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비는 같은 질문을 세 번 했다.
“제 이름이 왜 거기 있어요?”
피엘은 세 번 모두 대답하지 못했다. 제0경로의 원형 서고에는 수천 장의 종이가 넘겨지는 소리만 들렸다. 그때마다 피엘이 안고 있는 장부의 표지가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안쪽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듯했다.
“제가 잘못 받은 게 용사의 신탁이고, 제대로 받을 게 다른 거라는 것까지는 이해했어요. 그런데 그 다른 게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할 일이죠?”
토비의 지적은 정확했다. 피엘이 무서워하는 것은 문서의 내용이 아니었다. 아직 읽지도 않았다. 문서 앞면에 적힌 발신자의 이름이 문제였다.
[대리 피엘.]
자신의 영혼을 나눠 만든 또 하나의 존재.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그림자를 사고, 천스물네 건의 수신자 이름을 바꾸고, 소멸 신탁까지 보냈을 가능성이 있는 자. 그가 친절하게 답을 알려 줄 리 없었다.
“봉투에 들어 있는 문장을 읽는 순간 수신자가 확정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읽으면요?”
“아직은 모릅니다.”
“그럼 함부로 열지 않으면 되죠.”
토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세상을 구할 용사가 되라는 말도, 농부를 그만두라는 말도 불편했던 사람에게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마라가 중앙 분류기 옆에 놓인 낡은 책상을 가리켰다. 책상에는 작은 저울과 봉투 칼, 인주가 있었다.
“야간 배달실에서는 수신인이 불확실한 편지를 먼저 열지 않아요. 겉면의 주소, 접수 날짜, 발신 권한부터 대조하죠.”
“여기도 그 원칙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피엘이 물었다.
마라는 우편 열쇠를 빼냈다.
“보관인은 아직 저니까요.”
그녀가 봉투를 저울 위에 올리자 바늘이 왼쪽으로 기울었다. 얇은 종이 한 장인데도 반대편 저울판에 올려놓은 은화 열 개보다 무거웠다.
오스벨이 코를 찡그렸다.
“종이가 무거운 게 아니라 뒤에 붙은 가능성이 무겁군. 재미있는 재료야.”
“제발 병아리 사료에 섞을 생각은 하지 마세요.” 벤이 말했다.
“나는 그렇게 무책임한 학자가 아닐세.”
“어제 달걀에 번개 마법을 걸어 놓고 ‘조리법 연구’라고 한 사람은 누구지?”
“그건 온도 조절 실험이었네.”
피엘은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다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자신이 소멸될 뻔한 서고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그러나 그 소란 덕분에 손끝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서고에는 그동안 손댈 수 없었던 편지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토비가 다가가 보자 오래된 목재 서랍마다 날짜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적혀 있었다. 어떤 것은 계절 대신 ‘첫눈을 본 날’, 어떤 것은 ‘어머니가 웃었던 마지막 아침’이라고 되어 있었다. 마라가 설명했다.
“사람들이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도 보낼 수 있게 만든 접수 방식이에요. 제0경로가 지금처럼 쓰이기 전에는요.”
“그러면 사람의 마음을 알면 주소도 찾을 수 있나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죠. 그걸 기억하는 다른 사람, 그리고 편지를 받겠다는 당사자의 의사가 필요해요.”
마라는 서랍 하나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보낸 사람도 받는 사람도 적히지 않은 초록 봉투가 있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한 번은 내가 너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좋겠다’라는 문장만 겉면에 쓰여 있었다.
“보관 기간이 백삼십 년이 넘었어요. 그렇다고 버릴 수는 없죠.”
피엘은 그 봉투를 한참 바라보았다. 천계에서는 유효 기간이 지난 소원을 자동 소각한다고 배웠다. 천계 업무 평가에서 그가 유난히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도 보관 기한을 연장하는 민원을 너무 자주 받아 줬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그 일이 무엇을 지킨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수신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보관인이 다음 보관인에게 넘기죠. 내 다음 사람은 나보다 오래 살 수도 있으니까.”
피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어떤 기적보다 오래가는 책임이었다.
토비는 이곳을 나갈 때 편지 중 하나를 몰래 가져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 누군가의 것이었고, 누군가는 그게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
마라가 검사 결과를 읽었다.
[발신인 신원: 확인.]
[수신인 신원: 미확정.]
[열람 위험: 독자가 신탁의 당사자로 자동 지정될 수 있음.]
[대체 열람: 수신인 동의 및 제삼자 증인 둘 필요.]
“그럼 제가 동의하면 되겠네요.” 토비가 말했다.
피엘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동의가 뭘 뜻하는지 먼저 설명해야 합니다. 이건 단순히 편지를 읽는 게 아니에요. 받아야 할 운명을 확정할 수도 있습니다.”
“운명이라는 말이 참 이상해요.”
토비가 발밑에 놓인 작은 콩을 주웠다. 조금 전 분류기를 멈추게 했던 바로 그 콩이었다.
“밭에 뭘 심을지 정할 때는 흙이랑 날씨를 보거든요. 누가 멀리서 ‘내가 네 작물을 정했어’라고 말하면, 일단 그 사람한테 밭이 어디 붙어 있는지부터 물어요.”
“이번에는 밭보다 큰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제 이야기잖아요.”
피엘은 입을 다물었다. 하급 천사로 삼백 년을 근무하면서 그가 가장 자주 잊은 사실이었다. 신탁의 주인은 서류를 발행한 쪽이 아니라 그것을 받는 사람이었다.
“좋습니다. 내용 확인에만 동의하는 겁니다. 이행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기록하겠습니다.”
피엘이 수첩에 조항을 적었다. 마라가 보관인으로, 오스벨과 벤이 증인으로 서명했다. 벤은 악마식 계약 조항을 하나 추가했다.
[해석 불명인 의무는 수신인에게 전가하지 않음.]
“뜻 모를 문장에 서명해 놓고 평생 고생하는 인간을 너무 많이 봤거든.”
“악마가 그런 말을 해도 됩니까?” 피엘이 물었다.
“내 고객들이 무슨 계약을 하는지 알아야 나중에 항의를 덜 하지.”
봉투가 저절로 열렸다. 그러나 편지 안에는 글자가 없었다. 매끈한 흰 종이 한 장과 흙 묻은 손가락 자국 하나만 있었다.
토비가 눈을 깜박였다.
“누가 편지를 쓰다가 감자 캐러 나갔나 봐요.”
그가 손가락 자국에 자신의 검지를 가져갔다. 크기가 정확히 맞았다. 종이 표면으로 밭고랑이 떠오르더니 서고 바닥에 작은 흙길이 그려졌다.
[원본 수신자 확인 절차.]
[자격 확인 질문: 당신이 가장 먼저 심은 것은 무엇입니까?]
“콩입니다.”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다음은 감자요. 아니, 어릴 땐 밀을 심었나?”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오스벨이 물었다.
“작물이 아니라면?”
토비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먼저 농사일 목록이 밀려왔다. 올해는 비가 적었다. 감자를 캐려면 남쪽 밭부터 손대야 했다. 겨울 전에 지붕도 고쳐야 한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지금 이 상황에서 왜 이렇게 또렷한지 알 수 없었다.
“신탁이 뭘 묻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밭일 말고는 특별히 한 게 없는걸요.”
“특별한 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피엘이 말했다.
“천계에서는 저 같은 사람을 용사라고 부를 때가 있나요?”
“정말 드물죠.”
“그럼 이번엔 왜 불렀을까요?”
피엘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배송 기록에 오스벨의 원래 신탁이 있고 토비에게는 성검이 배송됐다. 하지만 두 사건이 단순한 실수인지, 누군가 토비를 보호하려 한 것인지, 아니면 토비를 특정 장소로 움직이게 하려는 계산인지 아직 아무 증거도 없었다.
“확실한 건 하나뿐입니다. 당신은 남이 대신 쓰는 줄거리대로 살 필요가 없습니다.”
토비는 웃었다.
“그건 좀 마음에 드네요. 제가 쓰는 줄거리에는 감자 수확이 아직 남아 있거든요.”
그가 주머니에서 콩을 하나 꺼냈다. 껍질이 조금 깨져 있었다. 어린 시절 누가 나눠 준 씨앗과 비슷했다. 그 씨앗은 심으면 자라지 않았는데도 왜인지 버릴 수 없었다.
“우리 집에 가면 이거랑 똑같은 걸 여러 개 찾아볼 수 있어요. 어머니가 버리지 말라고 하셨죠.”
“씨앗을요?”
“아뇨. 버리지 말아야 할 게 씨앗인지, 같이 심은 사람인지 그땐 잘 몰랐어요.”
토비는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고향 보리골의 여름이 떠올랐다. 비가 오지 않던 해, 어머니는 빈 밭을 보며 화를 냈다. 토비는 어린 마음에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이 가엾었다. 그래서 길가에서 주운 나무 조각에 이름을 새겨 심었던 적이 있다.
그 이름은 누구의 것이었더라.
머릿속이 뿌연 안개처럼 흐려졌다.
“어떤 사람의 이름을 심었어요.”
흙길이 한 뼘 더 길어졌다.
“어린애 장난이었죠. 누가 없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이름이라도 땅에 남겨 두면 돌아올까 싶어서요.”
[기억 일치.]
[수신자 임시 확인: 토비.]
[원본 배송 주소: 보리골, 이름 없는 밭.]
토비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보리골을 떠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도 오래전 기억 하나는 누가 종이로 덮어 놓은 것처럼 가려져 있었다.
“이름 없는 밭이라니요. 우리 마을에 그런 곳은 없는데.”
마라는 장부를 펼쳤다. 토비의 이름과 함께 얇은 선이 하나 나타나 보리골을 가리켰다. 선 끝에는 또 다른 문장이 있었다.
[미회수 물품: 처음 심은 이름.]
[원본 열람은 현장 확인 후 가능.]
벤이 휘파람을 불었다.
“누가 아주 성가신 방식으로 우릴 초대했군.”
“함정이겠죠?” 피엘이 물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아. 하지만 주소가 진짜라는 것도 잊지 마.”
오스벨은 은빛 달걀을 귀에 대고 흔들었다. 안쪽에서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났다. 병아리가 알껍데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아니라, 먼 곳에서 종을 울리는 소리였다.
“이 물건도 그 마을을 알고 있는 모양이군.”
마라는 제0경로의 보관 기록을 책 한 권으로 축소해 피엘에게 건넸다. 원본 장부는 서고에서 빼낼 수 없었다. 대신 보관인의 열쇠를 통해 검증 가능한 사본을 만들 수 있었다.
“이건 가져가세요. 저는 여기 남아 있을게요.”
피엘이 놀라 물었다.
“같이 오시지 않습니까?”
“누군가는 우편물을 지켜야죠. 제가 나가면 라베른이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토비는 진지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라 씨한테는 제가 돌아와서 편지를 전해 줄게요.”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요?”
“그건 나중에요. 아직 받을 사람이 어딨는지 모르니까.”
마라가 웃었다. 그녀는 보관 열쇠로 작은 동판 하나를 찍어 피엘의 수첩에 붙였다.
[보관인 원격 확인 권한 부여.]
[제0경로 원본: 이동 금지.]
[공개 검증용 사본: 발행 완료.]
마라가 떠나는 사람들을 위해 우체국의 작은 봉인을 찍어 주었다. 토비의 손등에는 금빛 원 하나가 생겼다.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은 원이 생기지 않았다. 오스벨에게는 기다란 깃털 문양, 벤에게는 검은 점 세 개가 나타났다. 피엘은 자기 손등에 아무 문양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만 빠졌습니까?”
“보관인 권한은 이미 수첩에 붙였잖아요.” 마라가 말했다. “각자의 신원을 확인할 표식이에요. 모양은 다른 사람이 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오래 지켜 온 약속에 따라 나타나죠.”
토비는 금빛 원을 들어 보였다.
“이건 감자예요?”
“그럴 수도 있죠. 본인이 알아볼 수 있으면 돼요.”
오스벨은 깃털을 보고 ‘닭 연구의 위대한 성과’라고 적으려다가 말았다. 벤은 자기 손등의 세 점을 가리키며 불평했다.
“나는 악마인데 왜 이렇게 작지?”
“중요한 게 늘 크게 보이는 건 아니니까요.” 마라가 말했다.
피엘은 그 말을 마음속에 남겼다. 이제 그는 기록을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손등이 비어 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떤 약속을 남길지 아직 정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신전에서 나왔을 때 새벽이었다. 젖은 흙에서 풀 냄새가 올라왔다. 토비는 지평선을 보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천사님.”
“네?”
“우리 마을에 돌아가면 제가 알아야 할 게 있어요.”
“무엇입니까?”
“저희 어머니가 한 번씩 이상한 말씀을 하셨거든요. 아들은 하나인데 밥그릇은 늘 둘을 놔야 한다고.”
피엘의 걸음이 멈췄다.
토비는 평소처럼 웃어 보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릇 하나가 늘 비어 있었어요.”
그때 수첩 사본에서 새로운 안내가 떠올랐다.
[보리골 방문 예정 통지.]
[수신인: 토비.]
[동행인: 피엘 외 2인.]
[도착 전 삭제할 증인: 1명.]
문장 끝의 서명은 왼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대리 피엘이 그들보다 먼저 보리골에 연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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