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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13화
PAYLUA ORIGINAL · 제13화

13화. 이름 없는 밭에는 무엇이 자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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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책장
검은 밭은 가로 세로 스무 걸음 남짓이었다. 그런데 토비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밭의 끝이 뒤로 한 걸음씩 물러났다. 오스벨은 마법으로 거리를 측정해 보려 했지만 줄자가 숫자를 잃었다. 벤은 그림자를 뻗었으나 그림자는 땅속으로 들어가자마자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돌아왔다. “제 이름표부터 꺼내 볼게요.” 토비가 말했다. “잠깐만요.” 피엘이 손을 들어 막았다. “원본 수신자인 건 확인됐지만 이것을 만지는 대가가 뭔지 모릅니다.” “아까는 동의하라고 하셨잖아요.” “동의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요?” 피엘은 막힌 대답 대신 수첩을 들었다. 토비가 괜히 짜증을 내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자기 가족의 빈 의자가 나타난 뒤, 그는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다. 그렇지만 서둘러 아무 서류나 읽게 만드는 것은 도움과 달랐다. “그러면 위험을 나눠 가질 방법을 찾겠습니다.” 벤이 땅 가장자리에 앉아 손바닥을 폈다. “이곳은 악마의 계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런데 한가운데는 악마가 손댄 흔적이 없네. 누군가 약속을 지키려고 만든 곳이야. 밖에서 빼앗지 못하도록.” “누구의 약속?” 오스벨이 물었다. “이름을 남긴 아이들.” 토비는 숨을 들이켰다. 빈 숟가락, 왼쪽으로 그린 동그라미, 달리기 시합에서 늘 이기던 작은 아이. 흩어진 기억이 서서히 이어졌다. “저한테 동생이 있었어요.” 말을 뱉자마자 그는 스스로 놀랐다. “이름은… 이름은 아직….” “억지로 떠올리지 말아요.” 피엘이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는 속도보다 중요한 건 그것이 당신 기억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스벨이 은빛 달걀을 밭의 경계에 올렸다. 달걀 표면에 잔금이 퍼지더니 안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왔다. 검은 사각형의 한쪽 모서리가 허물어졌다. 평범한 흙과 어두운 흙 사이에 작은 틈이 생겼다. “신성 계약을 풀어 버릴 순 없지만 그 아래 있던 실제 흙은 만질 수 있어.” 토비는 무릎을 꿇었다. 갈라진 틈에 손가락을 넣자 마른 씨앗 하나가 걸렸다. 다른 쪽에는 나무 이름표가 있었다. 그는 이름표를 조심스레 끌어냈다. 글자는 한 글자씩 돌아왔다. ‘루나.’ 토비가 울음을 터뜨릴 줄 알았던 피엘은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 토비는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입술만 몇 번 움직였다. “루나.” 그는 다시 말했다. “제 동생은 루나예요.” 오스벨은 이름표를 자기 손으로 확인하려다가 멈췄다. 토비의 기억을 증명할 방법은 여럿이었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마법사의 판정이 아니라 토비가 직접 말할 기회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돌아오면 무엇부터 하고 싶나?” 토비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의 루나는 그와 감자를 나눠 먹고, 달리기를 하면 늘 이기고, 밤이 오면 창가에서 별을 세던 아이였다. 그런데 자신은 그 아이를 기억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됐다. 누군가 루나의 이름을 빼앗았다는 사실보다 스스로 그 아이 없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더 아팠다.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어머니가 아직 기억하실까요?” 피엘은 ‘기억할 겁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약속은 확인하러 함께 가겠다는 것뿐이었다. 토비는 흙을 손바닥에 올려 냄새를 맡았다. 보리골의 흙에는 늘 짚이 썩는 냄새가 났다. 그러다 문득 루나가 작은 삽을 거꾸로 들고 흙을 퍼 올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루나는 씨앗이 싹트지 않자 땅이 미워서 그런다고 울었다. 토비는 땅이 미운 게 아니라 아직 잠들어 있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날 제가 이름을 심은 건 루나가 사라진 뒤였어요.” 그는 목소리를 낮췄다. “사람들이 루나는 원래 없었다고 했어요. 저는 화가 나서 그 애 이름을 나무에 새겼어요. 누가 없었다고 말해도 땅에는 남아 있으라고요.” 오스벨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가장 대단한 마법사도 하지 못할 일을 작은 아이가 했던 것이다. 지워지는 사람의 이름을 평범한 나무 조각에 남겨 두는 것. 그 말이 끝나자 밭이 세차게 흔들렸다. 검은 흙에서 수많은 손이 뻗는 듯한 그림자가 일어났다. 오스벨이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그림자들은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표 쪽으로 몰려들었다. 오래 기다린 주소를 찾은 편지들처럼. 피엘의 사본 장부가 열렸다. [수신인 토비의 기억 일부 복원.] [추가 기록 감지: 루나.] [원본 신탁 봉인 해제 조건: 당사자의 자유로운 응답.] 빈 종이에 첫 문장이 떠올랐다. [네가 지켜야 할 것은 왕국도 왕도 아닌, 지워진 사람의 이름을 부를 권리다.] 토비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이게 제 진짜 신탁인가요?” “원본 첫 문장입니다.” 피엘이 말했다. “아직 모든 문장은 확인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누가 이런 일을 제게 맡겼죠? 저는 싸움도 못하고, 서류도 못 읽고….” “그건 사실이 아니지.” 오스벨이 말했다. “자네는 가장 먼저 이 밭이 이상하다는 걸 기억해 냈네.” “그건 제 밭이니까요.” “바로 그게 중요하다는 걸세.” 루나의 이름이 돌아오자 밭 바깥의 검은 실들이 떨렸다. 곧 마을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군가 우물 옆 경보종을 치고 있었다. 토비는 밭을 떠나기 전에 나무 이름표를 조심스럽게 소매 안에 넣었다. 루나의 이름은 잘 보였지만 그 아래에 덧붙여진 작은 선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 같은 이름표에 도장을 찍으려다 멈춘 흔적이었다. 피엘은 확대 마법으로 확인했다. 서명이 아니라 ‘수령 보류’라는 기호였다. 토비는 아직 모든 원본 신탁을 받은 것이 아니었다. 일부만 반환됐고, 마지막 문장은 여전히 누군가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름을 찾으면 바로 신탁도 다 찾는 줄 알았어요.” “신탁의 핵심은 한 사람의 이름만이 아닙니다. 그 문장이 어떤 선택을 요구하는지까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 아직 해야 할 일이 많네요.” 피엘은 수첩을 닫았다. “예. 하지만 이름을 찾는 일이 시작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토비는 밭을 돌아봤다. 검은 경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저 안에는 루나 이외에 누군가의 기다림이 있을지도 몰랐다. 무작정 파헤치면 다른 사람의 이름표까지 부술 수 있었다. 그는 언젠가 돌아와 제대로 조사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네 사람은 서둘러 돌아갔다. 에마의 집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에마가 갑자기 집 안에 침입자가 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마는 식탁 한편의 빈 의자를 붙잡고 있었다. “누가 여기 앉았었어.” 그녀는 토비를 보자 눈을 크게 떴다. “토비, 네 동생이….” 말이 끝나기 전에 공기 속에서 하얀 종이가 펼쳐졌다. [보리골 주민 대상 관계 기록 자동 보호.] [인가되지 않은 이름의 발언 금지.] 그 종이는 에마의 목소리를 빼앗았다. 그녀는 입을 움직였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주변 주민들도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려다 침묵했다. 피엘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보호가 아닙니다. 목격자를 봉쇄하는 거예요.” 벤이 손을 뻗자 계약 문장이 나타났다. [마을 대표 동의하에 시행한 관계 기억 분리.] [동의일: 열여덟 해 전.] [대리 서명: 피엘.] “또 너야.” 벤이 말했다. 피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오른손 도장 모양이 아니라 왼쪽으로 기울어진 점이 보였다. 대리 피엘의 서명이었다. 하지만 거래를 고발하려면 그것이 강제였다는 증거가 필요했다. 토비는 마을 사람들 앞에 섰다. “말을 못 하시면 고개만 끄덕여 주세요. 여러분도 누군가를 잊은 것 같나요?”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살폈다. 아무도 먼저 대답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날의 재난이 돌아오면 누구의 잘못인지 밝혀질 수도 있었고, 예전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기억이 돌아오면 무슨 일이 생깁니까?” 나이 든 여인이 물었다. “아직은 모릅니다.” 피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럼 왜 우리가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감수하라고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지금의 계약이 어떤 것인지 확인할 권리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을 되찾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그 뜻도 기록하겠습니다.” 그 여인은 한참 피엘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리에 남았다. 기억을 돌려받을지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질문을 하겠다는 선택만은 했다. 토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동생 이름을 다시 찾고 싶은데, 그다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모르는 채로 살겠다고 정한 건 제가 아니었거든요.” 사람들 사이에서 한숨이 흘렀다. 아이들이 어른의 옷자락을 잡았다. 누군가는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갔고, 누군가는 광장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을이 하나의 목소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피엘에게는 오히려 중요한 변화로 보였다. 얼마 전까지 그들은 똑같은 문장을 기계처럼 되풀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마을 서기 우린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빵집 주인과 우물 관리인이 끄덕였다. 이름을 잊은 사람들의 불편한 침묵이 아주 조금씩 형태를 갖췄다. “제가 루나라는 동생을 기억해 냈어요.” 토비가 말했다. 에마의 손이 입가로 올라갔다. 눈물이 그 손등을 타고 흘렀다. “누가 이름을 말하는 것까지 금지할 권리는 없어요. 기억나지 않더라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할 권리는 있잖아요.” 광장 한쪽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젊은 남자가 “기억을 돌려받으면 세금을 또 내야 하느냐”고 물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열여덟 해의 수확 기록이 바뀔까 봐 두렵다고 했다. “맞아요!” 누군가 소리쳤다. “나중에 왕국에서 거둬 가면 누가 책임집니까?” 피엘은 당황했다. 처음에는 너무 엉뚱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기억과 이름이 바뀌면 그에 기대어 작성한 법률과 장부도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잊힌 이름을 되찾고 싶어도 당장 먹고사는 일이 무너지길 원하지 않았다. “회복된 기록을 이유로 과거의 의무를 일괄 부과하는 것은 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그걸 누가 검토하는데요?” “저희가 먼저 확인 요청을 하겠습니다. 왕국의 정식 기록을 대조할 때 당사자 의견도 함께 제출하겠습니다.” 토비가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밭에서 지난 가을 수확을 다시 할 수는 없잖아요. 장부는 장부대로 고치되, 사람들이 살아갈 밭은 남겨야죠.” 그 말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몇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기억을 되찾는 일이 가슴속의 진실만이 아니라 지갑 속의 동전과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누군가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피엘은 그 말을 고스란히 수첩에 적었다. 천계 법령에는 침묵으로 남겨진 사람들의 동의를 인정하지 않는 항목이 있었다. 그리고 뜻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계약은 효력이 의심된다는 조항도 있었다. “집단 기억 분리 계약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동의 확인 전까지 추가 삭제를 중지해 주십시오!” 우린이 손을 들고 서명했다. 에마도 목소리 대신 떨리는 손으로 이름을 썼다. 마을 사람들이 차례로 이름을 올렸다. 모두가 같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다. 어떤 이는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피엘은 그 이름까지 강제로 적지 않았다. [이의 신청 접수.] [추가 삭제 일시 정지.] [원본 계약자 대면 심사 요구.] 에마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녀는 토비의 손을 붙잡았다. “루나가 있었어. 네가 언덕에서 데리고 놀던 아이. 동생을 찾으러 나갔던 날이….” 갑자기 그녀가 숨을 삼켰다. “그날 비가 오지 않았는데 홍수가 났어.” 피엘과 오스벨이 서로를 바라봤다. 브린 마을에서 보았던 역류한 저수지가 떠올랐다. “루나는 어디로 갔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에마는 바깥을 가리켰다. “우물 밑으로.” 그 순간 우물에서 물이 솟구쳤다. 빗방울 하나 없는 하늘 아래, 검은 물줄기가 사람 키보다 높이 치솟았다. 물 위로 거대한 금빛 계약 문장이 떠올랐다. [동의 철회에 따른 원상 회복 절차 개시.] [삭제된 관계와 함께 삭제된 사건도 복귀합니다.] 벤의 얼굴이 굳었다.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야. 계약을 풀면 마을이 잃어버린 재난까지 돌아오도록.” 토비는 성검을 잡았다. 검이 환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우물이 아니라 에마와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그러면 이번엔 도망치지 않고 막으면 돼요.” 우물 밑에서 여자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빠, 늦었어.’ 토비의 손에서 성검이 미끄러질 뻔했다. 그 목소리는 이제 이름과 함께 완전히 떠올랐다. 루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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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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