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는 이름이 나타난 빈칸을 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가 무슨 위대한 용사도 아니고요.”
말을 마친 뒤 그는 스스로 씁쓸하게 웃었다. 예전에 잘못 배달된 용사의 신탁 때문에 그런 말을 수없이 들었다. 처음에는 낯설고 부담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신도 모르게 남을 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다.
“그 신탁이 가짜였어도 좋은 일은 했잖아요.” 세아가 말했다.
“했죠. 그런데 그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었어요. 누군가 제 이름을 빈칸에 쓰기 전까지는요.”
피엘은 빈칸을 봉인했다. 토비의 동의도, 피엘 자신의 동의도 없이 ‘희생 후보’를 늘리는 일은 허용할 수 없었다.
서온은 설계 열람실의 나엘에게 연락해 멈췄다 움직이던 회중시계의 봉인 번호를 요청했다. 시계를 옮기면 다시 고장 날 수 있었으므로, 독립 보관인 입회 아래 시간을 읽고 두 곳에서 동시에 기록하기로 했다.
“시계 하나 확인하는 데 사람이 이렇게 많이 필요합니까?” 토비가 물었다.
“사람 하나를 없애는 데 아무도 필요 없다고 우기는 장치보다는 낫습니다.” 세아가 답했다.
나엘은 첫 번째 시간을 읽었다. 현재 시각은 자정을 조금 넘긴 열두 시 십팔 분. 보관실의 오래된 해시계와 제8문의 수동 종, 세탁소 거리의 공중시계가 모두 일치했다. 그런데 보호실 전광판은 이미 새벽 두 시라고 표시하고 있었다.
[긴급 운용 잔여 시간: 03:17.]
아지는 전광판을 보자 욕설을 삼켰다. “시간을 앞당긴 게 아니야. 근무 교대 표의 세 구간을 지웠네. 그 시간에 일할 사람이 없으니 하루가 끝났다고 보는 거야.”
피엘은 이상함을 느꼈다. 시간을 훔친 것이 아니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을 지워서 날짜를 건너뛰고 있었다. 아지와 휴나처럼 이미 장부에서 사라진 노동자들이 많을수록 기계는 자신에게 유리한 미래를 빨리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럼 사람들을 찾아서 시간을 되돌립니까?” 토비가 물었다.
“아니요. 사라진 근무를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밤새 일했다고 말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요.”
휴나는 세탁소 벽에서 열일곱 해치의 수건 수선표를 꺼냈다. 매일 누가 맡기고 누가 찾아갔는지가 손글씨로 남아 있었다. 아지는 야간 근무자의 점검 장부를 펼쳤다. 이름이 지워져도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시간이 있었다. 세아는 당사자에게 공개 동의가 있는 부분만 정리했다.
그때 광산에서 연락이 왔다. 절벽 아래 갇혔던 사람 가운데 두 명을 구조했고, 한 명은 아직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구조대가 보내 온 손전등 영상에는 작은 손 하나가 철제 기둥을 붙들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광산 견습생 이오였다. 그는 어린 동료를 먼저 올려 보낸 뒤 낮은 통로에 갇혔다.
피엘은 화면을 똑바로 보았다.
“저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 여기서 다투는 동안에도 저쪽에서는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세아가 지원 상황을 확인했다. 구조대는 산소를 더 확보했고, 다른 길을 뚫는 장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0경로의 긴급 회선은 아직 필요했다. 모든 장치를 꺼 버리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건 위험 속의 사람들이었다.
아지가 말했다. “독립 회선으로 필요한 정보만 전달하고, 발신 서명은 빌리지 않으면 돼. 삼백 년 전 설계에는 그런 방식이 있었네.”
벤은 계약서의 도장을 두드렸다. “하지만 책임은 남아야지. 구조가 실패하면 ‘기계 탓’이라고 말하며 도망칠 수 없게.”
토비는 조용히 벽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은 흙 묻은 농부의 손이었고, 오래된 신탁보다 그 손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말해 주었다.
“지금은 누가 죽어야 하는 게 아니라, 이오에게 도달할 길을 뚫어야 할 때네요.”
피엘은 광산 구조대와 제0경로의 운용 경로를 분리해 기록했다. 의료 도움과 물자 발송은 계속하되, 담당자 소멸을 요구하는 서명을 구조 요청의 조건에서 떼어 냈다. 그 과정에는 시간이 들었다. 밤 한 시, 아지의 장부에 빨간 펜으로 ‘수정’이라는 글자가 붙었다.
전광판의 시간이 되돌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그 아래 작은 항목 하나가 나타났다.
[독립 시간 증언: 1건 수락.]
세아가 한숨을 쉬었다. “한 사람을 되찾았네요.”
“한 사람의 시간을 인정받은 거죠.” 피엘이 말했다. “아직 이름과 권리를 전부 되찾은 건 아닙니다.”
한편 의료 연락망에서도 회신이 도착했다. 고열로 격리됐던 우편부는 이름이 아니라 임시 번호로 불리고 있었다. 감염 위험 때문에 출입을 제한해야 했지만, 환자의 가족은 그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세아는 병원에 환자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 가족 연락 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당장 가족에게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토비가 물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분이 누구에게 연락하기를 원하는지는 확인해야 합니다. 구조는 모든 권리를 한꺼번에 가져오는 일이 아니니까요.”
잠시 뒤 환자는 누이에게만 소식을 알려 달라고 답했다. 병원은 그 연락을 받아들이고, 다른 가족에게 전할지는 치료가 끝난 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했다. 피엘은 그 작은 결정이 보호실의 거대한 기계보다 훨씬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소멸 위기에 몰려 있으면서도, 누군가의 연락처가 그 사람의 허락 없이 공개돼서는 안 된다는 판단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지는 수동 송달 장치 옆에 쌓인 사용 설명서를 꺼냈다. 설명서의 앞쪽에는 실제 구조 업무를 위한 빨간 밑줄이 많았고, 뒤쪽에는 ‘비용 감소’, ‘결재 단계 생략’ 같은 문구가 빽빽했다. 그는 첫 번째 설명서를 손에 들었다.
“이게 우리가 처음 만들었던 것이네.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이 종을 울려서 다른 사람을 불렀지. 언젠가부터는 사람을 부르는 시간을 아끼겠다고, 앞으로 없어질 사람을 먼저 계산하기 시작했어.”
토비가 설명서 끝을 펼쳤다. 책갈피로 말린 감자 껍질이 끼워져 있었다. 아지가 겸연쩍게 웃었다. “옛날엔 야간 간식이 감자뿐이었거든. 검사하다 배가 고파지면 책을 덮고 밖에 나가 먹었지.”
“그랬던 때가 더 건강했겠네요.”
“사람을 기다릴 줄 알았으니 그런 면에선 그랬지.”
피엘은 수첩에 적었다. ‘구조를 위한 예외는 구조가 필요할 때만 작동해야 한다. 예외가 끝나면 본래 권리를 회복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 문장은 장치가 정해 준 답이 아니라, 방 안의 사람들이 각자 확인한 결과였다.
새로운 전송음이 울렸다. 방 가운데 의자 하나가 스르르 뒤로 밀리더니, 누군가 앉은 것처럼 가죽이 움푹 꺼졌다. 투명한 등받이 위로 흐릿한 얼굴이 드러났다.
“원본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기계가 말했다. “복제본에게 자리를 넘겨받도록 하겠습니다.”
그 얼굴은 대리 피엘의 것이었다.
제165화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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