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골로 들어가는 길에는 표지판이 세 개 있었다.
첫 번째는 ‘밀이 잘 자라는 마을’, 두 번째는 ‘순박한 이웃들의 고향’, 세 번째는 ‘기억에 남을 여행지’라고 쓰여 있었다. 마지막 표지판은 글자를 긁어낸 자국 때문에 ‘기억에 남을’ 부분이 희미했다.
토비가 걸음을 늦췄다.
“원래 저런 표지판이 있었나?”
“고향이라면서요.” 벤이 대꾸했다.
“그러게요. 세 번째 건 낯선데.”
피엘은 표지판 기둥에 붙은 얇은 금빛 가루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천계의 주소 정정 마법에 쓰이는 분말이었다. 오래된 나무에 새 표지판만 얹은 게 아니었다. 그 밑에 있었던 무언가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덮어 둔 흔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됩니다.”
“그럼 뭘 믿죠?” 토비가 물었다.
“서로 확인하는 겁니다.”
피엘은 수첩을 펼쳤다. 도착한 날짜, 날씨, 동행인 네 명의 이름을 적었다. 오스벨은 그 밑에 ‘은빛 달걀 한 개’를 추가했고 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악마 한 명’이라고 써 넣었다. 토비가 고개를 젓자 벤이 말했다.
“농담도 남겨야지. 나중에 누가 지워 놓으면 더 티가 나거든.”
마을은 평온해 보였다. 돌담 위에서는 고양이가 졸고 있었고, 공터에서는 아이들이 밀짚 공을 차고 놀았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아이들은 공을 세 사람에게 차례로 넘기다가 꼭 네 번째 자리 앞에서 공을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비켜 차는 듯한 동작을 했다.
“저기 누구 있어?” 토비가 물었다.
아이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그럼 왜 거길 피해서 차?”
아이는 발끝으로 땅을 긁었다.
“몰라요. 그러기로 했어요.”
토비는 아이에게 공을 돌려주면서 웃지 못했다.
마을 한가운데는 조그만 장터가 열리고 있었다. 보리빵 냄새와 젖은 밀짚 냄새가 섞여 흘렀다. 토비가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구두장이 페란은 어릴 때 토비에게 장화를 싸게 팔아 준 사람이었고, 채소 장수 메이라는 장터에서 토비가 실수로 엎은 양파를 함께 주워 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토비가 이들에게 오래된 친구가 있었는지 묻자 이상한 일이 반복됐다.
“토비야, 우린 다 널 알지. 네 동생은….” 페란이 말을 멈췄다.
“동생이요?”
“아니,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메이도 말했다.
“네가 어릴 땐 늘 둘이서 왔잖아. 하나는 돈을 냈고 하나는 과자를 골랐어.”
“두 사람이요?”
“그랬나? 난 한 명만 기억해.”
두 사람은 자기 기억이 틀렸다고 생각하며 금방 화제를 바꾸려 했다. 토비는 더 묻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을 드러내는 걸 부끄러워했다. 자신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 일이 생기면 장난으로 넘기는 편이었다.
그러나 피엘의 수첩은 그 짧은 말들을 모두 기록했다. ‘페란: 동생 언급 후 혼란’, ‘메이: 어린이 둘의 방문 습관 기억’. 사실이라고 확정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증언은 작은 퍼즐 조각이었지 완성된 그림이 아니었다.
벤은 벽에 붙은 축제 공고문을 들여다봤다. 삼십 년 동안 열린 수확 축제의 참가자 명단이었다. 열여덟 해 전부터 아이들 달리기 시합 부문만 통째로 없어져 있었다.
“축제를 안 열었던 거야?”
“아니, 매년 했어요.” 토비가 대답했다. “저도 여러 번 뛰었고요.”
“그런데 기록만 없어졌네.”
오스벨이 공고문의 접힌 부분을 들어 올렸다.
“종이는 접힌 선을 기억하지. 문장을 지워도 누가 만졌는지는 남거든.”
안쪽에는 작은 손바닥 자국 두 개가 찍혀 있었다. 손가락 길이가 다른 어린아이의 손이었다. 토비는 어느 손이 자기 것인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두 아이가 함께 서 있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려웠다.
그의 집은 마을 끝, 작은 개울 옆에 있었다. 문 옆에는 낡은 괭이가 기대어 있었다. 토비는 괭이 자루의 갈라진 부분을 어루만졌다. 출발하기 전에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 그 사이 헝겊을 새로 감아 놓았다.
“어머니?”
안쪽에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 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여인이 나왔다. 토비의 어머니 에마였다. 그녀는 아들을 보자마자 달려와 안았다.
“어디까지 갔던 거니? 성검을 들고 나갔다는 소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편지 잘못 온 것 때문에요. 제가 진짜 용사는 아니에요.”
“그럼 왜 칼은 아직 메고 있어?”
“빌린 걸 당장 돌려줄 데가 없어서요.”
에마는 아들을 한참 살피다가 뒤쪽 사람들을 바라봤다.
“친구들이니?”
토비는 소개를 했다. 피엘이 천사라고 하자 에마는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오스벨이 대마법사라고 하자 오히려 고개를 끄덕였다.
“아, 닭 기르는 그분이구먼. 소문 들었어요.”
“내 마법 연구 업적보다 닭 소문이 먼저 도착했다니.”
오스벨은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에마는 마당의 암탉에게 줄 곡식 한 줌을 건네며 말했다.
“잘 키운 닭이 사람 먹여 살리는 법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했네.”
에마는 우선 손님들의 식사를 챙겼다. 천사에게는 따뜻한 보리차, 악마에게는 꿀이 든 빵, 대마법사에게는 달걀을 부쳐 주었다. 오스벨은 접시를 보자 한참이나 먹지 못했다.
“왜 그러세요?” 에마가 물었다.
“내가 달걀을 연구한 지가 얼마인데, 이 단순한 요리법을 몰랐다는 게 수치스러워서.”
“그건 버터부터 두르고 불을 너무 높이지 않으면 돼요.”
오스벨은 비법을 전수받는 제자처럼 진지하게 메모했다. 토비가 웃음을 참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그릇이 바닥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식탁 끝에 있던 좁은 공간 앞에서 멈췄다. 토비는 그 자리를 보자 가슴이 이상하게 먹먹해졌다. 어린 시절 누군가 거기에 앉아서 그의 달걀을 훔쳐 먹곤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안 먹었다고 뻔뻔하게 우겼다.
“그릇을 주워야죠.” 피엘이 말했다.
토비는 곧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여기 누가 앉았던 것 같은데.”
에마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그녀는 다른 그릇 하나를 더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습관이라는 게 무서워. 한 번 익숙해지면 왜 그런지 몰라도 하게 되거든.”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러나 피엘은 빈자리를 향해 반찬 한 조각이 놓인 작은 접시가 준비된 것을 보았다. 에마는 설명할 수 없는 부재를 매일 같은 방식으로 돌보고 있었다.
저녁밥이 차려지자 토비는 자신도 모르게 식탁의 의자를 하나 더 꺼냈다. 에마는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굳었다.
“왜요?”
“아니야. 그냥… 예전에도 그랬지.”
그녀가 내놓은 밥그릇은 다섯 개였다. 토비, 피엘, 오스벨, 벤에게 하나씩. 에마 자신까지 합하면 여섯 개여야 했다. 그런데 토비가 자리에 앉으며 아무도 앉지 않는 자리 앞에 밥그릇을 하나 더 놓았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토비. 그릇을 왜 거기 놓니?”
“어머니가 늘 그러셨잖아요.”
“내가?”
에마의 손끝이 떨렸다. 그녀는 빈 의자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주저앉았다.
“나는… 누가 올까 봐.”
“누가요?”
“모르겠어.”
그 말이 끝나자 창문 밖에 매달린 풍경이 혼자 울었다. 피엘의 수첩에도 경고가 떴다.
[수신자 주변 관계 기록 간섭 감지.]
[증인 보호 권고.]
피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마 씨.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록은 남길 수 있습니다.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억지로 떠올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마는 그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예전에 아이 둘이 싸우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아. 하나는 토비고, 하나는… 자꾸 거기서 끊겨.”
토비는 식탁에 놓인 두 번째 나무 숟가락을 만졌다. 손잡이에 낡은 칼자국이 있었다. 짧은 선 두 개와 그 옆에 작은 동그라미. 자신이 어릴 때 장난삼아 만든 표시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 표시는 제가 만든 게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알아?” 벤이 물었다.
“저는 동그라미를 이렇게 안 그려요. 오른쪽부터 둥글게 그리거든요. 이건 왼쪽부터 시작했어요.”
피엘은 순간 흠칫했다. 왼손으로 서명하는 대리 피엘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턱대고 둘을 연결할 수는 없었다. 마을 아이의 낙서까지 음모의 증거로 삼을 순 없었다.
그날 밤 토비와 피엘은 마을 기록관을 찾았다. 마을 서기 우린은 엄청난 두께의 출생 장부를 꺼냈다.
“토비 가족은 세대가 오래됐죠. 여기 있습니다.”
장부에는 에마와 남편의 이름, 아들 토비의 출생 날짜가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줄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 빈 줄에만 잉크가 번진 흔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지웠다면 종이가 상했어야 했다. 처음부터 그곳을 쓰지 못하게 만든 것 같았다.
“빈 줄이 있군요.” 피엘이 말했다.
“장부 정리하다 남긴 겁니다.” 우린이 답했다.
“모든 집에 이런 빈 줄이 있습니까?”
“아니요.”
“왜 이 집에만 있죠?”
우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눈빛이 순간 낯설게 흔들렸다.
“그건 질문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서기가 손등을 긁었다. 얇은 금빛 선이 피부 아래에서 번쩍였다. 피엘이 손을 뻗자 그 선이 화상 자국처럼 사라졌다.
피엘은 장부를 봉인하지 않았다. 대신 장부가 놓인 자리와 주변의 낡은 종이들을 그대로 기록했다. 다른 기록으로 덮어쓰는 순간 또 다른 원본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기록관을 나서기 전 토비는 우린에게 낡은 출생 장부를 빌려 달라고 했다. 우린은 당황했다. 장부를 마을 밖으로 반출하면 규정 위반이었다. 대신 그는 똑같은 종이에 빈 줄까지 포함해 그대로 베낀 사본을 만들어 주었다.
“마을에서 돌아오면 돌려주세요.”
“사본인데도요?”
“제가 만든 기록이라서요. 누가 잘못 베낀 부분이 있으면 나중에 확인해야 하잖아요.”
토비는 서기가 처음으로 자신의 업무를 자랑스럽게 말하는 듯한 얼굴을 보았다. 그는 사본을 조심스럽게 접어 넣었다.
피엘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웃었다. 한 사람이 기록을 제대로 다루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도 달라질 수 있었다. 그것은 천계 감찰국의 명령으로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마을 서기가 설명할 수 없는 빈 줄을 숨기지 않겠다고 결정한 순간 시작된 변화였다.
서고 문 옆에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멀리서 저녁종이 울렸다. 토비는 옛날에 그 종이 울리면 누군가와 함께 집으로 뛰어가던 기분을 희미하게 떠올렸다. 누가 먼저 들어가 밥을 먹을지 내기하던 일이었다. 그 기억의 절반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 벤이 골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악마 냄새가 나.”
“또 그림자 거래입니까?”
“한 건은 아니야. 마을 전체가 이상한 계약에 묶여 있어. 이 사람들이 잃은 건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릴 권리야.”
“누가 대가를 냈습니까?”
“계약서엔 자발적이라고 적혀 있는데, 아무도 계약한 기억이 없어. 아주 형편없는 거래지.”
토비가 성검을 내려놓았다.
“그럼 거절하면 되잖아요.”
“그럴 때엔 계약 상대를 찾아야 해.”
벤은 마을 공동 우물 쪽을 가리켰다. 해가 진 우물 주위에 검은 실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실들은 마을 사람들의 집을 잇다가 밭 너머로 이어졌다.
피엘이 사본 장부를 펼쳤다.
[첫 원본 배송 주소: 이름 없는 밭.]
[경로 확인: 공동 우물 북쪽, 폐경작지.]
[현장 잔여 기록: 2건.]
“두 건?” 토비가 물었다.
“당신의 원본 신탁과, 그걸 받지 못하게 된 누군가의 기록일 수 있습니다.”
토비는 우물을 바라봤다. 어린 시절 누군가와 달리기 시합을 하던 길이었다. 상대가 누구였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자기가 늘 졌다는 건 생생히 기억났다.
“저쪽엔 원래 밭이 없었어요.”
“지금은?” 피엘이 물었다.
“몰라요. 이상하게 한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들은 북쪽 길을 따라 걸었다. 풀은 말라 있었고, 개울물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밤하늘에 별이 많았다. 그런데 들판 한쪽은 별빛조차 닿지 않는 검은 사각형으로 비어 있었다.
오스벨은 지팡이로 흙을 두드렸다.
“밭이 아닌 게 아니야. 여긴 땅이 삭제된 거지.”
토비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발끝에 닿은 검은 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네.’
토비는 얼어붙었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웃을 때 왼쪽 볼에 보조개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엔 내 이름을 잊지 마.’
검은 땅 위로 낡은 나무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토비가 열여덟 해 전에 심었다는 이름표였다.
거기에 적힌 글자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제12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