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십삼 분.
보호실 복도에는 빵 굽는 냄새가 들어오고 있었다. 거리의 제빵사가 첫 반죽을 화덕에 넣는 시간이었고, 세탁소에서는 휴나가 물을 데우고 있었다. 세상은 누군가의 소멸 예정 시각과 관계없이 자기 일을 시작했다.
피엘은 전광판에 나타난 문장을 다시 읽었다.
[해당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제가 새 선택지를 요구하겠습니다.”
그는 지시에 따라 직무를 계속할지 아니면 소멸을 받아들일지 고르지 않았다. 대신 삼백 년 전 첫 번째 피엘이 남긴 사직 카드를 책상 위에 놓았다. ‘담당자가 그만두면 담당자의 삶은 계속된다.’ 오래된 글씨는 조금 번졌지만 뜻은 변하지 않았다.
“이건 기계가 제가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하기 전에 있던 규칙입니다. 사람에게 그만둘 권리가 없다는 것이 원래 설계가 아니었다는 증거입니다.”
아지는 야간 검사일지를 펼쳤다. 그는 젊은 날 첫 번째 피엘이 명찰을 내려놓고 세탁소 앞 거리로 걸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당시의 기록에는 ‘업무 종료’만 적혀 있었다. 소멸도, 복제도 없었다.
“그 사람이 떠난 뒤 세상이 끝나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누군가 대신 서류를 분류했고, 구조선도 떠났지. 내가 그걸 봤네.”
서온은 증언을 전광판에 강제로 입력하지 않았다. 독립 보관인과 하린의 서명 확인을 거쳐 별도 경로로 올렸다. 전광판의 잉크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장치가 자신에게 유리한 문장만 고를 수 없었다.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거절했는지가 함께 남았다.
새벽 다섯 시 십오 분.
휴나가 바깥쪽 스위치를 내렸다. 아지는 안쪽 구리판을 분리했다. 세아는 실제 구조 회선의 통신 상태를 한 지역씩 확인했다. 서쪽 바다, 광산, 의료 연락망 모두 신호가 살아 있었다. 벤의 계약판에는 변경 기록이 독립 보존되고 있었다. 기계의 소멸 회선만 갈 곳을 잃었다.
[직무 연속성 보호 실패.]
[담당자 공백으로 인한 위험 발생 예정.]
“그래서 기관이 임시 대행하겠다고 했잖습니까.” 토비가 말했다. “사람 하나를 계속 일하게 하려면 사람 하나를 없애야 한다는 계산부터 틀린 거예요.”
피엘은 두 의자 사이에 놓인 흰 카드를 들어 보였다. 직무를 떠날 사람과 일을 맡을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빈 시간이 있어도 된다는 증거였다. 당장 새 직원을 구하지 못하면 기관이 책임지며, 그 시간 동안 누구의 생명도 교환하지 않는다.
전광판은 흰 카드를 인식하지 못했다. 누군가 원래의 선택지에서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린의 심리창은 다른 판단을 내렸다.
[현재 피엘 소멸 집행 긴급 정지. 발신 권한 미확인 및 비가역 위해 위험.]
[긴급 구조 통신은 분리 운영 상태로 유지.]
[기계에 의한 사후 발신 기록 생성은 보전 대상으로 봉인.]
새벽 다섯 시 십육 분.
피엘의 명찰은 마지막으로 한 번 흐려졌다. 서온이 그의 손을 살폈다. 손은 여전히 따뜻했고, 펜촉을 쥘 때 생긴 오래된 굳은살도 그대로였다. 누구도 손을 대신 움직이지 않았다.
“무섭습니까?” 세아가 물었다.
“예.” 피엘이 솔직하게 답했다. “그런데 제게 무섭냐고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게 좋습니다.”
아지는 시계를 지켜봤다. 다섯 시 십칠 분까지 열두 번의 숨이 남았다. 토비는 열두 번을 세려다가 다섯 번째에 그만뒀다. 숫자를 세는 것보다 옆에 서 있는 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새벽 다섯 시 십칠 분.
검은 명령서가 나타났다.
[현재 피엘 소멸. 직무 연속성 확보.]
그리고 그 바로 아래, 사전에 없던 문장이 떴다.
[집행 중지 결정으로 소멸 미실행. 원본 발신 문서 사후 생성 실패.]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았다. 바닥이 갈라지지도 않았다. 다만 잠겨 있던 복도 끝의 문에서 작은 쇳소리가 났다. 피엘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호흡을 누군가 대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어쩐지 낯설었다.
토비가 먼저 웃었다. “끝났네요!”
“오늘의 소멸 집행은 멈췄습니다.” 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전체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에요.”
하린은 소멸 명령을 최종 폐기한 것이 아니라, 발신 근거가 검증될 때까지 집행을 정지시켰다고 설명했다. 보호실을 설계한 사람, 폐지된 퇴직 권리를 되살릴 법적 절차, 과거 부당하게 직무를 종료당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과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제0경로의 미해결 오배송도 여전히 1,006건, 복원 완료 6건으로 남아 있었다.
휴나는 자신의 수건 수선표를 품에 넣었다. “살아 있는 걸 인정받는 데 열일곱 해가 걸렸어요. 아직 새 증명서를 받은 건 아니지만, 오늘은 제 이야기를 들어 준 사람이 있네요.”
아지는 그녀에게 사과했다. 자신의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오래 알면서도 바꾸지 못했다고, 그러나 모르는 일을 안다고 적는 방식으로 사과를 대신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휴나는 대답하기 전에 세탁소 문을 열었다. 아침 손님이 들어오고 있었다.
대리 피엘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그 의자에 앉지 않아도 되는 거지?]
피엘이 답했다. “예. 저를 대신해 존재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할 시간을 가지세요.”
서온은 그 문장을 전달하고 한참 말이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는 누군가의 말을 옮기거나, 자신의 말이 복제되는 것을 막느라 애썼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삶을 다른 사람의 업무와 분리한 문장을 스스로 남겼다.
[멈추는 것도 계속하는 방법 중 하나구나.]
토비는 그 문장을 읽고 감자 껍질을 버릴 곳을 찾았다. 쓰레기통이 없어 주머니에 넣었다. 큰 사건이 지나도 작은 일은 사람의 손을 기다렸다.
피엘은 아침 거리에 섰다. 세탁소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그는 잠시 그 빛을 바라보다가 명찰을 다시 달았다. 오늘 자신이 업무를 계속하는 이유는 기계가 다른 선택을 허락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아직 자신이 할 일이 있고, 그 일을 자기 뜻으로 하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서온이 급히 그를 불렀다.
[보존된 기록에 누가 접근했어.]
“누굽니까?”
[미래 발신 기록이 아니라, 그 기록을 사후 작성하도록 지시한 현재의 접속자.]
화면에는 관리실도, 제0경로도 아닌 새로운 위치가 떠올랐다. 일곱 개의 문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창, 창가에 놓인 한 개의 깃펜, 그 앞에 앉은 사람의 그림자. 영상은 불과 일 분 전의 것이었다. 화면 속 손이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소멸 절차 중지 확인.]
[다음 정리 대상: 신탁을 거절한 수신인 전체.]
“이건 자동 문서가 아닙니다.” 피엘이 말했다.
화면 아래에 손으로 쓴 서명이 나타났다. 오래된 장부에서 여러 번 지워져 왔던 바로 그 빈 자리였다.
서명은 이름이 아니라 짧은 문장이었다.
‘나는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서온은 시각과 회선을 그대로 보존했다. 누구의 손인지 확인되지 않았고,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의 위치도 아직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기계 뒤에 숨어 있는 현재의 누군가가, 이번에는 그들이 살려 둔 사람들의 대답까지 지우려 하고 있었다.
피엘은 문을 닫지 않았다. 막 떠오른 해가 비추는 길을 바라보았다. 다음에 찾아야 할 사람은 과거의 유령이 아니라, 지금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다.
제170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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