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계의 지하 거래소에는 입구가 세 개 있었다.
첫 번째는 돈 많은 사람을 위한 문, 두 번째는 절박한 사람을 위한 문, 세 번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을 위한 문이었다. 벤은 망설임 없이 세 번째 문을 열었다.
“왜 여기로 들어갑니까?” 피엘이 물었다.
“첫 번째는 입장료가 비싸고, 두 번째는 들어가는 순간 계약이 성립하거든.”
“세 번째는요?”
“길을 잃었다는 사실만 인정하면 돼.”
문 뒤에는 사치스러운 응접실 대신 계단이 있었다. 양쪽 벽에는 온갖 물건이 걸려 있었다. 팔지 못한 꿈을 담은 유리병, 악몽을 피하기 위해 잘라 낸 잠옷 단추, 누군가 끝내 하지 못한 사과의 첫 글자. 토비는 진열장을 구경하다가 발을 멈췄다.
“세상엔 이런 걸 파는 사람도 있어요?”
“세상에선 팔 수 없는 것일수록 여기선 값이 잘 나가지.” 벤이 말했다.
토비는 진열장 안에 있던 작은 씨앗 주머니를 보았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심는 씨앗’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저건 얼마예요?”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날 하루.”
토비는 잠시 주머니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그럼 비싸네요. 전 그걸로 밭을 갈래요.”
벤은 웃었다. 웃음에는 평소의 능청스러움이 없었다.
열 개의 창구마다 규칙이 달랐다. 첫 번째 창구에서는 결코 실현되지 않은 소원을 샀고, 두 번째에서는 누군가의 망설임을 샀다. 아홉 번째 창구에는 ‘영원한 행복’이라고 적힌 상품이 진열돼 있었다. 가격표에는 아주 작은 글자로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시간을 모두 폐기함’이라고 붙어 있었다.
토비는 가격표를 한참 읽다가 직원에게 물었다.
“그럼 슬픈 날은 사라지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고객님.”
“그럼 슬픈 날에 만난 사람도요?”
직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아마 함께 삭제되겠죠.”
토비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럼 행복한 건지 모르겠는데요.”
직원은 피곤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대부분 고객은 거기까지 묻지 않습니다.”
토비는 더 캐묻지 않았다. 누군가 정말로 슬픈 날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다만 자신은 슬픈 날을 통째로 버리기보다는 그것을 견디게 해 준 사람을 기억하고 싶었다.
피엘은 창구 옆 민원함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다. 진열된 수백 건의 계약 가운데 실제로 고객에게 반환된 기록은 단 한 건도 없었다. 민원이 없기 때문일까, 민원을 낼 수 없게 했기 때문일까. 그는 수첩을 꺼내 민원함의 사진을 그려 두었다.
거래소 중앙에는 붉은 창구가 열 줄 늘어서 있었다. 악마들은 고객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물었다. 어떤 노인은 젊은 날의 비밀을, 어떤 여인은 두려움 하나를 내놓았다. 피엘은 불편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천계에선 이런 거래를 금지하지 않습니까?”
“천계는 금지 조항을 잘 만들지. 대신 누가 그 조항에 서명했는지는 안 보여 주고.”
벤의 말에 피엘은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이 찾는 리세트는 가장 안쪽 회계실에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빗어 넘긴 여인은 계약서 더미 사이에서 작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벤을 보자마자 종을 울렸다.
“반품 고객 입장.”
“인사 한번 고약하네.” 벤이 말했다.
“네가 마지막으로 빌려 간 그림자 상자가 아직 안 돌아왔거든.”
“다음 달에 갚을게.”
“그 말 벌써 여덟 번 들었어.”
리세트는 일행을 훑어보았다. 성검을 멘 농부, 닭 사료 주머니를 든 마법사, 낡은 배송 제복을 입은 천사. 그녀는 피엘을 발견하고 잠깐 계산기를 멈췄다.
“아, 그 이름.”
“저를 아십니까?”
“이름은 알아. 얼굴이 둘이라서 곤란하다는 것도.”
피엘은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열여덟 해 전 보리골 계약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리세트의 회계실에는 세 개의 시계가 걸려 있었다. 하나는 인간의 시각, 하나는 마계의 시각, 마지막 하나는 계약자가 가장 후회하는 순간을 가리켰다. 벤이 마지막 시계를 보자 시곗바늘이 멈췄다. 열여덟 해 전, 보리골 계약서에 서명하던 시각이었다.
“장식 취향 참 고약하네.”
“잊고 살지 말라고 달아 놨어.” 리세트가 말했다.
벤은 그 시계를 외면하고 싶었다. 악마는 오래 살지만 오래 살수록 기억하기 싫은 일도 많아진다. 대부분의 악마는 그런 기억을 다른 악마에게 팔아 버린다. 벤은 그날을 팔지 않았다. 대신 돈벌이가 안 되는 계약 조항만 공부하며 살아왔다. 적어도 다시는 끝까지 읽지 않은 계약에 서명하지 않겠다는 다짐 때문이었다.
피엘은 그가 천천히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았다.
“무리해서 설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명해야지. 이번 사건에는 내가 제대로 읽지 않은 서명이 있으니까.”
리세트는 일행에게 의자를 권했다. 의자마다 가격표가 붙어 있었는데, 토비가 앉으려 하자 의자 등받이가 속삭였다.
‘편안함의 대가로 오늘의 한숨 한 번.’
토비가 벌떡 일어났다.
“전 그냥 서 있을래요.”
“그 의자는 무료야.” 리세트가 말했다.
“마음에 안 들어요.”
피엘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방 안에선 작은 편의에도 값을 붙였다. 누군가는 그 값을 기꺼이 낼 테지만, 그 사실을 제대로 알려 주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리세트는 서류를 보지 않았다.
“계약은 유효했어.”
“당사자가 기억하지 못합니다.”
“계약할 때는 동의했겠지.”
“동의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리세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악마한테 증명 책임을 묻는 천사가 다 있네.”
“그럼 환불 규정부터 확인합시다.” 벤이 끼어들었다.
리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가 그 조항을 왜 알아?”
“네가 가르쳤잖아. 상대가 뭘 내놓는지 설명하지 않았으면 받은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그거야 아주 오래전 교과서 이야기고.”
“옛 규정이라도 삭제되진 않았지.”
벤은 검은 동전을 책상에 세웠다. 동전은 쓰러지지 않고 빠르게 돌았다. 계약의 수취인 이름이 벽에 나타났다.
[계약 품목: 루나 관련 증언의 소유권.]
[수취인: 공란.]
[대금 지급자: 대리 피엘.]
[최종 수익자: 기록 없음.]
리세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정산이 끝난 건이야.”
“수익자가 없는데 어떻게 끝나?” 벤이 물었다.
“그때는 그런 방식이 가능했어.”
“누가 허락했어?”
리세트는 잠시 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옛날에 너한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계약 당사자가 절박할수록 한 줄 더 읽어 주라고 했지.”
“기억해.”
“그런데 넌 그날 서명을 했어.”
“그래서 여기 온 거야.”
“옛날의 선택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뒤집으면 신용이 무너져.”
“알아. 그래서 사실을 확인하러 왔지. 내가 틀렸다면 틀렸다고 인정할 거고.”
리세트는 한참 계산기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그날 마을 사람들 얼굴을 기억하니?”
“희미해.”
“나는 또렷해. 살려 달라고 했어. 대리 피엘은 모두 구하겠다고 약속했지. 내가 본 건 거기까지였어.”
“그럼 동의를 받은 사람이 누군지 기억해?”
리세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을 대표가 누구였는지 계약서에도 없었다. 모두를 구하겠다는 약속에 감동한 나머지 누구의 인생을 누구의 동의로 바꿀 수 있는지 묻지 않았던 것이다.
“그게 오늘 우리가 확인하려는 부분이야.” 벤이 말했다.
리세트는 신경질적으로 종을 눌렀다. 피엘은 그 행동에 위협보다 당혹감이 먼저 담겨 있다는 것을 보았다.
리세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아래의 종을 눌렀다. 철문이 닫히고 천장에서 가느다란 사슬이 내려왔다. 사슬 끝에는 작은 봉투들이 묶여 있었다.
[지급 내역 열람을 위한 기억 보증금 요구.]
토비가 고개를 저었다.
“또 기억을 가져가겠다는 거잖아요.”
“고객 정보는 소중하니까.” 리세트가 말했다.
피엘은 수첩을 펼쳤다.
“새 계약은 하지 않겠습니다. 기존 계약의 적법성만 확인하겠습니다.”
리세트가 냉소했다.
“그걸 누가 허락해 주는데?”
“당신이요.”
피엘은 오래된 계약서의 가장자리를 가리켰다.
[분쟁 제기 시 제삼자 열람 허용.]
“보리골 주민들은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직접 동의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지금 요구하는 보증금도 부당합니다.”
“천사가 악마 법을 알아?”
“최근에 좀 배웠습니다.”
벤이 피엘의 어깨를 툭 쳤다.
“제자가 훌륭하네.”
리세트가 짜증스럽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벽 뒤에서 금이 간 장부 하나가 나왔다. 거기에는 계약의 세부 조항이 남아 있었다.
[보리골 주민들의 기억은 재난으로부터 격리한다.]
[최초 발신인의 위치는 원본 신탁 수신자에게도 숨긴다.]
[격리 해제 요청자는 이송된 대상의 안전을 보증해야 한다.]
토비가 숨을 들이켰다.
“이송된 대상이 루나예요?”
리세트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저어 주지도 않았다.
“너희가 그렇게 판단할 근거는 있겠지. 하지만 주소는 계약 당사자의 비밀이야.”
“그 당사자는 대리 피엘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그에게 어떻게 연락합니까?”
“직접 만나고 싶다면 수취함으로 편지를 보내.”
“제0경로입니까?”
리세트는 잠깐 웃었다.
“그보다 안쪽이지.”
그녀는 장부에서 작은 영수증을 뜯어 내밀었다. 영수증 한가운데에는 아홉 개의 구멍이 있었다. 벤의 흑요석 인장과 일치했다.
“공짜는 아니야. 네가 틀렸다는 게 밝혀지면 이 계약에 손댄 것에 대해 사과해.”
벤이 코웃음을 쳤다.
“사과라면 싸네.”
“악마가 사과하는 게 얼마나 비싼지 몰라서 그래.”
토비는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뒷면에 아주 작은 글자가 있었다.
[수령 장소: 돌아오지 않는 우편마차의 종점.]
[다음 출발: 사흘 뒤.]
[탑승 자격: 배달하지 못한 편지를 한 통 이상 가진 자.]
“우린 그런 편지 많잖아요.” 토비가 말했다.
토비는 계약을 곧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그는 벤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름을 잠깐 지우는 것과 영원히 지우는 건 다른 거겠죠?”
“서류상으로는 그렇지.”
“서류상으로만요?”
벤은 억지로 웃지 않았다.
“그래서 증언을 남겨야 해. 누구 하나 없어져도 다른 사람의 기억과 자료가 그 사람을 찾아 줄 수 있도록.”
토비는 리세트에게 물었다.
“여기 계약서에 임시라는 말을 쓸 수 있어요?”
“원본 운송 규약은 못 고쳐.”
“그럼 우리가 타기 전에 요구 사항을 붙이는 건요?”
리세트는 그를 다시 보았다. 별것 아닌 농부가 계속해서 계약서의 작고 귀찮은 질문을 찾아냈다.
“가능은 하지. 다만 통과할지는 마차가 결정해.”
“그럼 거기서도 물어보면 되겠네요.”
리세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왜 너 같은 사람이 용사의 신탁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아.”
“잘못 온 거라니까요.”
“바로 그 말도.”
피엘은 그 대화를 듣고, 토비를 구해야 할 무력한 일반인으로만 보아 온 자신의 시선을 돌아봤다. 그는 농부라서 규정을 몰랐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규정의 빈틈을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리세트는 처음으로 토비를 오래 바라봤다.
“너희는 많겠지. 하지만 마지막 조건은 안 읽었네.”
영수증 아래에 문장이 하나 더 떠올랐다.
[마차가 출발하면 승객 중 한 명의 이름이 운송 기록에서 임시 삭제된다.]
피엘이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또 이름을 지우겠다는 겁니까?”
“그게 그 길의 통행료야. 가 보고 싶다면 방법을 찾아.”
거래소를 나오는 길, 벤은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피엘이 물었다.
“리세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아니.”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났죠?”
벤은 한참 걸은 뒤에야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 그 계약서에 증인으로 서명했거든.”
피엘이 멈춰 섰다.
“당신이요?”
“그때 난 단순히 재난을 막는 거래라고 믿었어. 그래서 내용을 끝까지 확인하지 않았지.”
벤은 손에 쥔 검은 동전을 들여다봤다.
“이번에는 끝까지 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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