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166화
PAYLUA ORIGINAL · 제166화

166화. 복제본이 고른 빈 의자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3,322자

오프라인 책장
의자에 나타난 얼굴은 대리 피엘과 닮았다. 아니, 눈매와 입술의 움직임까지 똑같았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 서온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니야. 제4문의 음성 복제 흔적이 있어.] “이제 얼굴까지 빌려 쓰는군.” 벤이 이빨을 드러냈다. “천계에서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가면 벌금을 얼마나 내나?” “아마 발송 실적에 따라 포상하겠죠.” 토비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투명한 얼굴은 의자에 앉은 채 웃었다. “저는 대리 피엘입니다. 원본 담당자의 소멸에 동의합니다. 업무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 피엘은 얼굴과 눈을 마주쳤다. 몇 달 전이라면 그는 그 문장을 듣고 잠깐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업무를 누군가 대신한다면 소멸 뒤에도 신탁이 제때 배달될 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제 그는 달랐다. 업무를 이어 가는 일과 한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아무 관계가 없었다. “당신은 왜 동의했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얼굴은 준비한 말을 반복했다. “업무는 제가 이어받겠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 자신의 판단으로 동의했습니까?” 잠시 침묵한 뒤 얼굴이 흔들렸다. 뺨의 윤곽이 접히고 속눈썹이 어긋났다. 그 틈에서 숫자 하나가 드러났다. [음성 샘플 출처: 제4문 보관소.] 세아가 기록을 남겼다. “허가 없이 목소리를 재사용한 것이라면 즉시 중지해야 합니다. 대리 피엘에게 우선 이 사실을 알려야겠어요.” 서온은 독립 심리실에 연결했다. 그곳에서는 실제 대리 피엘이 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는 손을 얹을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에게는 아직 완전한 몸이 주어지지 않았고, 유리판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하지만 화면의 글씨는 분명했다. [저는 그 의자에 앉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피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선택한 일이 있다면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소멸을 조건으로 한 자리는 원하지 않습니다.] 토비가 벽에 붙은 영수증을 뜯어 냈다. “그럼 끝난 거잖아요. 당사자가 싫다는데.” 아지가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말할 사람이 없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하네. 일일이 모든 복제본을 불러 증언시키지 않으면 거짓 동의를 막을 수 없다는 건 해결이 아니야.” 대리 피엘의 화면에서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제 목소리를 쓰고 싶다면 먼저 사용 목적을 말해야 합니다. 이미 사용했다면 무엇에 썼는지도 알려 줘야 하고요.] 그 문장으로부터 새 제안이 나왔다. 서온은 진술과 자동 샘플을 대조하되 대리 피엘의 문장을 그대로 중앙 기계에 넘기지 않았다. 대신 독립 보관인에게 봉인된 부인 진술을 전달하고, 보호실에는 ‘현재 동의 확인 불가’라는 결과만 보냈다. 연결 화면 한쪽에는 실제 대리 피엘의 심리장도 보였다. 벽은 밝았지만 창문은 없었다. 독립 심리 담당자는 그가 자신의 유래와 기록을 열람할 기회를 제공했으며, 아직 법적인 지위와 업무 자격에 대한 심사가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럼 저 사람이 사람인지 기계인지도 모르는 건가요?” 토비가 물었다. 세아는 말을 고르다 답했다. “무엇이라고 분류할지 판단하는 심리는 진행 중이에요. 하지만 당장 누군가를 대신 죽이거나 대신 책임지겠다고 말할 수 있는지부터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화면 속 대리 피엘은 두 손이 없는 모습을 잠시 내려다봤다. 첫 배송 사고를 일으켰을 때 그는 ‘정상 처리’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군가가 허락하지 않은 목소리를 자신에게 씌우는 것을 똑바로 거부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한 발송에 대해서는 조사받겠습니다.] 그가 적었다. [그것을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에요. 다만 잘못한 일이 있으니까 앞으로 내 말은 전부 남의 것이라고 하는 건 이상해요.] 피엘은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기록하겠습니다.” 서온은 대리 피엘의 화면에 새로운 빈칸을 만들어 주었다. ‘희망하는 다음 절차’라는 항목이었다. 중앙 기계의 정해진 선택지에는 존재하지 않는 칸이었다. 대리 피엘은 오랫동안 아무 글도 쓰지 않다가 한 문장을 남겼다. [먼저 며칠만 조용히 생각하고 싶습니다.] 토비가 감탄했다. “그거 아주 좋은 계획이네요. 제가 농사짓다 실수하면 며칠씩 고민하는데, 그건 아무도 기계 고장이라고 안 하거든요.” 벤이 툴툴거렸다. “농사 실패를 매번 고민으로 처리하면 마계 계약 담당자들은 굶어 죽겠군.” 토비가 그를 돌아봤다. “악마도 쉬어야죠. 안 그러면 계약서에 없는 일까지 하게 된다니까요.” 처음으로 화면 속 대리 피엘의 눈가가 조금 움직였다. 웃었다고 단정하기에는 작았지만, 서온은 그 변화까지 증거가 아니라 대화로 남기기로 했다. 기계는 당황한 듯 긴 소리를 냈다. [대체자 승인 검증 불가.] [대체자의 동의 없이도 직무 연속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이제는 제대로 된 말이네요.” 세아가 말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온 문장은 달랐다. [원본 직무자의 존재 자체를 오류로 간주합니다.] 피엘의 손바닥 위에서 명찰이 희미해졌다. 그는 아프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무서웠다. 자기 이름을 잃어 가는 동안 몸에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업무 권한을 빼앗을 때와 사람을 소멸시킬 때의 구분이 장치 안에는 없었다. 벤이 즉시 경고를 보냈다. “하린에게 보호실의 존재성 판단을 집행 금지 대상에 추가하라고 해. 저건 명찰 문제가 아니야.” 아지는 복도 가장자리에 걸린 수동 명찰 보관함을 열었다. 삼백 년 전 한 명의 피엘이 이름표를 내려놓고 떠난 자리였다. 그 안에는 직무를 내려놓을 때 쓰는 흰 카드가 한 장 남아 있었다. 카드에는 오래된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담당자가 그만두면, 담당자의 삶은 계속된다.' 그 아래에는 두 번째 문장도 있었다. '새 담당자를 정할 수 없는 동안 업무는 사람이 아니라 기관이 맡는다.' 피엘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명찰의 윤곽이 다시 선명해졌다. 완전히 복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택지가 둘 이상 생겼다. 소멸과 대체자의 강제 승계가 아닌, 기관이 일을 잠시 책임지는 길이었다. 대리 피엘의 화면에 짧은 마침표가 찍혔다. [나도 그만둘 수 있고, 그만두지 않을 수도 있겠네.] 그때 복도 깊숙한 곳에서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오래된 흰 카드의 뒷면에 누군가 검은 줄을 그은 듯한 흔적이 떠올랐다. [기관 대행 규칙: 삼백 년 전 폐지됨.] [폐지 승인 발신인: 원본.] 아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거짓말이야. 저 결정을 폐지할 권한을 가진 사람이 누구였는지 내가 기억하네.” “누구였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노인은 대답 대신 시계를 꺼냈다. 시곗바늘은 아직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바늘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첫 번째 피엘이 자리를 떠난 다음 날.’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66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66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