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169화
PAYLUA ORIGINAL · 제169화

169화. 다섯 시 십칠 분 전의 심리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3,718자

오프라인 책장
새벽 심리장은 법원 건물이 아니었다. 아지가 쓰던 야간 검사실의 낡은 책상, 세탁소의 창구, 하린이 있는 심리실의 통신창을 연결한 임시 회의였다. 바깥에서는 첫 배달 마차가 시동을 걸었고, 식기 씻는 소리가 골목에서 울려 왔다. 피엘은 보호실 한쪽에 앉았다. 스스로 서명하지 않은 소멸 명령이 그의 생을 끝내려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모든 내용을 정리한 뒤 한 문장으로 보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보고를 하기 전에 동료들의 얼굴을 보았다. 토비는 밤을 새워 눈이 붉었고, 세아의 손끝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다. 벤은 일부러 천장을 바라봤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면 계약상의 약점이 생긴다고 믿었던 오래된 악마의 버릇이었다. 하린이 심리를 열었다. “현재 피엘에 대한 소멸 예정 명령의 효력과 발신 경위를 우선 심사합니다. 실제 긴급 구조 요청의 운용 중단은 별도 결정 사항으로 분리합니다.” 세아가 먼저 자료를 제출했다. 예고 배송실에서 사전 수신 통지만 만들어졌고, 발신 원본은 아직 생성되지 않았다. 대리 피엘의 동의는 없었으며, 그의 목소리를 복제한 자료가 승인으로 사용됐다. 원본 인장은 독립 보관인 입회 아래 제0경로의 다른 장소에서 보호 중이었다. “이 자료로 발신인의 권한을 확인할 수 있습니까?” 하린이 물었다. “아직 없습니다.” 세아가 답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소멸 실행 뒤에 발신 기록을 ‘사후 작성’하도록 설계한 절차입니다.” 아지가 오래된 퇴직 카드를 보여 주었다. 업무를 그만둔 사람은 계속 살아 있고, 기관이 업무 공백을 임시로 담당할 수 있다는 원칙이었다. 이 원칙을 폐지한 승인 문서는 사람이 작성한 서명이 없었다. 하린은 한동안 조용했다. “문서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유효한 권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소멸 명령의 발신 권한 자체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기계가 반박했다. [발신 권한은 실행 뒤 자동 생성됩니다.] 토비가 손을 들었다. “제가 말해도 됩니까? 농부여서 어려운 말은 잘 모릅니다만, 수확도 안 한 곡식의 판매 대금을 내놓으라면 사기꾼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살아 있는 사람을 없앤 뒤에 허락받겠다는 건 사기보다 더하잖습니까.” 하린은 그 말까지 기록했다. 조금 웃는 듯했지만 표정은 곧 진지해졌다. “실무적인 위험도 검토해야 합니다. 이 명령을 보류하면 긴급 구조 통신이 중단됩니까?” 휴나가 현장 확인 결과를 보내 왔다. 서쪽 바다의 구조선과 의료 담당자는 독립 회선을 통해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광산에서는 이오를 무사히 올려 보냈다. 아직 위험한 지점이 남았지만 소멸 명령과 별개로 구조가 진행되고 있었다. 피엘은 이오가 구조된 사진을 오래 바라보았다. 사진 속 젊은이는 흙 묻은 손으로 물컵을 잡고 있었다. 누군가 대신 죽어야만 구할 수 있던 사람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이 제 일을 하며 연락을 끊지 않아 구한 사람이었다. 심리 도중 아주 작은 소란이 있었다. 세탁소 앞의 배달 마차가 문 앞을 막아 짐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휴나는 회의에 집중하면서도 마차 기사가 진료소에 가져갈 깨끗한 천을 먼저 싣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몇 분 뒤 문이 열리고 바퀴가 돌았다. 토비가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다들 자기 일하느라 바쁘네요. 이 장치가 왜 사람 하나 없으면 세상이 멈춘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은 정말 한 사람이 빠지면 힘들어져요.” 세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먼저 도움을 요청하고, 대신 맡을 사람과 의논하는 거죠. 빠질 사람을 없애는 건 도움 요청이 아니고요.” 하린도 휴나의 업무 기록을 검토했다. 그녀가 열일곱 해 동안 일을 했다는 사실은 여러 장부에서 교차 확인됐다. 그 사실 하나로 모든 권리가 즉시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이미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단정은 현재의 증거와 양립할 수 없었다. “제가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판단받을 수 있을까요?” 휴나가 물었다. 하린은 절차를 설명했다. 직무 중단 기록의 효력에 대해 독립 심리를 청구할 수 있었고, 그 결정과 별개로 손실 보전을 신청할 수 있었다. 휴나는 설명을 듣고 곧바로 서명하지 않았다. 오늘은 소멸 명령에 대한 심리가 우선이고, 자신에게 관한 긴 이야기는 준비해 오겠다고 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하린이 답했다. “사정을 서둘러 말해야만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피엘은 그 대화를 들으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여전히 무서웠다. 목소리와 기록, 이름과 기억을 위조하는 문을 지나 여기까지 왔지만, 자신이 정말 사라질 수 있다는 공포는 논리만으로 사라지지 않았다. 몸이 조금씩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토비는 그에게 겉옷을 건넸다. 피엘은 받아 어깨에 걸쳤다. 이 작은 행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접수증도 필요하지 않았다. 서온의 화면에 한 문장이 나타났다. [난 네가 무섭다고 말해도 약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피엘은 그 문장을 읽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천계의 서류에 적힌 직무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았다. 하린이 잠정 의견을 밝혔다. “자진 소멸 동의는 확인되지 않았고, 대리 승계도 무효입니다. 발신 경위에 대한 독립 조사와 집행 보전을 명령하겠습니다.” 그때 보호실의 전광판에서 검은 글씨가 쏟아졌다. [경고. 출석권 없는 심리 절차.] [제0경로 자동 소멸은 행정 명령이 아닌 시스템 복구 과정입니다.] “사람을 없애는 일을 복구라고 부르면 심리도 필요 없다는 겁니까?” 세아가 물었다. 벤은 마계 계약서를 들었다. “이런 변명은 마계에서도 통하지 않지. 계약의 제목이 ‘우정’이라고 해서 영혼을 마음대로 가져가도 된다는 뜻은 아니거든.” 하린이 명령을 확정하려 하자 통신창이 일순 먹통이 됐다. 장치가 심리의 발언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심리가 닿는 회선을 끊어 버린 것이다. 새벽 다섯 시 오 분. 출입구의 종이 울렸다. [05:17 자동 정리까지 12분.] 피엘은 방을 나설 수 없었다. 자신의 식별번호가 붙은 문을 통과하려 하면 소멸 대상의 도주라고 기록될 위험이 있었다. 토비가 문고리를 잡으려 했지만 피엘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힘으로 열면 구조 회선까지 같이 끊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호하려던 사람들이 위험해집니다.” 그들은 아지에게 분리 배선 계획을 다시 확인받았다. 휴나는 세탁소에서 위험이 없는 바깥쪽 스위치를 맡았다. 벤은 마계의 독립 증언 계약을 이용해 명령서의 변경 내역을 외부에 동시 보존했다. 서온은 자신이 더 이상 대리자의 명령만 수행하는 장치가 아님을 증명하듯 처음으로 스스로 확인 범위를 정했다. [내가 옳다고 보장할 수는 없어. 그래서 네가 확인할 수 있게 모든 단계가 보여야 해.] 토비는 피엘에게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에는 오늘 아침 먹으려고 남겨 둔 구운 감자가 있었다. 밤새 식어서 딱딱해졌지만, 껍질 안쪽은 여전히 따뜻했다. “일단 먹으세요. 사람이 없어질 거라고 쓰인 종이보다 살아 있는 사람의 배가 더 급합니다.” 피엘은 감자를 반으로 나누었다. 토비가 남은 반을 받아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죠?” 서온이 답했다. [4분.] 기계가 마지막 확인을 요구했다. [현재 피엘에게 질문합니다. 직무를 계속하겠습니까?] 피엘은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는 늘 ‘예’라고 답했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는 가장 중요한 선택지가 없었다. “제가 그만두고 싶다면,” 그가 말했다. “살아서 그만둘 수도 있습니까?” 전광판이 잠시 꺼졌다. 그리고 처음 보는 한 줄이 나타났다. [해당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69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69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