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골의 우물에서 솟아난 물은 새까맣지 않았다.
처음엔 먹물을 풀어 놓은 것처럼 보였지만 가까이서 보면 물속마다 작은 그림들이 떠 있었다. 열여덟 해 전 마을을 비췄던 햇살, 나무다리 위를 달리는 아이들의 발, 창가에서 국을 끓이는 에마의 뒷모습. 누군가 한때 있었던 하루를 잘게 찢어 물에 섞어 놓은 듯했다.
그 물은 우물 턱을 넘자마자 길을 따라 달렸다.
“물길을 막아야 합니다!” 우린이 외쳤다.
토비는 이미 성검을 뽑았다. 성검을 마을 입구 땅에 박자 눈부신 흰 선이 돌담 사이로 뻗었다. 물길이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흘러가는 기억의 조각들은 갈 길을 잃고 사람들 다리에 달라붙었다.
우린이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나는… 그날 아이들을 우물 쪽에 두고 왔어.”
그 옆에서 빵집 주인이 소리쳤다.
“나는 대피종을 안 울렸어! 내가….”
피엘은 그 말을 들으며 불길함을 느꼈다. 돌아오는 기억이 전부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물에는 사람들의 두려움과 후회까지 섞여 있었다. 기록이 지워진 자리에 죄책감이 먼저 들어오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장면을 혼자 판단하지 마세요!”
그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서로 확인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씌우지 마세요!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에마는 맨 먼저 집의 문을 열어 이웃들을 들였다. 우린은 마을 지도에 높은 지대를 표시했고, 빵집 주인은 빵을 젖지 않을 천 주머니에 넣어 옮겼다. 누군가 우물가에 남겨진 아이를 안고 달려왔다.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도 아이를 먼저 들여보냈다.
피엘은 자기 수첩을 찢어 대피 안내문을 만들었다. 가게 앞에서 길을 잃은 노인에게는 ‘북쪽 언덕으로 이동’이라는 표식을 건넸고, 낮은 집에 갇힌 사람에게는 오스벨이 만든 작은 종을 던졌다. 종이 울리는 곳으로 벤의 그림자가 뻗어 발판이 됐다.
“이것도 신탁에 없는 행동인데 괜찮겠어?” 벤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긴급 구호는 신탁보다 우선합니다.” 피엘이 답했다.
“그런 규정도 있었어?”
“방금 확인했습니다. 제가 왜 이걸 이제야 읽었는지 모르겠군요.”
벤은 웃으며 한 노인을 등에 업었다. 하지만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순간 낯설게 바뀌었다. 열여덟 해 전 어린 악마였던 그는 검은 서류를 들고 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서명만 해 주면 마을은 살 수 있어.’ 벤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지금 그는 등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과거에 무엇을 몰랐는지 확인하는 일은 중요했지만, 눈앞의 사람을 안전하게 옮기는 일이 먼저였다.
토비의 성검이 얇게 떨렸다. 이번에는 마법도 힘에 부쳤다. 우물 아래서 계속 물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오스벨은 무릎을 꿇고 흙을 만졌다.
“물이 아니라 시간의 배수구를 열어 놓은 셈이군.”
“그런 걸 닫을 수 있습니까?” 벤이 물었다.
“내가 닭을 키우라는 신탁을 받은 뒤로 실험한 게 바로 그런 거야.”
“시간의 배수구하고 닭이 무슨 상관인데?”
“병아리가 알 속에서 나올 때를 어떻게 아는지 알아? 예정된 시간만으로는 안 돼. 안에서 준비가 끝나야 하지.”
오스벨은 품에서 은빛 달걀을 꺼냈다. 그동안 수없이 들여다본 물건이었다. 그는 처음에 그것을 부화시키려 했지만 알은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제는 알이 무엇을 품고 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각을 보관하는 껍질이네.”
그가 달걀을 우물 위에 올리자 물이 잠깐 멈췄다. 한꺼번에 터져 나올 사건을 나눠 흘려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몇 분이나 버팁니까?” 피엘이 물었다.
“잘하면 열두 분. 못하면 세 분.”
“왜 범위가 그렇게 넓습니까?”
“마법은 자연을 이해하는 학문이야. 나는 아직 닭을 다 이해하지 못했거든.”
토비는 무심코 웃을 뻔했다. 하지만 곧 눈앞의 상황에 집중했다. 물길을 돌리는 동안 사람들을 안전하게 피신시켜야 했다.
피엘은 원본 계약의 반환 조항을 찾았다. 해지는 이미 진행됐다. 되돌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계약서 하단에 아주 작은 글자가 남아 있었다.
[반환된 기억은 원 소유자의 응답 없이는 최종 확정할 수 없음.]
“기억을 강제로 집어넣을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피엘이 외쳤다.
벤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물은 왜 나오는 거지?”
“확인하지 않은 기록들이 갈 곳을 잃고 떠돌고 있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보내기 전에 임시 보관하면 돼요.”
“보관소가 여기 어디 있다고?”
토비가 성검을 뽑으려다 말고 대답했다.
“헛간이요.”
“뭐?”
“수확한 감자도 당장 먹을 만큼만 집에 들이고, 나머지는 헛간에 둬요. 기억도 좀 기다리면 안 돼요?”
피엘은 잠시 멈칫했다. 너무 인간적인 비유였지만 정확한 원칙이었다. 오스벨의 달걀이 시간을 늦추고 있는 동안 피엘은 마라에게 원격 통신을 요청했다. 수첩의 동판이 푸른빛을 냈다.
“마라 씨, 원격 임시 보관함을 열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 규모인데요?”
“마을 하나 분량의 열여덟 해 전 기억입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우체국 야간 창고보다 크겠네요.”
“많이 큽니다.”
“그럼 마을 전체가 보관소가 되는 수밖에 없겠어요. 각자 맡을 수 있는 만큼 보관하고, 다른 사람 몫은 건드리지 않도록 표시해야 합니다.”
피엘은 그 말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막 기억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는데, 왜 또 보관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우린은 먼저 손을 들었다.
“제가 기억할 수 있는 게 뭔지 말해 주십시오. 누굴 탓해야 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할게요.”
에마가 뒤이어 나섰다.
“나는 우리 집에 아이가 둘 있었다는 사실부터 돌려받고 싶어요.”
하나씩 선택이 이루어졌다. 모두가 이름을 얻지는 못했다. 어떤 이는 오늘 당장 아무 기억도 돌려받지 않겠다고 했다. 피엘은 그 선택도 적었다.
[기억 반환: 신청자별 분리 처리.]
[미신청 기록: 임시 보관.]
[강제 할당: 금지.]
우물물이 조금씩 맑아졌다. 두려움과 후회까지 떠밀려 오던 물결에서 살아 있었던 구체적인 장면들이 분리됐다. 한 아이는 물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고 했고, 다른 아이는 자신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풍경을 봤다고 했다. 사람들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방금 본 것이 자기 기억인지, 부모에게 들은 이야기인지, 아니면 물이 만들어 낸 환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피엘은 수첩에 세 가지 칸을 만들었다.
[내가 직접 겪은 장면.]
[다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
[출처를 아직 알 수 없는 장면.]
“아는 건 아는 대로, 모르는 건 모르는 대로 적어 주세요. 나중에 생각이 바뀌면 정정할 수 있습니다.”
한 노인이 손을 들었다.
“난 방금 내 아들이 마을에서 도망치는 걸 봤네. 하지만 우리 아들은 그때 다섯 살이었어.”
“그렇다면 당장 누군가를 비난할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럼 내가 본 게 거짓이란 말인가?”
“거짓이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우린이 작게 말했다.
“그렇게 쓰면 사람들은 자기 말을 안 믿어 준다고 할 텐데요.”
“믿고 싶은 말만 사실로 기록하면, 또 누군가가 지워질 수도 있습니다.”
주민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은 즉시 완벽한 진실을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나중에 다시 확인할 수 있도록 원본의 모양을 남기는 일이었다.
에마의 앞에는 작은 아이 둘이 한 그릇의 딸기를 나눠 먹던 기억이 떠올랐다. 우린의 앞에는 그날 대피종을 울린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소리 없이 울었다. 자신이 도망쳤다고 믿어 온 죄책감이 사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지막 물줄기가 우물 속으로 돌아가기 전 작은 아이가 피엘의 소매를 잡았다.
“천사님, 그럼 제가 본 사람은 누구예요?”
아이는 물속에서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아이를 보았다고 했다. 피엘은 답을 몰랐다. 누군가의 잃어버린 형제일 수도 있었고, 두려움이 만들어 낸 그림일 수도 있었다.
“이름을 아나요?”
“아뇨.”
“그러면 여기서 같이 기다려요.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아이는 실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으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천사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그럼에도 아이는 피엘이 자신의 말을 수첩에 남기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정말 적었어요?”
“네.”
“나중에 제가 다시 물어보면요?”
“그때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록 번호도 적어 줄게요.”
피엘은 아이에게 작은 종이표를 건넸다. 그제야 아이는 안심한 듯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피엘은 그 모습을 바라봤다.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에도 접수 번호를 만들어 주는 일. 전에는 너무 사소해 보였던 일이 이제는 누군가에게 돌아갈 길이 될 수 있었다.
물길이 완전히 멈춘 건 새벽녘이었다.
벤은 우물가에 남겨 둔 계약문을 물 밖으로 끌어냈다. 종이는 물에 젖었지만 글자는 선명했다. 그는 계약서 뒷면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여기 대금 지급 항목이 있어. 대리 피엘이 보리골의 모든 목격담을 사들였어.”
“목격담을 어떻게 사고팝니까?” 피엘이 물었다.
“사실을 없앤 게 아니라, 누가 말해도 아무도 믿지 못하도록 만든 거지. 누군가 루나를 봤다고 말하면 그 말을 한 사람부터 자기 기억을 의심하게 됐을 거야.”
토비는 마을 우린의 표정을 떠올렸다. 빈 줄을 보고도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당황하던 얼굴이었다. 목격자가 스스로 입을 다물게 된다면 누군가를 지우기는 너무나 쉬웠을 것이다.
“그런 계약이 왜 유효한 건데요?”
벤은 쓰디쓰게 웃었다.
“마계에는 오래된 원칙이 있어. 계약의 대가는 거짓이 아니라 진짜여야 한다고. 그런데 그 진짜를 누가 소유할 수 있느냐는 늘 논란이었지. 남의 기억을 자기 물건처럼 파는 거래는 처음부터 문제였을 가능성이 높아.”
피엘은 계약문을 보존하라고 했다. 법률을 아는 자들끼리 싸우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법률의 끝에는 실제로 살아 있던 루나가 있었다. 추상적인 분쟁으로 끝내지 않기 위해서는 이름을 계속 적어 두어야 했다.
사람들은 젖은 집안을 정리했다. 누군가는 밥을 지었고 누군가는 무너진 울타리를 세웠다. 기억이 돌아와도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이 피엘에게는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하지만 토비는 웃지 않았다. 그는 우물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루나는 어떻게 된 거죠?”
피엘이 우물 속에 남은 마지막 기억 조각을 펼쳤다. 물속에는 어린 루나가 서 있었다. 소녀는 토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다 누군가가 나타나자 뒤돌아섰다.
그 사람은 천사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왼손에는 검은 인장이 들려 있었다.
[현장 이송 명령.]
[대상: 루나.]
[이송 사유: 최초 발신인의 위치 노출 방지.]
[담당: 대리 피엘.]
토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동생을 누가 데려간 거예요?”
피엘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기억의 영상이 보여 준 것은 한순간뿐이었다. 그 후 루나가 살아 있는지, 어디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었다.
“문서상으론 대리 피엘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그 사람, 천사님과 같은 사람이라면서요.”
피엘은 고개를 숙였다.
“제 일부에서 나온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 일을 변명하지는 않겠습니다.”
토비는 한참 피엘을 바라봤다. 그리고 성검을 내려놓았다.
“천사님한테 화가 나요. 하지만 제가 화내야 할 상대가 누군지도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요.”
토비는 손등으로 눈가를 문질렀다.
“동생 이름을 겨우 기억했는데, 이제는 얼굴을 잊을까 봐 무서워요.”
피엘은 수첩 한 장을 뜯었다. 그 위에 ‘루나’라고 또박또박 썼다. 그리고 토비에게 건넸다.
“잊으면 다시 읽으세요. 저도 같은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때 벤의 손바닥에서 검은 동전 하나가 울렸다. 마을 계약에 사용된 지급 흔적을 따라가던 추적 마법이었다.
[대금 수취인 확인.]
[마계 지하 거래소. 계약 대행인: 리세트.]
[정산 항목: 루나의 주소와 관련된 모든 증언.]
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리세트라고?”
“아는 악마입니까?” 오스벨이 물었다.
“내가 처음 계약을 배우던 때의 선배야.”
그는 동전을 꽉 쥐었다.
“그리고 절대로 손해 보는 계약을 하지 않는 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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