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문 주변의 시계탑에는 정오를 알리는 종이 아직 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작은 진료소 앞은 벌써 사람들로 가득했다. 접수 창구의 유리에는 ‘주소 불명 환자에 대한 진료 우선순위 자동 조정’이라는 새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열이 사흘째 안 내려요.” 젊은 아버지가 아이를 안고 창구에 말했다. “의사가 오전에 다시 오라고 했습니다.”
직원은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이름을 입력하면 화면이 하얗게 지워졌다. 환자 명단에 존재하지 않으니 처방 기록도 불러올 수 없었다. 직원의 얼굴은 난처함으로 굳어졌다. 정해진 절차 밖의 환자를 돕는 일이 자신에게 불이익이 될까 두려웠다.
피엘은 창구 앞에 서서 자신의 명찰을 내밀지 않았다. 권한을 보여 주는 것으로 누군가의 치료를 허락받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대신 의사에게 현재의 긴급 위험과 별도로 남길 임시 종이 진료기록을 요청했다. 의사는 곧장 아이를 살펴보고 수액과 해열 조치를 준비했다. 세아는 환자의 이름을 공개 명단에 올리지 않고도 진료가 끊기지 않도록 봉인된 사건 번호를 만들었다.
토비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주소가 없어졌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옛날에 신탁을 거절했어요. 한밤중에 다른 마을로 이주하라는 명령이었는데, 집에 아픈 할아버지가 계셔서 당장 갈 수 없었죠. 나중에 직접 거절 편지를 냈다고 들었어요.”
거절은 가족에게 전해지는 죄처럼 취급되고 있었다. 원래 신탁을 받은 사람은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후손까지 ‘확인되지 않은 수신인’으로 묶였다. 아버지는 아이를 안은 채 겨우 말했다. “제 어머니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제가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 아이가 치료를 못 받아야 합니까?”
피엘은 대답을 기다렸다가 말했다. “아닙니다. 지금 필요한 진료는 옛 신탁과 무관합니다.”
세아는 진료소 복도에 임시 안내판을 세웠다. 무명 환자에게도 응급 진료를 제공한다는 글과 종이 접수 절차를 썼다. 직원 하나가 말했다. “이렇게 하면 나중에 누구에게 약을 줬는지 못 찾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임시 번호와 날짜를 기록하고, 본인이 원하면 나중에 자기 이름과 연결하도록 하려는 겁니다.” 세아가 말했다. “무조건 이름을 공개하자는 뜻이 아니에요.”
직원은 주저하다가 도움을 청했다. 오래된 처방전을 찾으러 간 환자가 주소 불명이라는 이유로 병동 문턱을 넘지 못한 상황이었다. 피엘이 병원장의 긴급 승인 여부를 묻자, 의료진은 당장 처치가 필요한지 먼저 확인했다. 환자는 그날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약이 끊기면 사흘 뒤부터 발작이 재발할 수 있었다. 의료진은 직접 복약 내역을 확인하고 종이 처방을 임시로 이어 쓰기로 했다.
두 문제가 달랐다.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위험한 아이와, 며칠 안에 기록을 복구해야 할 성인. 둘 다 중요한데 어느 한쪽의 긴급함을 빌려 다른 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토비는 진료소 앞 의자에 앉은 사람들에게 물을 나눠 주었다. 물을 준다고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갈증까지 참을 이유는 없었다.
진료소 밖에서 누군가 큰 종을 울렸다. 주민들이 출구로 몰려나왔다. 하늘에는 붉은 수령 확인서가 눈처럼 떨어졌다.
[신탁 거부 사유 보존 기간 만료.] [해당 수신 계보의 모든 이의 기록 자동 정리.] [기존 신탁 집행 대기 상태 전환.]
“우리가 보존 기간이 끝났다고 허락했나요?” 나이 든 여성 하나가 종이를 들고 소리쳤다. 그녀는 자신이 서명한 원본 거절서를 수십 년 동안 장롱 아래 보관했다고 했다. 그 서류의 구석에는 네 번 접어 닳은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오랜 세월 잊지 않으려고 꺼내 보았던 흔적이었다.
여성의 이름은 로마였다. 그녀는 오래전 자신에게 내려온 ‘바다를 떠나라’는 신탁을 거절한 이유를 설명했다. 남편이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았을 때 그를 찾을 마지막 사람이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수색을 마친 뒤 스스로 육지로 옮겨 왔지만, 당시 거절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가 나중에 이사한 건 내 결정이었어. 그 신탁이 맞았다고 인정한 게 아니야.”
서온은 그녀의 말을 모두 기록하지 않았다. 먼저 로마에게 어떤 부분을 재판 증거로 남길지 물었다. 로마는 오래된 거절서와 날짜만 남기고 남편의 마지막 편지는 공개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한편 벤은 하늘에서 떨어진 수령 확인서의 끝을 태웠다. 잿더미 아래 진짜 발신 경로가 드러났다. 문서에는 사일의 필체로 된 제목이 있었지만 집행 명령은 다른 곳에서 발급돼 있었다.
[정리 실행자: 완전성 자동 회수기.] [원본 지시 내용 일부 삭제.] [조기 실행 근거: 위험 관리 등급 상향.]
“누군가 사일의 명령을 더 나쁘게 바꿨습니다.” 벤이 말했다.
“그래도 명령을 쓴 건 그 사람이지.” 토비가 답했다.
피엘은 둘 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일이 시작한 일이었고, 그 뒤에는 별도의 조작이 있었다. 책임을 묶어서 하나로 만들면 결국 누구도 실제 문제를 고치지 못한다.
진료소 안쪽에서 아이가 기침을 멈추고 잠들었다. 의사는 임시 기록으로 치료를 이어 갈 수 있다고 확인했다. 아버지가 고개를 숙였지만 피엘은 감사 인사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종이 진료기록이 다음 교대자에게도 전달되는지 확인했다.
직원 둘은 오래된 도장과 색연필을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 색은 즉시 진료가 필요한 환자, 파란 색은 기록 대조가 필요한 사람, 연필 표시가 없는 칸은 판단 보류를 뜻했다. 그들은 보류된 사람을 다시 부를 수 있는 방법도 만들었다. 오전에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이 오후에 전부 다시 줄을 서지 않아도 되게 하려고 했다.
로마는 그 일을 한참 지켜보다가 낡은 의자를 한 개 옮겨 주었다. “이제 내 거절서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확인할 테니, 적어도 허리가 아픈 사람은 앉아서 기다려야지.” 그녀의 말에 진료소 직원이 웃었다. 이름을 지우는 명령은 자신이 직접 막을 수 없었지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의자 하나를 건네는 일은 할 수 있었다.
제6문 연락망에 긴급 우회 통신이 열렸다. 그러나 외벽의 붉은 종은 멈추지 않았다. 서온이 화면을 가리켰다.
[첫 번째 재발송 대상 선정 완료. 기준: 거절 사실을 두 번 이상 증언한 사람.]
가장 위의 임시 봉인 번호가 반짝였다. 로마의 거절서에 붙인 바로 그 번호였다.
토비가 이를 악물었다. “정말 말하는 사람부터 없애려는 거군요.”
제173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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