. 제2문의 산악 지대에서 아무 피해가 없는 연기 탐지 시뮬레이션이었다. 중앙선을 뽑아 보니 경보가 멈추지 않고 세 곳으로 복제되어 내려왔다. 가짜 구조 요청이 여러 번 출동을 부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반대로 실제 화재 신호는 재난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두 배나 늦었다.
“이걸 그냥 끊었다간 사람들이 거짓 경보를 쫓다 진짜 화재를 놓치겠군.” 아지가 말했다.
서온은 로그를 비교하면서 조망실이 과거의 위험 신호를 정상 신호처럼 계속 재생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아무리 회선을 분리해도 오래된 신탁과 구조 요청을 구분하지 못하면 위기는 남는다. 세아는 각 문 담당자에게 경보를 임시로 확인할 수 있는 수동 기준을 제안했다. 눈으로 연기를 확인한 사람의 위치, 위험을 신고한 시간이 확인됐는지, 접수자가 반신호를 보냈는지. 기준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모두를 강제로 불러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들은 한 시간 뒤 같은 시험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세 번째 문에서 응답이 없었다. 담당 직원이 동생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교대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엘은 결혼식 참석을 미루라고 지시하지 않았다. 대신 담당 인원이 비는 시간에는 인접 문에서 임시 접수를 맡게 하는 방법을 찾았다. 늦게 도착한 대답 하나가 설계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바꿨다.
세아는 현장마다 분리할 수 있는 인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했다. 제2문의 산악 구조팀은 교대자가 둘뿐이었고, 제6문의 의료 연락망은 종이 장부로 몇 시간 버틸 수 있었다. 제7문의 기상 관측소는 폭풍 예보를 외부에 전달해야 했다. 누구도 단숨에 선을 끊자고 말하지 못했다.
토비는 자신의 자루에서 씨앗 세 개를 꺼냈다. “밭에 물을 대는 수로도 똑같아요. 큰 물길을 막으면 아래쪽 논이 말라요. 그래서 작은 둑을 여럿 만드는 겁니다.”
“작은 둑이요?” 아지가 물었다.
“각 문에 임시 배달 창구를 세우는 거죠. 그다음 큰 선을 잠깐 멈추면 되잖아요.”
간단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임시 창구에서는 신탁의 승인 여부뿐 아니라 실제 구조 요청, 진료 연계, 화재 경보 등을 분리해 받아야 했다. 그 일을 맡을 사람들에게 먼저 설명하고 동의를 받아야 했다.
피엘은 각 문의 현장 담당자에게 제한된 내용의 협조 요청서를 썼다. 당사자 이름과 거절 이유는 넣지 않았다. 대신 언제 어떤 선이 끊길 수 있고, 무엇을 계속 운영해야 하는지 적었다.
아지는 모든 문이 동시에 응답하지 않아도 계획을 진행할 수 있도록 순서를 정했다. 먼저 사고 가능성이 낮은 곳에서 수동 접수를 시험하고, 위험한 구조 연락망은 마지막에 분리하는 방식이었다. 각각의 단계에는 취소 조건도 있었다. 환자 연락이 끊기거나 구조대의 확인 신호가 사라지면, 회수기를 멈추는 작업을 중단하고 현장의 통신부터 되돌리기로 했다.
“계획을 멈추는 기준까지 적는군요.” 토비가 말했다.
“작물이 잘 안 자란다고 씨앗을 죄다 뽑지는 않잖아요.” 피엘이 대답했다.
토비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밭에 실패를 기록할 공간을 남겨 놓죠. 실패를 인정해야 다음에 뭘 심을지 아니까요.”
첫 답장은 제6문의 진료소에서 왔다. [임시 창구 운영 가능. 담당자 교대 18시. 긴급환자 접수는 계속함.]
두 번째 답장은 제7문의 관측소에서 왔다. [폭풍 예보 30분 뒤 발송 예정. 이후 분리 가능.]
세 번째 답장은 제1문에서 왔다. [협조 거절. 사유: 관리실 지침 위반 우려.]
잠시 후 화면에 새 글씨가 떠올랐다. [제1문 임시 창구 담당자 신원 확인: 미나.]
미나의 이름을 본 피엘은 펜을 내려놓았다. 예전에 최초 시험 발송의 흔적을 증언한 그녀에게 이제 거절할 권리와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동시에 요구하게 된 것이다. 피엘은 협조를 재촉하는 대신 미나에게 설명부터 하기로 했다.
제174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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