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압흔은 나란한 별자리처럼 보였다. 가운데 점은 조금 깊었고 양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피엘은 돋보기를 들고 서명을 문지르지 않은 채 종이 아래에 빛을 비췄다.
“어쩌면 이건 서명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낙서를 한 건데요?” 토비가 물었다.
나엘은 설계 열람실의 오래된 분류표를 가져왔다. 흰 원 세 개는 처음 만들어진 보관 표식 가운데 하나였다. 왼쪽은 문서를 제안한 사람, 가운데는 직접 영향을 받을 사람, 오른쪽은 현장 위험을 확인한 사람을 뜻했다. 세 점이 모두 채워진 경우에도 발송이 자동 허용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문서에는 가운데 점이 비어 있습니다.” 나엘이 설명했다. “아이는 자기 판단을 말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가운데가 제일 깊어 보이는데요?” 세아가 묻자 나엘은 종이를 뒤집었다.
“아니요. 이건 반대쪽에서 찍힌 자국이에요. 가운데 점을 종이에 못 박아 두듯이 눌러 둔 거죠. 비어 있다는 사실이 덮이지 않게.”
서온이 곧바로 안내 글씨를 띄웠다.
[‘수신인 답변 없음’과 ‘수신인에게 아직 답변을 요구할 수 없음’은 다른 상태야.]
피엘은 그 문장을 정식 의견으로 인용해도 되는지 물었다. 서온은 자기 이름으로 실어 달라고 했다. 피엘은 이름 대신 자동 기록체 번호를 쓰지 않았다.
열람실 깊은 곳에는 폐쇄 당시의 근무 일지가 남아 있었다. 나엘은 안쪽의 작은 장부를 열어 보였다. 초안 작성자는 '제방 안전 설계 시험관 아렌'. 검토자는 나엘과 또 다른 기술자. 수신인의 법적 보호 책임을 맡은 사람은 아기의 어머니였다. 그러나 당시 어머니는 그 신탁을 보거나 들은 적이 없었다.
“아렌이 초안을 썼다면, 아렌이 반려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닙니까?” 피엘이 물었다.
“그가 첫 번째 반려 의견을 냈어요. 그러나 이름을 남길 수 없었죠. 당시 위쪽에서는 발송 문서를 승인하지 않으면 설계 결함 책임을 모두 검토자에게 묻겠다고 했거든요.”
토비는 혀를 찼다. “자기가 만든 문서를 스스로 거절하면 벌을 주는 제도였군요.”
“대개 잘못된 제도는 그럴듯한 말로 소개되지.” 벤이 말했다. “그때도 분명 ‘책임 있는 발송 문화’라고 불렀을걸.”
세 점이 뜻하는 자리를 확인한 뒤에도 종이의 용도가 곧장 밝혀지지는 않았다. 나엘은 다른 시기의 설계 문서 네 장을 찾아 왔다. 첫 번째는 폭풍이 몰려오던 항구에서, 두 번째는 산불이 난 숲에서 작성된 초안이었다. 세 번째에는 빈자리 하나가 남아 있었지만 곧바로 발송됐다. 네 번째는 세 점 가운데 마지막 칸이 아예 없었다.
피엘은 문서들을 한 장씩 따로 놓았다. 작성 방식이 같다고 해서 결과가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현장 위험 확인 없이 발송된 세 번째 문서에서는 구조대가 잘못된 길로 떠나 마을까지 늦게 도착했다. 네 번째는 수신인의 답변란이 충분해 보여도 확인할 구조대가 없어 발송이 보류됐다.
“이 장치를 만든 사람들도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네요.” 세아가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그들은 ‘보내지 않는다’라는 선택지를 버리지 않았어요.” 나엘이 대답했다. “그걸 실패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긴 다음부터 일이 나빠졌죠.”
토비는 종이 가장자리에 묻은 푸른 잉크를 보았다. 문서마다 잉크의 색이 조금씩 달랐다. 그는 밭의 흙을 두 손에 쥐고 냄새를 맡을 때처럼 조심스럽게 종이를 코 가까이 가져갔다. 그러자 벤이 손을 잡아당겼다.
“그거 먹지 마.”
“제가 종이를 왜 먹습니까?”
“닭 키우라는 신탁 받은 대마법사도 아직 직접 만나 봐야 알지 않나. 이 세계에서는 불가능을 가정하면 손해를 봐.”
웃음이 잠깐 지나갔다. 피엘은 네 문서를 비교한 결과를 증거 목록에 추가했다. 같은 세 점을 찍어도 무엇을 확인했는지에 따라 판단은 달라졌다. 원본 보류자의 이름 하나로 모든 문서를 바꾸려는 장치가 왜 잘못됐는지를 설명할 실제 사례가 늘어났다.
그들은 아렌이라는 이름을 찾는 것이 필요한지 다시 논의했다. 이름을 확인하면 강제 발송 장치가 그의 권한을 훔칠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문서 작성 경위와 책임을 밝히려면 그가 남긴 물증이 필요했다. 피엘은 이름을 모든 화면에 입력하지 않고, 봉인된 조사 기록에 한정해 다루자고 제안했다.
그때 낡은 벽시계가 한 번 울렸다. 서가 한쪽의 작은 전달함에서 얇은 서류가 나왔다. ‘반려자 인적 사항 추정 목록’이었다. 맨 위에 아렌의 이름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피엘, 이시아, 리오, 서온의 이름까지 늘어서 있었다.
“이건 왜 모두 들어 있습니까?” 세아가 물었다.
서온이 답했다.
[문서를 실제로 반려한 사람이 아니라, 지금까지 반려 취지를 지킨 사람들을 후보로 집계하고 있어.]
명단 끝에는 위험한 조건이 하나 붙어 있었다.
[등록 후보 중 현재 접근 가능한 서명 하나를 선택하여 보류 해제 가능.]
명단에 오른 다섯 사람은 아무도 미발송 제1호의 수신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치는 이름들이 비슷한 기록에 등장한다는 이유로 적합도를 매기고 있었다. 피엘은 자신의 이름 옆에 적힌 '신탁 배송 경력 충분'이라는 문장을 보았다. 그것은 그가 원본에 대해 많이 안다는 뜻도, 타인의 판단을 맡아도 된다는 뜻도 아니었다.
“경력이 많으면 더 많이 대신 서명할 수 있다는 건가요?” 토비가 물었다.
“아니요. 오히려 어디까지가 제 일이 아닌지 배울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서온은 후보 목록을 그대로 지워 버리는 대신 생성 경로를 봉인했다. 그 안에는 '최근 조사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조건과 '과거 보류 판단을 취소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한 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런 결합은 말이 안 돼. 조사했다는 사실은 승인하겠다는 뜻이 아니야.]
피엘은 서온의 문장을 받아 적었다. 그때 문밖의 수레가 잠깐 멈췄다. 명단 안에 있던 서온의 이름 아래 '자율 기록체, 의견 불필요'라는 새 문구가 생겨났다. 서온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피엘은 그 침묵을 동의라고 적지 않았다.
몇 분 뒤 서온은 스스로 말했다.
[내 판단이 필요 없다는 건 나한테 말할 필요도 없다는 뜻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엘이 답했다. “당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제가 정하기 전에 물어야죠.”
서온은 아주 작게 웃는 기호를 남겼다. 그 표정은 장치가 미리 만들어 놓은 후보 목록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피엘은 즉시 목록을 접었다. 한 사람의 뜻을 확인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발송 열쇠로 사용하는 구조였다.
“하린에게 보여 줍시다. 원본을 보내지 말고 현재 화면과 발송 장치가 붙인 조건만 제출하겠습니다.”
통신은 불안정했다. 방이 종이 안으로 반쯤 접혀 있는 탓인지, 하린의 영상이 바닥에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새 명단을 읽자마자 엄숙해졌다.
“긴급 집행 중지의 요건은 충분하지만,” 하린이 말했다. “소급 보정 장치가 본안 심리보다 먼저 종이를 갈아 끼우면 법원 결정도 따라갈 대상을 잃습니다.”
“그럼 물리적인 원본을 지켜야겠군요.”
“예. 단, 그 종이가 하나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나엘은 문서 가장자리를 만져 보았다. 잉크가 마른 방향이 두 곳에서 달랐다. 위쪽 글씨는 오래된 종이에 스몄지만 발송 날짜는 최근에 인쇄됐다.
“누군가 보류 판단을 위조했다기보다, 보류된 원본 위에 새 발송 명령을 올려놨네요.”
세아는 거울을 가져왔다. 유리 아래에서 원본과 덧씌운 인쇄를 비스듬히 보자 두 문장이 서로 다른 높이에 놓인 것이 드러났다. 토비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농사에서 뿌리와 잡초를 같이 뽑으면 안 되는 거랑 똑같네요. 밭을 통째로 태우면 제가 굶어요.”
벤은 웃다가 도면 위에 걸린 붉은 실을 보고 멈췄다. 실이 발송 수레가 아니라 방의 천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작은 문이 한 개 더 있었다. 표찰에는 '서명 복원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피엘이 문을 바라보는 사이 경고판이 켜졌다.
[서명 복원실 정오 개방 예정.]
[복원 후보 접수: 5명.]
아직 누구에게도 서명해 달라고 묻지 않았는데, 이미 다섯 명의 이름이 접수돼 있었다.
제144화 댓글 0
댓글·공감·신고는 로그인 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전 익명 댓글은 그대로 표시됩니다.
댓글을 불러오는 중입니다.