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작품, 이어지는 이야기 · 페이루아에서 다음 페이지를 만나보세요
작품으로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10화
PAYLUA ORIGINAL · 제10화

10화. 네가 나를 만들었다

신탁이 잘못 배송되었습니다 · 6,256자

오프라인 책장
신전 아래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계단 안쪽에는 어딘가에서 새어 나온 따뜻한 빛이 깔려 있었다. 젖은 돌계단과 차가운 손잡이 사이로 종이 냄새가 났다. 피엘은 벽을 짚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오른쪽 날개 끝이 사라진 뒤부터 몸의 균형이 잘 맞지 않았다. 토비가 앞에서 등불을 들었다. “천사님, 괜찮으세요?” “네. 다만 조금 이상한 걸 기억해 냈습니다.” “좋은 기억이에요?” “아직 모르겠어요.” 피엘은 방금 떠오른 작은 천사의 손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신과 같은 목소리로 봉투를 부탁했다. 그때 자신은 무엇을 대답했을까.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여전히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계단 끝에는 거대한 원형 서고가 펼쳐져 있었다. 수천 개의 칸으로 나뉜 벽마다 봉투가 꽂혀 있었고, 중앙에는 오래된 우편 분류기가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그 위로 하얀 종이가 눈처럼 쏟아졌다. 종이는 바닥에 닿기 전에 각각의 수취함으로 흩어졌다. “세상에….” 마라가 입을 가렸다. 그녀가 평생 일한 야간 배달실은 이곳의 조그만 모서리 하나보다 작았다. 오스벨이 분류기 옆 명판을 읽었다. [제0경로. 배송하지 못한 기도와 아직 받을 수 없는 신탁을 임시 보관함.] “본래는 나쁜 장소가 아니었군.” “아무것도 원래부터 나쁜 것은 아니지.” 벤이 대답했다. “누가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야.” 토비는 벽에 꽂힌 봉투 하나를 보았다. 주소는 지워졌지만, 봉투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살려 주세요.’ 아까 우체국에서 본 편지와 비슷한 목소리였다. 토비는 손을 뻗었다가 피엘의 경고를 떠올리고 멈췄다. 그때 중앙 분류기가 덜컥 멈췄다. 천장 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라베른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는 검은 장갑을 바로잡으며 느긋하게 계단을 걸어왔다. 뒤에는 금속 날개 집행자 세 명이 따랐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가 말했다. “제0경로의 문을 열 사람을 찾기 어려웠는데, 당신들이 대신해 주었군요.” 벤이 이를 드러냈다. “처음부터 여기로 유도한 거냐?” “처음부터는 아닙니다. 마라 씨가 열쇠를 들고 있다는 건 예상 밖이었어요. 하지만 결과가 좋으니 상관없지요.” 라베른은 마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보관인 권한을 양도하십시오.” 마라는 뒤로 물러났다. “당신들이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어요.” “그건 업무상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엄마 이름을 잊게 만드는 것도 업무입니까?” 라베른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개별 사정은 기록에 남지 않습니다.” 그 말에 토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라베른은 토비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바라봤다. 농부의 낡은 셔츠, 닳은 장화, 이끼가 붙은 성검.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는 듯했다. “당신은 우연히 선택받은 수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그래도 여기 있는 사람이 다치는 건 그냥 못 봅니다.” 집행자들이 창을 들었다. 오스벨이 지팡이를 세우고, 벤이 검은 그림자를 발밑에 펼쳤다. 그러나 라베른은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손짓했다. 분류기 위에 거대한 장부 한 권이 나타났다. “천스물네 건의 대체 배송 기록입니다. 이 장부를 회수하면 모든 오류를 복구할 수 있어요. 그리고 피엘, 당신의 소멸 명령도 취소됩니다.” 피엘의 가슴이 뛰었다. 명령이 취소된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 천계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장부는 라베른의 손끝에 묶여 있었다. “대가가 있겠죠.” “당연히 있습니다. 지난 며칠의 기억을 모두 반납하십시오. 당신뿐 아니라 동행한 사람들의 기억도요. 그다음에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마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브린 사람들은요?” “필요한 행정 절차를 밟겠습니다.” “이제 그 말은 못 믿겠어요.” 라베른의 미소가 약해졌다. 그는 손끝으로 장부 한 페이지를 넘겼다. 붉은 수가 떠올랐다. [피엘 소멸 집행 재개까지 00:29:18.] 오스벨이 급히 피엘을 돌아봤다. “아직 하루 이상 남아 있던 것 아니었나?” “외부 승인에 의해 재조정됐습니다.” 라베른이 대답했다. “이곳은 제0경로라서 상위 명령이 직접 닿거든요.” 피엘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시계를 제멋대로 고치며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그런 방식을 ‘운영 효율’이라는 말로 받아들여 왔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가 없어지면 장부를 누가 읽죠?” “그건 당신이 염려할 일이 아닙니다.” “저는 배송 담당자입니다. 받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기 전에는 절대로 봉투를 넘기지 않겠습니다.” 그는 수첩을 펼치고 제0경로의 명판을 가리켰다. “이곳은 우편물을 임시 보관하는 장소입니다. 보관인이 허가하지 않은 대량 회수는 원래 불법입니다.” 마라가 앞으로 나섰다. “그럼 제가 거부합니다.” 라베른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인간 따위가 천계의 기록을 거부할 권리는 없습니다!” “보관인 자격을 준 건 당신들이 만든 규정이에요.” 토비가 말했다. 그는 씨앗 주머니에서 작은 콩 한 알을 꺼내 분류기 바닥에 놓았다. “규정대로 해 보시죠.” 오스벨이 재빨리 이해했다. 분류기는 어떤 수취함에 무엇이 들어가야 할지 계산하는 장치였다. 그곳에 수신자 없는 씨앗을 놓자 분류기가 잠시 멈췄다. [화물 분류 불가.] “분류 불가 물품의 임시 보관을 요청합니다!” 피엘이 외쳤다. 수첩과 분류기가 연결되며 수많은 금빛 선이 뻗었다. 라베른이 장부를 닫으려 했지만 마라가 우편 열쇠를 들어 올렸다. “원본을 보호합니다.” 오스벨이 은빛 달걀을 분류기 위에 비췄다. 빛이 반사되며 장부 속에서 보이지 않던 문자들이 드러났다. 첫 번째 기록은 열여덟 해 전의 것이었다. [최초 등록명: 피엘.] [최초 배송 요청: 선택된 자의 이름을 숨길 것.] [서명 보존 방식: 동일 영혼 이중 인장.] “동일 영혼… 이중 인장?” 피엘이 중얼거렸다. 벤은 얼굴을 굳혔다. “그래서 거래소에서 네 영혼 서명을 읽은 거야. 가짜는 단순히 네 모습을 흉내 낸 게 아니었군.” 장부의 다음 페이지가 펼쳐졌다. [원본 수신자 보호를 위해 배송 담당자 기억 분리.] [기억 보관 위치: 제0경로.] [분리된 기록의 관리자: 대리 피엘.] 피엘은 손에 힘이 빠졌다. 열여덟 해 전 자신이 승인했다는 문서는 실은 그의 기억을 분리해 만든 또 하나의 서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리 피엘이 원본 기록에 계속 접근하고 있었다. 라베른이 이를 악물었다. “그 페이지는 보여 주면 안 됐는데.” 그는 장부를 낚아채려 했다. 벤이 그림자를 뻗어 그의 장갑을 붙잡았다. 오스벨이 마법진으로 분류기를 지탱하는 사이 토비가 성검을 땅에 꽂았다. 지하 깊은 곳인데도 돌틈에서 여린 뿌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뿌리는 글자를 지우지 않고 페이지를 펼친 채 고정했다. 피엘은 이시아의 종을 꺼냈다. 첫 번째는 브린에서 사용했다. 두 번째를 사용하면 이제 마지막 하나만 남는다. 그는 주저하다 종을 흔들었다.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장부 위의 위조된 인장들이 조각조각 갈라졌다. [집행 명령 검증 결과.] [원본 승인 부재.] [피엘 소멸 신탁: 위조.] 피엘은 숨을 들이켰다. 검은 글자들이 하나씩 지워졌다. 날개 끝에서 떨어져 나갔던 빈자리도 미세하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소멸 집행 영구 정지.] 그는 그제야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토비가 환하게 웃었다. “됐다! 이제 안 사라지는 거죠?” “네.” 피엘은 목이 메어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이번에는 정말로요.” 라베른은 조용히 몸을 뒤로 뺐다. 집행자 세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벤이 쫓아가려 했지만 피엘이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먼저 이곳의 기록을 지켜야 합니다.” 라베른은 어둠 속에서 차갑게 웃었다. “한 번의 승리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명이 두 개인 이유를 아직 모르시잖습니까.” 그는 계단 위로 사라졌다. 집행자들도 뒤따랐다. 서고에는 분류기가 돌아가는 소리만 남았다. 장부에는 배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흔적도 남아 있었다. 문서 아래쪽에 작게 붙은 부록이었다. 지워진 수신자 이름 대신 사건이 일어난 장소와 날짜가 적혀 있었다. 작은 왕국의 성벽, 산속에 묻힌 수도원, 폭풍이 지나간 해안 마을. 토비는 그 지명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었다. “저기는 마을에 장터가 열리는 곳이에요.” 그가 첫 번째 지명을 가리켰다. “여기는 제가 씨앗을 팔러 갔던 도시고요. 생각보다 가까운 곳도 많네요.” 피엘은 그 사실이 오히려 무서웠다. 오배송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천계의 먼 사무실에서 벌어진 사고 같았다. 그러나 기록에 적힌 장소는 자신이 서 있는 땅에서 닿을 수 있는 마을들이었다. 누군가가 실제로 살아가던 집, 저녁마다 식사를 하던 부엌, 가족들이 기다리는 문 앞이었다. 마라는 부록 한쪽에서 익숙한 필체를 발견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의 필체와 닮아 있었다. 그러나 기록은 오래되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는 봉투를 손끝으로 짚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제가 편지를 보관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고민한 적도 많았어요. 정작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을 때가 더 많거든요.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보니, 누군가 찾을 수 있도록 남겨 두는 것만으로도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요.” “맞습니다.” 피엘은 처음으로 선뜻 대답했다. “문서를 보존하는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잘못한 일을 확인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는 일이죠.” 벤은 장부에서 자신의 지하 거래소와 연결된 계약 한 건을 발견했다. 대가를 모두 지불한 거래였지만 수신자 이름이 통째로 지워져 있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우리 쪽 장부도 자꾸 모순이 생겼던 거야. 내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누군가 세계의 기억을 고쳐 쓴 거지.” 오스벨은 말없이 은빛 달걀을 장부 위에 비췄다. 달걀 안에서는 따뜻한 빛이 일렁였다. 그는 처음 자신이 암탉을 키우라는 신탁을 받았을 때를 떠올렸다. 세상이 자기를 조롱한다고 생각했지만, 신탁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람들을 살릴 기회가 생겼다. “난 언젠가 닭을 키우는 일도 훌륭한 연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지. 하지만 그 말만으로 누가 신탁을 잘못 보냈는지 묻지 않을 수는 없네.” 그는 피엘을 바라봤다. “자네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이제 분명해졌군. 이 기록을 사람들에게 돌려주는 일을 끝내야 하니까.” 피엘은 세 사람과 마라를 차례로 보았다. 처음 지상에 내려왔을 때 자신에게는 정정해야 할 주소 두 개뿐이었다. 이제는 함께 그 일을 책임지겠다는 동료가 생겼고, 바르게 돌려놓아야 할 삶이 천 건도 넘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혼자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피엘은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천스물네 건 가운데 열두 건은 브린 마을에서 복원됐지만, 나머지 천열두 건은 여전히 원래 주소를 잃은 채였다. 이름 칸은 모두 공백이었다. 그 위에 새로운 편지 하나가 자동으로 출력됐다. 봉투에는 피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끝에 점을 찍는 필체가 아니었다. 왼손으로 급히 휘갈긴 글씨였다. [수신자: 피엘.] [발신자: 대리 피엘.] [내용: 네가 나를 만들었으니, 나를 멈출 자격이 있는지도 네가 증명해.] 피엘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천스물네 건의 주소가 적힌 장부를 먼저 품에 안았다. 자신이 사라지지 않게 된 지금, 해결해야 할 일은 오히려 분명해졌다. “토비 씨. 아직 밭에 돌아갈 수 없게 됐습니다.” 토비는 한숨을 쉬었다. “감자 수확철이 다 지나가겠네요.” “죄송합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는 성검을 어깨에 메며 웃었다. “그런데 천사님. 주소를 잘못 쓴 사람은 직접 찾아가서 고쳐야 하는 거 아니에요?” 피엘은 토비를 바라봤다. 지상에 내려온 첫날, 토비가 성검을 돌려주며 했던 말과 비슷했다. 복잡한 법률과 높은 직책 아래 가려진 답을 농부는 언제나 간단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피엘은 수첩을 열어 새 업무를 등록했다. [개인 조사 업무 개시.] [대상: 제0경로에 남은 오배송 1,012건.] [최종 목표: 원래 수신인 확인 및 전달.] 그런데 등록을 마친 순간, 아직 뜯지 않은 대리 피엘의 편지 뒷면에서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첫 번째 원래 수신인: 토비.] [추가 안내: 그가 진짜로 받아야 했던 것은 씨앗 관리법이 아니다.] 토비는 피엘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왜요? 또 제 이름이 나왔어요?” 피엘은 그에게 편지를 보여 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이번에는 농부가 어쩌다 용사가 됐다는 이야기보다 더 큰 무언가가 뒤에 숨겨져 있었다.

PAYLUA 소설 본문은 인쇄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제10화 끝

읽은 위치는 이 브라우저에 저장되며 로그인 중에는 계정에도 동기화됩니다.
READER DISCUSSION

제10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 주세요.로그인회원가입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